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상자 속엔 이 일기장과 펜이 있었어. 쪽지에 ‘네모난 것의 이름은 일기, 길쭉한 것의 이름은 펜이야. 일기는 쓰는 자의 생각을 비밀스럽게 저장하는 창고, 펜은 쓰는 자의 생각을 창고에 옮겨주는 트레일러지.’ 마침, 내게 필요한 물건을 선물 받는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지 않아?
한동안 일기와 펜을 관찰했어. 일기는 구형 노트북 정도의 크기이고, 구부리면 쉽게 휘어지다가, 어느 정도의 선에 이르면 가운데가 뾰족해지며 접혔지. 페이지를 넘기니, 여러 가로줄과 공백이 늘어져 있을 뿐이야. 펜은 익숙한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어. 버튼을 누르니, 심이 삐져나왔지. 잉크를 구해야 한다는 걸 빼면(물론 이게 필요하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디지털 펜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
펜을 쥐고, 글을 써봤어. 여러 시행착오 끝에, 망원경을 얻기까지의 감정을 기록할 수 있었지. 기분이 묘해. 지금 약간 들떠 있어. 나의 기록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라. 일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기록할 수 있어. 이제는 선생이란 사람의 요구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고!
큰 공백에 그림도 그려봤어. 거리에서 봤던,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 구름의 변화무쌍한 모습들, 도시의 건물들, 머나먼 일출, 시기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별들을 그렸지. 이제는 이곳이 답답하지 않아. 무언가 거대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매 순간 관찰하는 느낌이야.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다, 가까이서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의 냄새와 촉감, 소리와 맛을 느끼곤, 어딘가에 남길 수 있다는 것. 이게 나의 정신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