조금은 귀여운, 감정과 이미지
XCOPY의 해골 글리치 작품들 XCOPY는 유난히 치아가 들쭉날쭉하고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해골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배경은 어둡고 강한 빨강과 초록, 파랑을 사용하여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깁니다. 글리치는 강렬한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각인시키고 있죠. 얼굴을 보면 FOMO가 온 NFT투자자들, Paper Hands로 단기 차익을 실현했다가 공황에 빠진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와 같은 극단적인 불안과 공포 이미지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무섭게만 볼 건 아니에요. 삐뚤빼뚤한 치아와 놀란 토끼눈을 중심으로 자꾸 보다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거든요. 누구나 지금, 혹은 언젠가 한 번쯤은 어떤 이유로든 지을 수 있는 표정이잖아요. 낯선 이미지인데 의외로 익숙한 감정이 꽉 들어차 있는 셈이에요. 어쩌면 글리치의 가면 속에 숨어 있는 본연의 감정을 우리는 너무 꽁꽁 싸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낯섦과 익숙함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겉과 속의 괴리가 커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우주에 숨겨 놓았던 디스토피아를 어느덧 슬금슬금 끄집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All Time High in the City 글리치처럼, 아이러니하게
따지고 보면 XCOPY가 글리치 아티스트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당한 아이러니를 내포해요. XCOPY가 적극 옹호하는 블록체인의 특징은 데이터가 수정되거나 변조되지 않았음을 보증하는 '무결성'입니다. 분산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의 '오류가 없음'을 검증하는 것인데 이 블록체인을 활용한 XCOPY의 작품은 디지털 세계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소재이자 도구로 삼은 예술입니다. XCOPY는 Max Pain and Frens, Grifters와 같은 NFT프로젝트들을 통해 직접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명성의 크기만큼이나 그의 작품을 패러디한 작품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최근까지도 King Xerox, Bongdoe와 같은 뛰어난 글리치 아티스트들이 등장해 XCOPY의 뒤를 잇고 있죠. 앞서 소개한 NFT아티스트 DeeKay 역시 artynft와의 인터뷰에서 XCOPY와 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어요. 세기말적 감성의 글리치 아티스트 XCOPY는 이처럼 NFT아티스트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성과 부, 인기를 누리며 말 그대로 창작의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KING XEROX의 글리치 작품 BLACKSMITH
디스토피아 몽상가의 무서운 집념
XCOPY는 글리치 아트를 시작하면서 작품의 형식을 GIF로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NFT를 시작하기 전 약 10년 동안 텀블러(tumblr/이미지, 영상, 글 등을 공유하는 소셜미디어)에서 꾸준히 작품을 창작해 게시해 왔습니다. 요즘처럼 디지털 작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웹사이트조차 없었던 시기였기에 작품을 보여줄 공간으로 텀블러를 택한 것입니다.
XCOPY의 텀블러 사이트 하지만 텀블러의 대시보드 설정과 업로드할 수 있는 파일크기가 제한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색상 팔레트가 한정되었고 파일크기가 작고 가벼운 GIF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플랫폼의 기술적인 여건 때문에 GIF 글리치의 대명사가 되다니. 될 사람은 되나 봅니다. 그런데 정작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의 태도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에게도 무명의 시절이 있었는데요. 바로 텀블러에 작품을 업로드하던 때였죠. 텀블러에는 2010년 8월부터 2020년 4월까지 116개월(약 10년) 동안 연속으로 게시했다고 하는데요. 돈은 거의 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말이 '거의 벌지 못했다'이지, 사실상 수입이 없다시피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2018년 3월 22일 이루어진 그의 첫 GIF작품 판매 가격이 단 1파운드 가치의 이더리움이었거든요. 2018년 당시 1파운드 가치의 이더리움은 한화로 1,500원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1,500원이면 요즘 과자 한 봉지 값으로 김밥 한 줄 사 먹을 돈도 안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 8년 만에 첫 작품이 1,500원에 판매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작품 활동을 계속하실 건가요? 그리고 여러분은 내 작품의 가치가 8년 만에 드디어 인정받았다고 즐거워하며 더욱 작품활동에 매진할 건가요? 아니면 내 작품은 8년을 계속해도 겨우 1,500원 밖에 안돼, 라며 좌절할 건가요?
개인적으로 저의 생각을 얘기해 보자면 저는 후자입니다. 게으른 저로서는 작품으로 수입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10년간 꾸준히 활동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10년 활동의 보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좌절스러운 상황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생각은 다르기에 좋게 생각하면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1,500원이라니! 15,000원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바로 이때 XCOPY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작품이 1파운드에 팔렸음을 알리는 XCOPY
그는 작품이 판매되자 텀블러에 이런 말을 하며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나는 나의 첫 GIF를 1파운드에 팔았다. 아무것도 우리를 막을 순 없어 텀블러"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고? 정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년 만에 작품을 처음으로 1,500원에 팔고는 아무것도 우리를 막을 순 없다고 의기양양하다니요. 이건 마치 소더비나 크리스티에서 최소 10억에 작품이 낙찰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말 같지 않나요? 여러분이 예술가라면 작품을 1,500원에 팔고 파워 당당하게 소셜미디어에 저런 멘션을 남길 수 있으신가요? 솔직히 말해, 저라면 부끄러워 오히려 숨을 것 같습니다. 나의 시장 가치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라고 자조하면서 말이죠.
그나마도 작품이 판매된 것은 구매자가 바로 Jason Bailey였기에 가능했던 것인데요. Jason Bailey는 해커타오 편에서 소개했던 블로거로 해커타오('하나였을까요, 우리는?- 해커타오'편 참조)를 NFT아트로 인도한 유명 NFT컬렉터입니다. 크립토아트를 초기부터 소개하면서 유명해진 그는 지금도 꾸준히 컬렉팅을 하고 있습니다. Jason Bailey 정도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기에 '그나마' XCOPY의 작품을 구매했던 것이지요. 가격을 떠나 XCOPY에게는 그 자체로 엄청난 행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작품 활동을 계속할 동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2018년 첫 작품 판매를 기점으로 NFT시장은 믿기 힘든 수치의 성장을 거듭합니다. 2018년 이후 XCOPY는 현재는 이미 사라져 버린 여러 NFT마켓 플레이스를 포함 슈퍼레어 등 다양한 플랫폼에 NFT를 미팅하면서 점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첫 판매 후 4년 만인 2022년, 소더비 옥션에 작품이 경매되었고 63만 달러에 최종 낙찰되며 명실상부한 주류 아티스트로 인정받게 됩니다.
8년의 작업 끝에 처음으로 1파운드에 작품이 팔리면서도 어떤 것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며 더욱 열심히 창작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한 XCOPY. NFT 마켓 플레이스가 막 생겨나던 극초기 NFT시장에서 XCOPY는 확고한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집념이 있었던 걸까요? 어떤 것이든 열정과 노력과 확신과 운의 결합이 오늘날의 XCOPY를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소더비에서 경매된 Departed
XCOPY 같은 마인드와 열정이라면 무엇을 해도 성공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강렬한 감성과 뜨거운 집념을 가진 한 몽상가의 꿈.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까요? 현재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작품들이 즐비하지만 그 위치에 서기까지 남들은 모르는 오랜 세월의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1,500원에서 수 십억 원까지 가는 길은 10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하루아침일지도 모릅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매다, 그리고 성과가 지지부진할 때마다 저는 XCOPY가 말한 문구를 기억하며 다짐합니다. "아무것도 나를 막을 순 없어. 해보자."
소설 미디어
마켓 플레이스별 작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