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142. 쉽게 혐오할 수 있는 캐릭터와 낭만의 타협 – 중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야.
후편에 와서야 ‘쉽게 혐오할 수 있는 캐릭터’의 정의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네. 전편과 중편의 서술로, 내가 ‘쉽게 혐오할 수 있는 캐릭터’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생각하기 충분하지만, 중간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오히려 반대이기 때문에 긴 시간을 들여서 여기까지 이 이야기를 끌고 왔어.
이 글은 이야기 속 캐릭터의 형성에 있어, ‘에피테우스’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시도를 정확하게 분류하기 위해 탄생했고, 그런 캐릭터와 작품의 시도가 어떤 의의를 가지며, 이런 사회현상이 어떻게 ‘낭만을 타협하는 시대’와 연결되어 있는지 탐구하기 위한 실험실이거든.
전편의 극초반과 전편과 중편 내내 ‘에피테우스’적이지 않은, 즉 인간 본연의 어리숙함을 인정하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게 목적이 아닌 세계관과 캐릭터를 설명했어. <헬싱>과 <데스노트>, ‘핫포사이’나 ‘미네타’와 ‘겐타’ 등의 피조물의 목적은, 인간군상의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있었지. 그런 요소들의 분류를 설명하다보니, 그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듯한 서술을 피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한쪽은 인간찬가를 노래하고, 한쪽은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쉽게 혐오’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피조물은 ‘에피테우스’적인 사상과는 다른 ‘세계관’과 ‘인간상’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까진 공통점을 가지지만, ‘부족함’의 현주소와 좌표를 더 명확하게 하고, 그 현실을 우리가 더 정확하게 ‘직시’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어. 이 ‘직시’의 과정은 상당히 껄끄러운 작업이라, 그것을 포함하는 ‘세계관’이나 ‘캐릭터’에 비호감을 가질 확률을 높이고, ‘세계관’은 작품의 선호 여부(단순히 선택하지 않으면 될 문제)로 강렬한 인상이 남지 않을 수 있지만, ‘캐릭터’는 작품의 소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기에 더 선명한 불쾌함으로 기억될 확률이 커.
이런 얘기를 하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진격의 거인>이 생각나네. 아주 잠깐 옆길로 새자면, <진격의 거인>도 ‘세계관’에서 특유의 ‘불편함’을 전달하는 작품이야. 주로 세계와 사회의 ‘잔혹함’을 다루고,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증오와 피로 얼룩져있는지 알려주는 작품이지. 동시에 ‘캐릭터’에도 ‘불편함’의 이점을 살리는 기법을 사용하는데, 작품 초반에 나오는 ‘무지성 거인’의 원초적이고 불쾌한 디자인을 통해,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선빵(?)을 날리는 구조를 사용하고 있어. 초반부 전체에서 ‘난 철저하게 불편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겠다.’는 메시지를 ‘세계관’과 ‘캐릭터’ 양쪽을 활용해서 잘 전달하는, 전략적으로 매우 영리한 예시지.
각설하고, 이제 내가 그러한 ‘세계관’과 ‘인물상’에 느끼는 가치를 설명하도록 할게. 난 무난하게 ‘에피테우스’적인 작품이 상당히 취향에 맞지 않은 사람이야. 주인공과 세계가 성장하고 좋은 결말을 맺는 것에 매너리즘을 느끼는 것도 있지만, 좀 더 불편하고 정확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에 더 가치를 두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물론 ‘에피테우스’적 전통을 따르는 작품에도 세상과 인물을 ‘날 것’ 그대로 잘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찾을 수 있어. 앞에서 잠깐 살펴본 <진격의 거인>이 그렇고,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나 <에반게리온>, <공각기동대>, <기생수>, <은하철도 999>가 그러해.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소년만화에 국한된 설명이지만 이런 작품의 ‘문제점’을 굳이 찾자면, 하나같이 ‘명작’의 반열에 드는 작품이라는 점이야. 쉽게 말해서 ‘에피테우스’적인 동시에 ‘리얼리즘’을 잘 깎은 작품이란 건, 그 자체가 이미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어야 한다는 거지.
내가 이 글의 3부작을 통해,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에피테우스’와 ‘리얼리즘’을 동시에 챙기는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보다 ‘에피테우스’적 ‘세계관’속에 ‘리얼리즘’을 챙긴 ‘캐릭터’를 녹여내는 게 더 수월하다는 거지. 내가 ‘명작’이 아니라 ‘수작’이라고 평가하는 작품에서 ‘핫포사이’, ‘미네타’, ‘겐타’를 찾아낸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거라고. 조금 분류가 다르지만, <헬싱>이나 <데스노트>도 마찬가지야.
놀랍게도 ‘날 것’ 그대로의 ‘세계관’이나 ‘캐릭터’를 서술하는 것은, 독자에게 비리한 불쾌함을 주는 동시에 작품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이 글을 통해 논증해 냈어. ‘날 것’ 그대로 세상과 사회, 인물의 군상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에게 애써 피하고 싶거나 모르고 살아온 ‘진실’에 다가가게 하고, 우리에게 구조적, 본능적으로 가해지는 불가항력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
특히나 이번 글에선 ‘핫포사이’나 ‘미네타’, ‘겐타’를 통해, 사회에서 밀려나는 ‘리비도’적 성향을 다루는 게 목적이고, 이것을 ‘타협된 낭만’으로 승화해서 가상의 세계로 점점 밀려나는 우리의 본질을 드러낼 생각이야.
