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의 향기로운 탈출
민지는 누가 봐도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른 몸에 언제나 조용하고 단정한 차림새는 그녀의 삶만큼이나 절제되어 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규호와 함께 작은 식당을 운영했지만, 그 공간은 그녀에게 안식처가 아닌 감옥이었습니다.
“야! 너 아까 그 남자 손님한테 왜 그렇게 웃어? 아주 좋아 죽네. 왜. 그놈이 너 좋다든?”
식당 문을 닫고 정리하는 늦은 밤, 규호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습니다. 민지는 묵묵히 행주를 쥐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손님이 맛있다고 하셔서 고맙다고 인사했을 뿐이에요. 제가 너무 가만히 무표정으로 있으면 불친절해 보일까 봐….”
“입 다물어! 누가 네 변명 듣고 싶대? 네 눈빛이 문제야. 남자들 홀리고 다니는 눈빛! 시장에 잠깐이면 다녀 올것도 한참 걸려 내 전화기에 불이 나게 만드는 주제에, 밖에서도 그렇게 꼬리치고 다니냐?”
""그게 아니라 비누 만들 재료 보..""
""시끄러워.""
규호는 민지의 팔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습니다. 그의 의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민지가 외도를 한 적도 없고, 심지어 감히 다른 남자를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규호는 늘 그녀를 ‘바람난 아내’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바람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규호는 스스로가 못난 인물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민지의 임신 기간 내내 밖에서 여자를 만났습니다. 첫째 영미를 임신했을 때는 낯선 여자를 대놓고 안방에 데려와 며칠 동안 놀아났고, 둘째 성민을 임신했을 때는 몇 달간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민지는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친정은 이미 오래전에 의절했고, 식당에서 버는 모든 돈은 규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거 봐, 오늘 매출. 이것밖에 안 돼? 네가 카운터 똑바로 봤으면 이 정도는 벌었어야지.”
“오늘은 비가 와서 손님이 적었어요. 그리고 여기, 아이들 학용품 산 영수증이에요. 3만 2천5백 원.”
“뭐? 이 볼펜은 500원이 비싸잖아! 너 딴 주머니 찼지? 솔직히 말해, 이 돈 어디다 썼어!”
몇 백 원이 비어도 난리가 났습니다. 민지는 단돈 천 원도 몰래 챙길 수 없었습니다. 규호가 가끔 기분이 좋을 때 던져주는 몇만 원의 용돈이 그녀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었습니다.
민지가 규호를 만난 건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즉석 미팅을 하다가 대학생이라던 규호를 만났습니다. 규호는 첫눈에 민지에게 반한 척하며 그녀를 외진 곳으로 유인했고, 민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규호는 매일 민지의 학교 앞에 찾아와 그녀를 감시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몇 달이 흐른 뒤, 민지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았습니다. 친척집에서 얹혀살던 그녀는 쫓겨났고, 학교도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습니다. 울며 규호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뜻밖에도 규호는 기뻐하며 민지를 부모님 댁으로 데려갔습니다.
‘혼날 거야. 분명히 나를 내쫓을 거야.’
그러나 민지의 예상과는 달리 규호 아버지는 민지를 보더니 두 손을 부여잡으면 말했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경사 났네, 경사 났어! 규호야, 드디어 네가 사람 구실 하는구나!”
민지는 환대 앞에서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그 환대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규호는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에 이미 자퇴하고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규호의 아버지는 가게에 물건을 납품하는 사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사람이었고, 망나니 아들이 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습니다.
규호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한테 살 집과 네 가게를 마련해 주마. 대신, 조직에서 당장 나와. 그리고 이 아이와 결혼해서 사람답게 살아.”
조직은 규호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규호의 손가락을 요구했습니다. 규호의 아버지는 3천만 원을 들고 조직원들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규호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빌면서 말했습니다.
“제발 우리 아들이 곧 아버지가 될 몸이오. 이 아이가 사람답게 살게 해 주시오. 이 손가락 대신 이 돈을 받으시오!”
