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잃은 5캐럿의 다이아반지

by MUN MOON

녀는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 날 왜 아기를 비를 맞게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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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해외전화 미납 요금 납부를 독촉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예전에는 해외전화를 사용하면 앞에 001:한국통신공사, 002:데이콤 008:온세통신 00365:SK텔링크 00700: 하나로 통신 등을 사용했었는데 일반 전화요금과 합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잊어버려서 자주 요금을 미납했었습니다.

예전에는 해외 전화를 사용하면 일반 전화 요금과는 별도로 청구되기 때문에, 사용하고도 잘 몰라서 납부 못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납부하도록 알려 주는 일을 하고 있었지요. 특히 어르신들이 자주 까먹거나 방법을 몰라 납부를 못 하신 경우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 그래서 전화를 드려 전화요금이 미납됬음을 알려드리면서 납부하는 방법을 알려 드렸어요.

예전에는....

아! 자꾸 예전이라고 해서 대체 언제지 하는 분들도 계시겠네요. 그러니까.....음..그때가 1997년 이었어요. 네 . 맞아요. 핸드폰도 인터넷으로도 요금 납부가 안될때였죠.---


보통은 얼마 안되는 돈 가지고 전화한다고 뭐라 그러시거나 내는 방법이 왜 이리 복잡하냐면서 짜증들부터 내거나, 화내시거나, 소리 지르는 분들이 다반사였어요. 나중에는 욕하는 분들도 종종 있고 통화하던 직원들과 싸우기도 하는 상황까지도 많이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저에게 7만5천원이나 미납된 요금이 배정 됬어요. 그래서 전화를 드렸는데 전화받으신 고객분은 다른 분들과는 뭐랄까 통화 하면서 말씀하시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전화 요금 미납 건이 있어 연락드렸어요."

"무슨 전화 요금 말씀이신가요? "

"네. 고객님. 해외로 전화하신 내역이신데요. 미납이 꽤 오래 되셔서 안내 전화 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실까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고객님께서 말씀하시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참 조용하고 차분하니 교양 있게 들렸어요.

"네. 호주로 전화를 하셨었는데 요금이 계속 미납이 되셨어요. 죄송합니다만 혹시 오늘 납부 가능하실까요? 제가 납부 방법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은행에 가셔서 전화 요금 납부 때문에 그런다고 하시면 용지를 드릴 겁니다. 거기에 제가 불러드리는 번호 기재하시고 납부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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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설명을 드리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러 갑자기 긴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 후…"

"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제 오지랍이 발동했습니다.

요금을 미납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어르신들이다보니 자주 하소연이나 잠시라도 얘기하고 싶어하는 분들도 계셔서 잠시 전화로라도 말동무 해드리면 납부률이 좋았거든요.

네.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어르신들과 자주 통화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어요.


1. 아들의 결혼과 충격적인 진실


그런데 같이 통화를 하시던 어르신이 말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이야기는 즉 이렇습니다.


-아들이 카투사로 한국에 와서 있었는데, 본인은 미국에서 살고 계시고 남편분이 큰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오셨다고 해요. 갑자기 무슨 결혼이냐며 말리려고 오셨대요. 두분은 아들이 군복무 끝나는 대로 와서 같이 아버지와 사업을 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결혼하고 한국에 살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들이 소개해 준 여자는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게 생겼다고 해요. 거기다 사람을 녹게 만드는 애교는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결혼을 말리러 왔던 본인까지도 그녀에게 녹아들었다고 했어요.

희수.

그녀의 이름이라고 했어요.

고객님은 말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희수라는 분이 임신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둘이 살 수 있게 성북구의 주택을 사 주고 며느리가 될 희수에게는 5캐럿 다이아 반지를 사 주었대요. 그녀는 그 다이아 반지를 받고 너무 기뻐하더랍니다.

자기를 껴안고 볼에 뽀뽀도 하고… 그 얘기를 하시면서 목이 메이시는 것 같더라고요.