‘낭만’을 정의하는 것을 선결해야 시작할 수 있는 주제지만, 그 정의에 크게 힘을 쏟을 생각은 없어. ‘낭만’이라는 것의 범위 자체가 ‘기사도’나 ‘비효율적이지만 멋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모호하고 광범위한 탓도 있고, ‘리비도’의 정의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설명하려는 ‘낭만’을 충분히 수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야.
앞에서 <천원돌파 그랜라간>의 ‘시몬’과 <단다단>의 ‘겐타’의 예시에서 살펴본 것처럼, ‘낭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은 프로이트의 ‘리비도’이론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어. 단순히 ‘성적인’ 에너지라고 정의할 수 없지만, 그것을 촉매로 발생하는 추구나 매력, 목표의식이 될 수 있는 것이 ‘낭만’의 정체야.
앞에서도 설명했듯, ‘겐타’의 ‘리비도’는 ‘거대 우주로봇’을 조종한다는, SF적 ‘낭만’을 실현하는 거지. ‘시몬’은 <천원돌파 그랜라간>의 ‘세계관’과 ‘서사의 완성’을 통해서, ‘낭만’과 동일시되는 ‘리비도’를 실현하는 인물이야.
이제 ‘겐타’나 ‘핫포사이’, ‘미네타’를 혐오하기 쉬운,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와 보자. 그들에게, 우리에게, ‘낭만’이란 어디에 있지? 파트너와의 건전한 섹스를 완성하는 것 외에, 자신의 성애에 스스럼없이 솔직할 수 있는 환경이란 어디에 있어? ‘그런 게 존재해도 되는 건가?’하고 자기검열을 하고 있지 않니? 그 검열이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세계관’과 ‘캐릭터’에 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난 ‘낭만’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종류의 가지들이 ‘가상’과 ‘디지털’적 콘텐츠에 흡수되고 있다고 생각해. ‘혐오하기 쉬운 캐릭터’는 그 중 아주 사소한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이 현상에서 발생하는 ‘날 것’에 대한 우리의 짜증과 욕구불만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주장하고 싶어.
<유튜브>는 이런 ‘낭만의 타협’에 가장 적합한 예시가 되지. 이른바 ‘대리만족’의 화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어플’을 통해서 무한한 ‘낭만’의 간접체험이 가능해지고, 기존의 ‘대리만족’형 낭만을 담당하던 거의 모든 콘텐츠(영화, 예술 공연, 만화, 기행, 고전작품, 콘서트, 게임, 연예, 스포츠, 반려동물, 원예 등)를 재생산하는 장이 ‘낭만 있는’이라는 표현을 필두로 영원히 확보되는 거야.
무한히 공유하고 공감을 얻고 구독을 모으는 디지털적 시스템에서 ‘아날로그’적 낭만을 무한히 재생산한다는 아이러니는 ‘리비도’적 불만족 구조와 매우 유사하고, 실제로 서로를 포함, 포괄하는 경우가 많지. ‘핫포사이’나 ‘미네타’같은 캐릭터는 이성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이 ‘실제’로 표현되는 것의 ‘경계’와 ‘불편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당 주제에 대해 우리가 ‘리비도’적으로 느끼는 짜증과 불만을 잘 보여주고 있어.
‘겐타’의 경우, 사회에서 ‘수용되지 않는 가치관’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 특수해. 물론 우린 이미 SF속 거대로봇에 대한 동경이 수많은 SNS를 통해 공유되고 공감 받는 시대에 살고 있어. 그런 지점 때문에 <단다단>은 ‘스마트폰’이라는 편리함을 의도적으로 주인공 무리에게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그는 아직 자신이 피부로 겪은 혐오와 차별이 이 ‘공유’의 시대에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겐타’라는 인물을 통해 항변하고 있는 거야. 아직 사람들에게 수용되지 않는 누군가의 ‘관심과 열정’을 드러내고, 그것이 누군가의 ‘리비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충족되지 않는 ‘낭만’에 대한 군상을 드러내는 거지.
현재는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낭만’과 ‘명예’를 합의해야 하는 시대야.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로 우린 ‘기사도’나 ‘명예’와 같은 중세, 봉건시대의 낭만을 소비하지만, 그것을 실전의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갈 거라 기대하지 않지. 사회, 경제적 시스템을 통해 누군가의 곤란한 ‘리비도’나 실용적이지 않는 ‘낭만’을 통제하고, 개인에게 그것을 사실상 ‘허상’으로 탈바꿈하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거든. 이 글을 통해, ‘쉽게 혐오할 수 있는’ 캐릭터나 주변인은 우리사회의 거대한 모순의 단편일 뿐이란 걸 알아주길 바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이나 그들의 ‘낭만’이 타협되고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