그렇게 힘들게 조직에서 벗어난 규호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규호에게 식당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규호에게 새로운 유혹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납품하던 식당의 서빙 아가씨와 바람이 난 것을 시작으로, 그는 민지가 버젓이 집에 있는데도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파렴치한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둘째 성민이 태어났고, 규호 아버지의 도움으로 얻은 작은 식당의 장사는 민지 덕분에 꽤 잘 되었습니다. 민지는 타고난 손맛으로 단골을 끌어모았고, 특히 그녀가 만든 ‘닭범벅’은 주변 식당보다 늘 높은 매상을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닭범벅을 먹어보고는 밀키트 제품 출시를 제안했습니다. 규호는 돈이 될 생각에 신나서 당장 진행하라고 했습니다. 민지는 밀키트 담당자 민철 씨와 자주 미팅을 하며 제품 개발에 나섰습니다. 미팅 중에는 웃음꽃이 피기도 했고, 시식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규호는 광분했습니다.
그날 밤, 장사가 끝난 후. 규호는 이를 갈며 민지에게 말했습니다.
“너, 아까 그 새끼랑 깔깔대고 웃는 거 다 봤어. 어깨는 왜 부딪혀? 이 정도면 네가 꼬리를 친 거지, 안 그래?”
규호는 민지를 식당 뒤편, 닭고기와 식자재를 보관하는 지하 창고로 끌고 갔습니다.
민지는 애원하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규호 씨! 오해예요. 밀키트 제품 때문에, 그저 업무 때문에….”
“업무? 업무? 네 년의 업무는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 헤픈 미소를 날리는 거야?”
그는 민지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닭 비린내가 진동하는 창고에 그녀를 가두었습니다.
민지는 창고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습니다. “규호 씨! 문 열어주세요! 닭 냄새 때문에 너무 역해요! 제발요!”
민지는 그때부터 자신이 개발한, 식당의 상징이 된 닭범벅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갇혀 있을 때마다 코를 찌르던 닭 비린내, 그리고 폭력과 함께 뒤섞인 식당의 음식 냄새 전체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바로 비누 만들기였습니다.
비누를 만들 때 나는 허브와 꽃의 향기는 그녀를 폭력과 비린내의 지하실에서 구원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녀의 야무진 손끝으로 만든 비누는 아름다웠고, 그녀는 이것들을 식당 카운터에 조용히 진열해 팔기 시작했습니다.
민지가 만든 비누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손님 중 한 명인 민호가 비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민호는 민지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민지 씨, 이 비누 정말 품질이 좋은데요? 디자인도 좋고. 혹시 대형 마트에 납품해 볼 생각은 없으세요?”
민지는 쑥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마트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민호는
“제가 유통 쪽 일을 좀 압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저와 함께 여러 마트를 돌아다니면서 자리를 물색해 보시죠.”
민지는 규호의 눈을 피해 민호와 자주 만남을 가졌습니다. 마트를 구경하고, 납품 계약을 논의하는 시간 속에서 민지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대우를 느꼈습니다.
민호는 민지에게 응원을 말을 항상 해 주었습니다.
“민지 씨는 정말 능력 있는 분이세요. 이 비누는 민지 씨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세상이에요. 이 재능을 이렇게 썩히지 마세요..”
민지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습니다.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규호 씨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에요.”
민호는 민지의 얌전하고 착한 모습에, 민지는 따뜻하고 배려심 깊은 민호에게 서로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위험했지만, 민지에게는 유일한 숨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규호는 이미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며칠 안 들어가는 척하며 예전 조직 생활을 같이 했던 동생을 붙여 민지를 미행시켰습니다.
규호의 후배 동생은 규호에게 전화로 말했습니다.
“형님, 오늘 그 형수님이랑 그놈이랑 같이 밥 먹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확 엎어 버릴까요?”
규호는 화를 누르며
“아니, 내가 간다. 네가 가서 그놈 대가리 부수는 건 일도 아니지. 내가 가서 뭘 잃는지 직접 보여줘야 해.”
규호는 그들이 식사하는 식당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는 민호와 민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했습니다. 그리고 민지를 다시 그 지하 창고로 끌고 가서 가두었습니다.