어느새 본인도 며느리 될 분에게 마음이 뺏겨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더랍니다.

희수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있어 서둘러 결혼식을 했대요. 그리고 아들 내외 집에 도우미도 들이고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준비해 주었대요.


저는 다음이 궁금해서 밥도 먹으러 가지 않고, 저의 점심 시간을 빼가며 그 고객분과 계속 통화를 했어요. 그분이 잔잔히 조용히 말씀하시니 오히려 모든 집중이 전화기로 모이더라구요. 그분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아들의 아이가 아니고, 여자의 이름도, 부모도, 사는 집도 모두 가짜였고, 진짜 아기 아빠는 호주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아들의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군 생활 중 사고로 다쳤는데, 혹시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까 싶어 정밀 검사를 했대요. 검사 도중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는데 어머니가 사람을 사서 희수라는 여자의 뒷조사를 한 것이랍니다.


2. 희수의 치밀한 계획


아들 병호가 그녀 희수를 만나게 된 그 순간부터, 그들의 첫 만남은 이러했습니다.


서울의 번화가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주말 밤. 낯선 음악이 울려 퍼지는 클럽 안, 사람들은 술과 춤에 취해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병호는 군 복무 중이었지만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클럽에 따라온 것이었죠.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에 술잔만 만지작거리던 그때, 무대 가까운 자리에서 한 여자가 시선을 끌었습니다. 검은 원피스 차림에 은은하게 빛나는 미소. 요란하지 않고 절제된 몸짓으로 춤을 추던 그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향했고 병호도 그 무리에 끌리듯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바로 희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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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 역시 병호를 곁눈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클럽안에서 유난히 어색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지만 웬지 모르게 귀티가 나 보이는 병호에게 자꾸 시선이 갔습니다. 그의 옷차림, 말투, 동석한 친구들의 분위기만 보아도 병호가 평범한 집 아들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특히 휴가 나온 군인 같은데도 시계며 입고 있는 옷이 흔하지 않은 브랜드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추가로 술을 주문하자 병호가 계산하겠다고 하며 잠깐 지갑을 꺼냈을 때, 그 안에서 스치듯 보였던 검은색 카드. 그 카드는 은행 VIP만 발급받을 수 있는 프리미엄 카드였습니다. 희수의 눈빛은 그 순간 번뜩였습니다.

희수는 일부러 가볍게 부딪히듯 병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흘리듯 떨어뜨린 술잔을 병호가 얼떨결에 받아냈고 희수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 어머 죄송해요. 제가 술이 조금 취했나 봐요."

병호는 그녀를 보자 마자 첫 눈에 반해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희수의 눈빛은 이미 그를 다 파악한듯 옅은 미소를 띠었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근데 혹시 여기 자주 오세요? 처음 보는 얼굴 같아서요."

" 아, 네. 저는 그냥 친구들 따러서 잠깐."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애교 섞인 미소를 띄우며 말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제가 가이드해 드릴께요. 혼자 이렇게 계시면 재미없어요."


병호는 낯설고 번잡한 공간 속에서 오직 희수만이 따뜻하게 다가와 주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순간적으로 두근거림과 설렘이 찾아왔습니다. 희수는 계산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병호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군 생활 중이라는 걸 알아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더 다정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군 생활 힘드시죠? 근데 왠지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 느낌이 달라요. 뭔가 당신은 특별함이 있는거 같아요."

병호는 당황했지만 속으로는 희수의 관심이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랜만에 휴가 나온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그녀가 한없이 예뻐만 보였고 그의 마음은 1분도 안되어 그녀에게 녹아 버렸습니다. 희수는 병호의 순수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감췄습니다.

' 역시 순진하네. 이런 남자는 마음만 흔들어 주면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지.'


