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 스케일
비플(Beeple)은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라는 작품을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의 뒤를 이어 생존하는 작가 중 3번째로 높은 가격인 약 6,934만 달러(786억 원)에 판매하며 유명해진 NFT아티스트입니다. 게다가 천일도, 이천일도 아닌 무려 오천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그린 그림을 전부 모아 하나의 콜라주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압도적 스케일을 자랑합니다.
비플 미디어들은 고가에 팔린 NFT를 앞다투어 보도하며 떠오르는 투자시장으로서 NFT에 대한 뜨거운 기대감과 우려를 동시에 드러냈어요. 하지만 비싼 작품의 가격에 초점이 맞추어져서일까요? 정작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 내용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비싼 작품의 작가'보다는 어떤 과정을 거쳐 NFT아티스트가 되었고 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림에 빠진 컴퓨터 전공자
비플의 본명은 마이크 윈켈만(Mike Winkelmann)으로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거주 중이며 대학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습니다. 전기 엔지니어인 그의 아버지가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비플은 예술가의 기질이 있었는지 프로그래밍이 점점 지루해졌고 웹캠으로 단편 영화를 촬영하며 디지털 영상과 디자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영상을 만들던 때 크리스 커닝햄(Chris Cunningham)이라는 비디오 아티스트에서 큰 영감을 받았고 기하학적 루프(끝없는 반복) 영상을 만들어 온라인에 게시합니다. 그의 웹사이트에서는 이 루프 영상을 여러 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플 작품에는 디스토피아적 감성 속에서 로봇이 자주 등장하는데 크리스 커닝햄의 영상에 등장하는 로봇에 대한 묘사 그리고 약간의 기괴한 분위기와 닮아 있습니다.
Chris Cunningham의 영상 캡처 비플은 회사에 들어가서도 애니메이션, VJ클립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때 갈고닦은 영상 및 디지털 기술은 그의 예술 창작에 밑거름이 됩니다. 그림은 회사에 들어가기 전인 2007년 5월 1일에 처음 시작했는데 그 해 초 영국에서 만난 일러스트레이터가 매일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자신도 매일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한 번 마음먹은 것을 3일 동안 실천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비플의 '작심'은 무려 15년도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일: 첫 5천 일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는 Everyday에 -s를 붙여 매일의 노력이 켜켜이 쌓였음을 나타냅니다. 한 조각 한 조각 역사가 되어 네모의 픽셀에 자리 잡은 것이죠. 이 작품은 2021년 2월 25일부터 3월 11일까지 크리스티에서 경매가 진행되었어요. 시작가는 100달러. 경매에는 약 2,200만 명이 참여했는데 2주 만에 6,934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NFT작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합니다. 유명 암호화폐 트론(TRON)의 창업자 저스틴 선(Justin Sun)도 입찰액 5천만 달러로 경매에 참여했으나 낙찰에는 실패했어요.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경매 결과 이 작품의 구매자는 싱가포르의 블록체인 기업가 Vignesh Sundaresan이 이끄는 Metapurse라는 NFT 펀드였습니다. Metapurse는 이전에도 비플의 싱글 에디션 작품 20개를 약 220만 달러에 모두 구입한 적이 있을 정도로 비플과 NFT아트 시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크리스티 경매가 시작되자 마음먹고 압도적인 금액으로 낙찰을 받았죠. 전 세계적으로 NFT열풍이 불었던 2021년에 아트를 NFT의 선도적 위치에 올려놓은 기념비적인 경매였습니다. 기존 예술시장에서는 새로운 방법론과 고객 창출 수단으로 NFT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주식, 암호화폐 등의 투자시장 역시 NFT투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교집합이 생겨나게 됩니다. 투자금이 NFT시장으로 몰리면서 일찌감치 NFT를 시작한 아티스트들은 유래 없는 호황 속에서 큰돈을 벌기도 하죠. 그들 중 일부는 OG아티스트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도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BEEPLE 2020 COLLECTION MARIO
이 커다란 작품은 너무나 많은 그림들이 한 화면에 담겨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 때문에 비플은 자신의 웹사이트 beeple-crap.com 에 개별 작품들을 볼 수 있도록 라운드별(장르별)로 분류해 놓았어요. 라운드 1이 초기 작품들이며 라운드 14가 가장 최근의 작품들인데 라운드 14 이후 최신 작품들은 주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작품 형식은 최근으로 올수록 CINEMA 4D(3D 모델링 프로그램)를 이용한 작품들이 많지만 라운드 초기에는 종이에 그린 드로잉 작품, 라운드 4는 사진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라운드 1 - 부끄러운 연습장
초기에는 그림을 막 배우고 연습하는 단계로 주변 인물이나 관심 있는 소재를 자유롭게 그립니다. 첫 그림은 비플의 삼촌인 제임스를 그렸는데 그 후로는 그림 연습을 하는 느낌으로 주변 인물이나 상상한 무엇인가를 그립니다. 그중에는 조잡한 성적 이미지, 조롱, 인종주의적 시각마저 엿보이는 20대였던 비플 머릿속의 온갖 잡동사니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비플 스스로도 매우 부끄러워하는 드로잉이지만 매일 하나씩 만들어가야겠다는 약속을 지켜나간 증거이기도 하므로 모두 공개해 놓았습니다. 공개는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제발 아무도 안 보았으면 하는 절실한 바람이 느껴지는 작가의 코멘트도 달려 있습니다.
"If you actually take the time to look at these please murder me, then murder yourself."
(만약 당신이 이것들을 보는데 정말 시간을 들였다면 제발 나를 죽여주세요, 그리고 당신도 죽어버리길.)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그야말로 웃픈 상황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고 시작하자마자 잘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히려 초기의 그림들을 통해, 오랜 시간 끈기와 노력으로 발전해 가며 누구보다 커다란 성취를 해낸 점이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오늘날 비플이 있게 한 긴 여정의 첫걸음, 후딱 감상하고 다음 라운드에서 본격적인 성장 과정을 살펴보시죠.
Round 1
독자적 예술과 주제의식
왼쪽 위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순서대로 라운드 1부터 라운드 14까지 라운드당 한 작품씩 임의 선택 위의 이미지는 EVERTDAYS의 총 14라운드로 나뉜 컬렉션에서 라운드당 한 작품씩 임의대로 선택해 나열한 것입니다. 초기의 단순 드로잉에서 1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아트 실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초기였던 라운드 3~7까지는 추상적이면서도 반복적인 무한반복(LOOP) 형태의 디지털 영상 작품들이 많았는데 당시 작품들이 현재의 3D 영상 퀄리티를 만들어준 밑거름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플은 초기 드로잉에서 시작해 사진, 애니메이션, 음악과 결합된 영상 작품 등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제작 기술을 습득하며 높은 퀄리티의 단편 3D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특정한 장르나 기술에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이 결론적으로 종합 예술가로 거듭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의 주제 역시 세월이 흐르며 초기의 중구난방 소재에서 미래, 로봇, 대기업, 정치 등의 소재로 나뉘며 세분화되어 갑니다. 만약 처음부터 주제와 작품 방향을 결정하고 만들었다면 오늘날의 비플이 있었을까요? 예술은 엄청난 재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도조차 못하지 않았을까요? 때로는 뜻이 있는 분야에서 일단 시작부터 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예술은 인생처럼, 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