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가시

최근엔 ‘독서’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있었어. 요즘은 한가한 백수를 살아가고 있어서, 다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거든. 결과적으로, 결정적일 정도로 중요한 변화였지.


어릴 때,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안창호 선생의 명언을 공감한 기억이 나. 당시엔 꽤나 열심히 책을 읽었고, 하루하루 새로운 지식을 얻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시’가 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 대학에 들어가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이제 웬만한 건 다 알 거 같은데?’식의 자만에 빠졌거든. 이 사고방식은 내게, 더는 대학에서 시간과 돈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줬지만, 디테일한 지식에 접근하는(독서나 조사 등으로) 태도(가시)와 멀어지게 했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의 나는, 일종의 지적인 깨달음에 닿았다고 생각했어. 물론 전문적인 영역의 지식을 무한히 습득할 순 있지만, 내가 바라는 지식의 방향성은 아니어서, 스스로 공부해 나가는 자신을 놓아버리게 된 거야.


게다가 인생의 다음 단계(경제적으로 자신을 책임지는 것)로 나아가자는 목표도 세우니, 자연스레 책과 거리를 두게 되었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좋아하는 것의 종류를 줄이고, 노동에 최선을 다 하는 생활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까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지나고 보면 참 아쉬운 결정이란 거야. 난 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의 노력으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홀라당 날려버린 거지.


물론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다른 선택을 할 거 같지 않아. 당시의 난 어리숙하게, 스스로의 허리띠를 죄어 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게임을 적당히 즐기기 위해 평생을 함께 할 종목을 찾고 있었고, 버릴 수 있는 취미생활은 철저히 버리려고 했지.(그림이나 악기 연주 등)


어떤 글을 쓰고 유지할 것인지도 마찬가지였어. 아직까지도 난, 일 – 휴식 – 글쓰기 순환을 버거워하고 있으니까. 난 글쓰기를 우선으로 최소화했어. 복잡하게 또 다른 세상을 구성하는 작업을 포기했고, 문학적으로 좋은 가치를 포기했지.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매일 뒤섞이는 헛소리 같은 생각을 기록하고 되새김질하는 과정이었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지.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독서를 멀리하게 되었어. 당시에는 타인의 글쓰기가 오히려 나다운 글을 쓰는 데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지. 다른 사람이 완성한 어떤 지식에 심취해서, 앵무새가 되긴 싫다고도 생각했어.


꽤 오랜 기간, 독서 없이 살아갈 수 있었지. 심지어 내가 ‘독서’를 졸업했다고 생각했어. 현대 사회에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수단이 다양하니, 적재적소에 올바른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면 되겠다고 여긴 거야. 이젠 비효율적으로 지식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 일 – 휴식 – 글쓰기의 순환에,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어. 처음엔 내가 점점 나태해져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했고, 올바른 분석이었지. 난 점점 무의미한 휴식을 탐닉하고 있었고, 글쓰기를 계속 미루고 있었어. 삶의 목적이 흐릿해지면서, 일하는 것마저 대충 넘기는 지경에 이르렀지.


그래도 다시 책을 잡진 않았어. 그저, 내가 행동하지 않기에 스스로 무너지는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게 2% 부족한 분석이란 걸, 자연스레 알아낼 수 없게 된 거야.


하지만 내겐, 고마운 우연이 몇 번 일어나 줬어. 하나는 처음으로 내 의지대로 백수 생활에 진입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 유튜브 영상에서 본 문장이었지.

‘마음에 있어, 영화는 술이고, 책은 물과 같다.’


크게 영감을 받은 말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게, 내가 느끼는 갈증의 해답일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지. 주구장창 술만 마시면, 스스로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거니까. 물론 이 정도의 위기의식에도 백수가 되어서야 책을 다시 읽기로 한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덕분에 안창호 선생이 말한, ‘책의 가시’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알게 된 거 같아.


내가 12번인, <감탄하다 끝나겠네>에서 얘기한 것처럼 난, 훌륭한 작품에 끝없이 감탄하고 빠져드는 사람이야. 때문에 스스로 너무 좋은 작품에 빠져버려서, 자신도 나름 좋은 작품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달콤하게 망각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해.


이건 독서에 관한 내 변화와도 연결되어 있어. 독서를 그만하겠다고 결정한 시기에도, 여전히 지식에서 발생하는 자유를 추구하고 있었으니까. 독서보단 훨씬 쉽고 달콤한 매체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적극 받아들이는 존재였지.


만약 내가 그 정도에서 만족한다면 아무 문제없는 일이지만, 내가 더 많이 욕심내는 놈이란 걸 간과했다는 거야. 적어도 독서로 지식을 습득하는 게 익숙한, 마지막 세대여서 그런 건지 몰라도, 독서만큼 내게 깊이 있는 지식을 심어주는 취미는 없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던 거야.