그녀는 손끝으로 살짝 그의 잔을 채워 주며 더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날 밤 병호는 희수와 긴 대화를 나누며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알지 못했죠. 희수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부잣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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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처음엔 약한 술로 한 잔 한 잔 마시기를 유도하다가 병호가 술에 약한 것을 알고, 조금씩 조금씩 독한 술을 섞여 먹인 후 그날 밤 잠자리까지 같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임신했다며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죠.


3. 집을 통째로 털어 가다


그런데 그녀에 관한 것은 모두 가짜였답니다.

이름도, 신분증도, 결혼식 날 왔던 부모와 친척, 친구들 그 어느 하나도 진실인 것이 없었다고 해요.

그녀는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된 후 집에서 아이와 함께 쫓겨났대요. 그녀는 그렇게 쫓겨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그녀는 집에 아무도 없어 비는 시간에 맞춰 아기를 비를 맞게 하며 열쇠공을 불러 문을 열어 달라고 했대요.


예전에도 집에 열쇠에 문제가 있을 때 왔던 그 열쇠 수리공은 그 집안 문제를 전혀 모르기에 당연히 희수가 그 집 사모님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준 거죠. 거기다 아기가 비까지 맞고 있었으니까요.

희수가 아기 감기 걸렸는데 비 계속 맞으면 큰일 난다며 제촉했다고 합니다. 대문부터 현관까지 다 열어 달라고 했대요.

"애 데리고 병원 다녀오다 가방 잃어버려서 열쇠가 없어요. 빨리 열어주세요."라고 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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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그렇게 문을 열게 하고 열쇠공이 가고 난후 미리 준비해 둔 차량을 불러서 집안의 물건을 전부 가져갔답니다. 가구에서부터 전자제품, 장식, 그리고 선물로 준 고가의 그림, 금고까지 통째로 들고 갔대요.


아들과 집에 왔을 땐 이사 나간 집처럼 텅 비어 있었다고 해요.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아 자리에 한참을 주저앉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에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고 해요. 아들은 진짜 희수를 사랑했다고 하더라고요.


4. 다시 걸려온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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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면서, 고객님은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꼭 찾아 벌을 줘야하니 그 여자가 걸었던 호주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는 거예요. 신고하려고 해도, 고소하려고 해도 이름도 모르고 아무 흔적도 없으니 너무 난감했었다고 하시네요. 어차피 그건 그분 집 전화로 건 거여서 알려 줘도 괜찮았어요. 알려 드리고 나니 연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전 괜찮다고 하고 잘 해결되길 바란다고 했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계속 요금 납부를 안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요금이 아직 납부가 안 되어 있어 다시 연락드렸어요."

그러자 고객님께서는 제 전화를 다시 받기 위해서 일부러 요금을 안 내신 거라고 하면서 저를 기다렸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러셨어요? 무슨 일로 저를 기다리셨나요?"

"내가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은행 업무 보는 것을 잘 몰라요. 좀 도와줄 수 있나요? 바로 낼게요."


그분의 힘든 상황을 듣고 난 후라 저는 거절을 못 하고 만나서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그분이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까지 직접 오셨는데 보기에도 참 단아하고 고왔습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도 고객님과 저는 같이 은행을 가서 처리하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때 고객님이 고맙다고 식사 같이 하자고 하시더니 갑자기 자기 아들을 만나 달라고 하더군요. 너무 상처를 심하게 받아서 걱정이 되신다고 하시면서.

저는 솔직히 좀 그랬어요.

왜냐하면 한 번도 보지도 못한 사람을.

그것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을 만나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선뜻 "그럴게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머뭇거리자 눈치채셨는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 믿고 얘기할 사람도 없었고, 어디 가서 얘기하기도 창피한 일이라 속앓이만 해오셨다"고 하면서 저랑 얘기하고 나서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아들 만나서 얘기만 좀 들어 주면 안 되겠냐고 손까지 잡으면서 부탁을 하시더군요.