그 일 이후, 민지는 비누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규호의 감시는 더욱 심해져 민호와 연락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민호가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규호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 때, 민지는 용기를 내 민호를 찾아갔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규호는 동생들을 시켜 민호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협박했고, 이 사태를 알게 된 규호의 아버지가 나섰습니다.
규호 아버지는 민지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한테 살 집까지 해주고, 아들 손가락까지 지켜줬는데,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해? 당장 이혼해라.”
민지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혼, 할게요. 하지만 둘째 성민이는 매주 제가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의외로 규호 아버지는 순순히 허락하며, 작은 원룸 하나를 얻어주고 민지를 집에서 내보냈습니다.
원룸에서 지내던 어느 날, 둘째 성민이가 오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민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민호에게서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민지 씨… 나, 규호 동생들한테 또 맞았어요. 지금 병원이에요. 숨기다가 너무 아파서… 지금 와줄 수 있어요?”
민지는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 아들 성민이가 원룸 문 앞에서 민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던 성민이는 누나 영미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영미가 달려왔을 때, 성민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민지가 초조한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영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민지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성민이 혼자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었는데, 엄마는 어디 갔다 온 거야?”
민지는 당황하며
“영미야, 그게 아니고… 민호 씨가 좀 다쳤다고 연락 와서….”
영미는 절규하듯 말했습니다.
“다쳤다고? 그 남자가 그렇게 좋아? 어린 성민이보다, 우리보다 그 남자가 중요해? 다시는 우리 볼 생각 하지 마! 엄마는 자격 없어!”
영미는 성민이의 손을 잡고 나가버렸습니다. 민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사실 민호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규호가 민호에게
“다시는 너와 네 여자에게 손대지 않을 테니, 딱 한 번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고 협박했고, 민호는 그 지시에 따라 거짓 연락을 했던 것입니다. 규호는 민지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민지는 민호의 마지막 배신에 큰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 일로 규호의 아버지는 격분하여 민지에게 마련해 준 원룸마저 도로 빼앗아 갔습니다. 아무도 민지의 자초지종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바람나서 자식까지 버린 못된 년’이라는 낙인이 찍혔을 뿐이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진 민지는 여성 쉼터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밝고 씩씩한 프랑스 여성, 한국 이름 지영을 만났습니다. 지영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임신한 채 집을 뛰쳐나왔다고 했습니다.
지영은 민지와 친해지면서 민지의 사정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 울지 마요. 어차피 이 나라는 언니 편이 아닌 것 같네. 나 곧 프랑스로 돌아가. 우리 같이 갈래?”
민지는 망설였지만, 한국에 남아 아이들을 보지 못하며 괴로워하느니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민지는 지영의 도움으로 거처를 구하고, 작은 선물 가게 한 귀퉁이에 그녀만의 비누 제조 코너를 열 수 있었습니다. 민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비누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지영은 든든한 조력자로 그녀의 소셜 미디어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민지의 비누 사업은 점차 확장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일과 꿈을 진심으로 지지해 주는 멋진 프랑스 남자, 피에르를 만났습니다. 규호에게선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존중과 사랑을 받으며, 민지는 비로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공기는 처음부터 다른 시간이 흘렀다. 지영의 친구가 구해준 작은 방, 좁은 책상, 어지럽혀진 노끈, 원료 오일들. 가게 한편을 빌려 작은 제 조 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손님들이 “이게 뭐지?” 하는 눈으로 지켜봤고, 그다음엔 조심스레 하나씩 집어 갔습니다.
“트와 레본?” 한 중년 여성이 물었습니다. 민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은 서툴렀지만 향기는 정확했습니다. SNS에 올라간 사진이 하나둘 공유됐습니다. 누군가는 “손을 씻고 나면 오래 향이 남는다”라고 적었고, 누군가는 “이 비누를 선물하고 싶다”라고 적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그녀의 이름은 조용히 번져 나갔습니다.
어느 날, 가게 문을 닫을 무렵, 피에르가 웃으며 들어왔습니다. 그는 비누를 두 개 집어 들고, 한참을 냄새 맡았습니다.
“당신의 손끝은… 차분하고 강하네요.” 한국어가 아니었지만, 그 뜻은 충분히 전달됐습니다. 그는 결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도와줄 때, 반드시 “괜찮다면”이라는 접속사를 붙였습니다.