백수가 되고,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고 결정했을 때, 가장 마지막에 읽다가 만 책을 다시 읽으려 했어. 그건 <체 게바라 평전>이었지. 처음 그 책을 골랐을 땐, 어떤 인간이 혁명의 중심에 있을 수 있는지, 어떤 인간이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어떤 정신을 가지는 것인지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서론의 자료에서 전부 얻을 수 있었지. 체 게바라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와는 별개로, 내가 그 책에서 흡수할 수 있는 교훈과 지식은, 이미 오래전에 얻어버렸다는 거야. 당시엔 그걸 모르고, 지루하고 인내심이 필요한 종류의 책이라고 여겼지.


다시 이 책을 읽자마자 난,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내가 독서를 멀리한 이유 중 하나를 찾아낸 거지. 내가 뭐 하러 더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책을 붙잡으려고 했던 건지, 후회가 됐다는 거야. 대학을 쳐낸 것처럼, 그 책에서 얻을 것만 얻고 버릴 수 있었다면, 정말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거라고 짜증이 치밀었어.


쉽게 말해서, 더 이상 재미와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분야를 딛고, 언제나 다음으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야.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시를 느낄 수 있는 시발점이란 거지.


신영복 선생님이 ‘공부는 망치로 머리를 깨면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처럼, 작품을 지식의 틀로 감상한다면, 항상 스스로의 관념을 깨부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거야! ‘독서’라는 분야에선 이 망치를, 가시라고 이해하면 더 좋아. 어쩌면 ‘망치’란, 신영복 선생님이 안창호 선생의 말에서 파생시킨 비유일지도 모르지. <체 게바라 평전>에서 처음으로 내 독서의 가시를 발견하고,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혈안이 되었을 때, 진짜 내가 원하는 ‘독서’가 다시 시작되었어.


가시라는 표현은 정말로 적절한 거더라. 처음 지식의 축적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모를 수밖에 없는 건지에 끊임없이 절망하게 돼. 보이지 않는 ‘가시’는 그때부터 당신의 공부를 정신적으로 괴로운 저주로 만들어. 총이나 칼처럼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 발바닥을 파먹는 고통이 끊임없이 당신을 괴롭히게 되는 거야.


공부하고 정진하는 삶이란, 그 가시의 고통을 하루도 빠짐없이 느끼며 나아가는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안창호 선생의 명언은, 독서 자체가 수반하는 고통과 꾸준함(필연성)을 잘 표현한 말이라는 거지.


다행히 모두가 독서에 이런 자세로 임하는 건 아니지만, 진지하게 지식, 지혜, 진리를 알아내고 싶다면, 독서를 멀리할 수 없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오만한 글쓰기를 하려고 했는지, 이제 좀 실감이 나더라고.


하지만 덕분에, 내가 원하는 글쓰기란, 지식을 추구하는 동시에 오만함을 표현하는 작업이란 걸 알아냈어. 결국,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에 여러 도구를 활용하여, 나만의 해석을 ‘헛소리’로 기록하는 게, 내가 가장 원하는 글쓰기 방식이더라고. 한 번 독서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면, 나의 이 허황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다시 독서의 가시 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의미 없는 글쓰기를 이어갔을 거라고 할 수 있지. 결국 ‘독서의 가시’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면, 어떤 지적인 시도도 무의미하단 거야.


결국 <체 게바라 평전>을 쳐내고 내가 찾은 책은, 내 주위에서 가장 짜증나게 알짱거리는, 자신의 무지(無知)에 관한 거였어. 그건 경제학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가상화폐’를 해석하는 지식이었지. 세상이 이 관념으로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고 있는데도, 난 어떤 이정표도 가지고 있지 않단 걸 알게 된 거야.


물론 다른 미디어로 최소한의 지식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채굴’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했고, 관련 있는 다큐를 보긴 했지. 하지만 점점 이 지식을 <체 게바라 평전>처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갈증이 커져가고 있었어. 그건 특유의, 이미 ‘가시의 맛’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찜찜함이야. 난 점점 독서가 그리워졌고, 결국 그 물꼬가 다시 트여서, 행복한 학습에 다시 도달했어. 이젠 전보다 경제학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추었고, 디지털의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국가’를 단위로 하는 경제체제라는 것이 얼마나 불명확한 것인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어.


결국은 정리되지 않은 묘한 헛소리가 되었지만, 나의 직감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는 거 같네. 대학을 자퇴하면서, 나도 아버지처럼 평생 공부하며 노후를 보낼 거라고 직감했어. 아버지가 쌓아 놓은 고전을 자연스레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나도 모르게 고통과 함께하는 지식을 멀리했고, 덕분에 그런 지식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어. 이젠 내가 좋은 지식을 계승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좀 더 알게 된 거 같아. 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결국 스스로 ‘독서의 가시’를 찾아내야만 보이는 세상이라 생각해. 무책임한 헛소리에 잠깐 속는다 생각하고, 최근에 널 짜증나게 하는 지식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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