얘기를 안 들었었다면 바로 거절했을 텐데, 듣고 나서 부탁을 하시는 거라. 괜한 오지랖이 또 또 발동 걸려 내 마음과는 다르게 그렇게 한다고 약속을 해 버리고 말았어요. 퇴근 후 집으로 가면서 후회했지만, 이미 약속한 거니 그냥 소개팅 한번 한다 생각하고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5. 김병호와의 첫 만남과 전화 위로


며칠 후 약속을 잡고 카페에서 고객님의 아드님과 만남을 가졌어요. 키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보다는 좀 컸고, 피부는 약간 탄 것처럼 건강한 색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기운이 없어 보였어요. 얼굴은 그렇게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고 평범했습니다.

첫인사를 나누고 서로 머쓱해서 말없이 엄한 찻잔만 만지작 거리고 커피만 연신 홀짝 거렸어요. 그때 그분이 먼저 입을 여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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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김병호라고 합니다. 어머니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하시고 나서 많이 밝아지셨어요.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하는 일이 듣고 말하는 일인걸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김병호.

그 상처받은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는 달리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멍한 눈동자는 마음의 상처가 깊어 보였습니다. 나는 심리상담사도 정신과 의사도 아니어서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커피만 마시고 냅킨만 만지작거렸어요.

그때였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열었어요.

"어머니 때문에 불편한 자리 나오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사과드릴게요."

순간 당황해서 저는

"아니에요. 제가 지금 뭐라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몰라서요. 제가 잘하는 거라고는 그저 들어 주는 것밖에 없어요. 혹시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줬음 하실 때 전화 주세요. 언제든 들어 드릴게요."

병호 씨는 얇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하며 자리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그와 헤어지고 그분 어머니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만나 줘서 고맙다고 하시며 다음에 또 식사 같이 하자고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네. 연락 주세요"라고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났을까? 주말에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김병호. 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너무나 힘들어 누구에게든 위로를 받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나는 그가 하소연하는 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끔 우리는 만나지 않고 전화로만 대화를 했습니다. 2주에 한 번, 어떨 땐 3주에 한 번, 가끔은 일주일에 한 번도.

솔직히 만나는 건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상처가 너무 큰 사람을 보듬어 안을 용기도 안 났었습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배신을 당했던 사람이라 사람에 대한 의심도 많이 생겼을 것 같아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 그저 얘기만 들어 주자라는 마음으로 전화 통화만 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게 마음이 편했는지 만나자는 얘기는 하지 않고 그저 전화 대화만 했습니다.


6. 재회, 그리고 새로운 시작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왠지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잘 지내라고 하며 우리는 인사를 하고 그의 어머니께도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갔을까. 퇴근하는데 건물 밖 화단에 누군가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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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밝아진 모습에 건강하게 다부진 체격. 뭔가 변화가 생기듯 달라 보였습니다.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에요."

"아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연락도 없이.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러자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명희 씨와 계속 전화를 하면서 생각했어요. 당신과 만나보고 싶다는. 그런데 선뜻 용기가 안 났습니다. 그때는 여전히 사람이 두려웠고 의심스러운 마음이 떠나지 않았어요. 근데 마침 복무도 끝나고 아버지 회사 일도 같이 해야 할 것도 있어서 미국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가서 계속 상담 치료도 받고 운동도 하며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만나러 왔습니다. 전화로만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식사나 차 한잔 하면서 얘기하고 싶어서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저랑 식사나 차 한잔하고 싶다고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셨다고요?"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머뭇거리니 어머니가 티켓을 미리 다 끊어 놓으셨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핑계 김에 왔습니다. 괜찮으실까요? 저랑 오늘 저녁 식사."


그래서 저도 웃으며 말했습니다.

" 좋아요. 같이 저녁 먹어요. 그리고 차는 제가 살께요."

그렇게 저희는 만남의 시작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곁에는 병호 씨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그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계속 외면했다면, 지금의 제 곁엔 그가 없었겠지요. 지금도 병호 씨는 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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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힘들다고 나에게 손을 잡아 달라 할 때, 어설픈 조언보다는 조용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 긴 이야기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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