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이 쏘아 올린 작은 공
비플의 성공은 극도의 성실함과 출중한 퀄리티가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그의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루이비통과의 협업이었습니다. 루이비통의 예술감독인 플로랑 부오노마노(Florent Buonomano)가 인스타그램에서 비플의 작품을 보고 메시지를 먼저 보냈다고 합니다.
루이뷔통 패션쇼에 등장한 비플 작품 여성용 티셔츠에 비플의 그림 몇 개를 사용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는데 패션에 대해 전혀 몰랐던 비플은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사용될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미래와 테크놀로지를 주요 소재로 한 비플의 작품이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 어떻게 적용될지 바로 떠올리긴 쉽지 않습니다. 놀라운 점은 루이뷔통이 택한 작품은 추상이미지나 패턴이 아닌 구체적인 로봇 그림을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Everydays' 시리즈에서 9개의 디지털 일러스트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린 파리 패션 위크 루이뷔통 쇼의 45개 제품 중 13개 제품에 사용되었는데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협업 작품들 중 'MCD 2087'의 경우에는 원본 작품의 맥도널드 로고를 루이뷔통 로고로 바꾸어 패션쇼에 등장시켜 화제를 낳기도 했죠.
작품 MCD 2087과 루이뷔통 패션쇼
LV CRUISE 2020에 등장한 비플의 작품
루이비통이 박서보, 쿠사마 야요이 등 다양한 예술가들과 협업을 해온 것은 익히 알려졌지만 NFT아티스트와 협업을 한 것은 비플이 처음입니다. 언제나 혁신과 새로운 디자인을 추구해 온 루이비통이 비플의 작품을 통해 미래지향적 비전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더불어 비플은 루이비통이 출시한 모바일 게임인 '루이 더 게임'에서 사용되는 아이템 중 일부를 제작하는 귀여운(?) 콜라보도 진행합니다.
팝가수 마돈나와 협업으로 제작한 Mother of Nature
비플은 이외에도 애플, 스페이스 X, 나이키, 삼성, 코카콜라 등의 브랜드, 캐이티 페리, 마돈나, 저스틴 비버, 에미넴, 아비치 등 유명 음악가나 DJ들과 협업하며 더욱 이름값이 치솟습니다. 특히 마돈나와는 'MOTHER OF CREATION'이라는 이름으로 1년여에 걸친 장기 협업으로 3개의 영상 작품을 제작해 판매한 수익금 전액을 여성과 어린이 관련 재단과 NGO(비정부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기존 예술가가 아닌 NFT아티스트가 이처럼 장르와 브랜드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협업을 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사실상 비플이 유일하다고 보아도 될 정도죠. 그의 한걸음 한걸음은 그 자체로 NFT아트의 역사에 다름 아닙니다.
불확실한 미래와 테크놀로지
작품이 아주 많지만 비플하면 떠올릴 만한 비교적 최근의 대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사실 작품의 주요 소재인 기술, 미래, 디스토피아와 관련된 NFT아트는 식상하리만큼 많습니다. 아마도 블록체인으로 시작된 NFT와 메타버스라는 거대한 신세계에 대한 기대감과 불확실성 때문일 것입니다. 작품 'HUMAN ONE' 또한 메타버스 세상의 도래와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한 전진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HUMAN ONE'이라는 제목은 메타버스에서 처음 태어난 인간을 의미하는데 아래 영상과 같이 상자 안에서 우주복 같은 것을 입은 한 사람이 걸어가는 영상을 4면의 LED스크린으로 보여줍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배경 공간은 메타버스 세계에서 볼 수 있을 만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다양한 모습으로 담아냈습니다. 걸어가는 사람의 배경이 24시간 동안 계속해서 바뀌는 데다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상자 자체가 돌아가기 때문에 상당히 역동적으로 느껴지는데요. 스크린의 높이가 2미터 20센티미터, 폭이 1미터 20센티미터(87 x 48 x 48 인치/16K 해상도)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실제로 보면 관람자가 우주복을 입은 주인공이 되어 공간을 여행하고 있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역동성은 단지 상자 안에서 재생되는 영상에만 있는 것은 아닌데요. 상자 안의 디지털 작품을 작가가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어 콘텐츠를 업데이트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비플은 이에 대해 "전통적인 예술은 완성된 순간에 멈춰 있는 유한한 진술에 가깝지만, 이 예술 작품은 업데이트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으로 지속적인 대화에 가깝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유한한 진술이 아니라 지속적인 대화라니. 디지털 예술의 장점을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NFT아트 작품과 디지털 작품들조차 스크린을 단순히 '작품재생 도구'로 사용했지만 이 작품은 콘텐츠를 바꾸어 나감으로써 디지털 아트의 무한한 확장성을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2021년 11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2,900만 달러(약 390억 원)에 낙찰되며 '매일: 첫 5천 일'에 이어 성공적인 경매로 기록됩니다. 작품 구매자에게는 이 물리적 작품(4면 스크린)과 NFT가 함께 제공되었습니다. 2023년 6월까지 홍콩 M+뮤지엄에서 전시되다가 이후 2023년 10월 현재는 미국 아칸소 주에 위치한 CRYSTAL BRIDGES MUSEUM OF AMERICAN ART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비플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디지털 영상 작업을 꾸준히 했고 시대가 변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적용할 NFT아트에 발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그는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삶에 줄 지도 모를 변화에 주목합니다.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인간에게 꼭 이로울 수만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구글, 아마존, 애플, 메타의 창업자들을 작품에 등장시켜 막강한 파워, 그리고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Google Data Collection 2098'에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죠. 우리는 구글에서 검색을 하고 유튜브를 시청하는데 어느새 구글은 우리의 취향, 소비패턴 등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정확히 압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고, 어디로 이동하는지, 심지어 우리의 은밀한 사생활조차 모두 알고 있죠. 우리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행동 패턴을 데이터화해 비즈니스에 활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Google Data Collection 2098 Chatgpt는 어떤가요? 새로운 차원의 인공지능 서비스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데이터를 축적해 점점 고도화한다는 점에서 은연중 스며드는 불안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인간을 감시하고 명령을 내리거나 공격한다면? 실제로 미국 공군의 가상훈련에서 AI드론이 인간을 공격한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죠. 게다가 사람보다 뛰어난 수행능력을 보이는 로봇이 이미 개발된 만큼 인공지능 전투로봇이 전쟁에 사용될 날도 머지않아 보입니다. 개발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할 수도 없고.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AI가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한편으로 '엑스에이아이(xAI)'라는 새 인공지능 회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개발에 뛰어든 아이러니는 이런 양가적 감정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비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비플은 이런 두려움을 정보 권력을 조롱하고 희화화함으로써 달래기도 합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작품 You Got Mail)나 메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작품 Zuck)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작품들, 그리고 다소 혐오스러운 묘사 때문에 올리진 않았지만 거대 테크 기업의 수장들을 괴물같은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You Got Mail Z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