민지는 오래된 습관대로 거리감을 재려 했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리는 그녀에게 안전함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안전함은 오래된 부채 같았습니다. 갚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밤마다 그녀는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라벨에는 여전히 ‘향기 나는 삶’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이름대로 조금씩 향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닭 요릿집 앞을 지나가야 할 때면, 민지는 반사적으로 길 반대편으로 건넜습니다. 누군가 “치킨”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위로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기억은 아무도 모르게 성장하는 생물이었습니다. 때로는 잘라낼 수 없었고, 때로는 향기로만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는 가끔 SNS로 연락했습니다. 성민이는 게임 얘기를 했고, 영미는 학교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끔 영상 통화가 되었을 때, 민지는 화면 속 자신을 보았습니다. 예전보다 말랐지만,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크면, 다 말해줄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는 내가 도망친 게 아니라, 살아남은 거라고 말할 수 있길.’
밤마다 가느다란 창틀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습니다. 비누에서 풍기는 오렌지 블라썸과 라벤더가 방을 차지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공기가 폐를 지나, 기억의 가장 아래까지 닿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 향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어느 평일 오후, 가게에 낯익은 그림자가 어른거렸습니다. 모니터 속이었습니다. 누군가 올린 게시물. 한국의 식당 간판이 화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민지는 본능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영상의 한 구석에 아이들이 웃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랑 주말에 공원 갔어요.” 라는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그 사진 속에서, 아이들의 표정은 맑았습니다. 그 사실 하나가 그녀의 하루를 지탱했습니다.
지영이 뒤에서 어깨를 툭 쳤습니다. “괜찮아?”
민지는 “응,”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좀 괜찮아.”
“넌 계속 괜찮아질 거야.” 지영이 말했습니다. “넌 향기 나는 사람이라서.”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문밖을 보았습니다. 가을의 빛이 길게 늘어졌습니다. 자전거가 지나가며 작은 종을 울렸습니다. 세상이 그때만큼은 조용했고, 그녀의 가슴 안쪽도 조용했습니다.
그날 밤, 민지는 새로운 레시피를 적었습니다. ‘트라우마를 위한 비누’라고 장난스럽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카모마일 두 방울, 라벤더 네 방울, 오렌지 블라썸 세 방울, 시어버터 적당량. 그리고 마지막 줄에, 오래 고민한 후 한 글자를 보탰습니다. ‘용기, 소량.’
몰드에 굳어가는 비누 위로 손바닥을 얹었습니다. 따뜻했습니다.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 있어.”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낮게 났습니다. 어쩌면 바다가 아주 멀리에서 부서지는 소리였는지도 몰랐습니다. 아주 먼 옛날의 바다. 그러나 이번엔 파도가 물러가며 무언가를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남겨둔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녀의 이름, 그녀의 향기, 그녀의 손, 그녀의 다음 날.
새벽, 골목은 비에 젖어 반짝였습니다. 민지는 문패를 잠그고, 호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었습니다. 따뜻한 비누 한 조각이 손바닥에 닿았습니다. 손바닥의 온기가 비누로 옮겨 가듯, 비누의 향기가 그녀의 가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길모퉁이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별의 위치는 낯설었지만, 하늘의 넓이는 같았습니다. 그 넓이 위에, 그녀는 작은 약속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더 자라면, 모든 것을 말하자. 부끄러움이나 변명 없이, 사실 그대로. 내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살아남아, 다시 살아내고 있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누군가가 보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약속은 말보다 먼저, 향기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조용하게, 그러나 오래.
문득, 닭 냄새가 어딘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내쉬었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손에 베어 있는 향기를 맡았습니다. 손에서 나는 향기는 닭 냄새 보다 라벤더가 더 짙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민지는 아직도 닭 요리를 먹지 않습니다. 닭을 보면 그때의 악몽 같던 지하 창고의 비린내와 규호의 폭력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민지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발자국이 젖은 골목 위에 가볍게 찍혔다가 사라졌습니다. 사라지되, 분명히 지나간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그녀의 삶은, 그 밤에도 향기가 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