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양분 - 소설

“그래, 내 생각은 이래. 다들 참 너무하다 싶을 만큼, 너무 쉽게 중요한 것들을 양분하는 거 같아.”

?

“왜, 많이 있잖아. 흑과 백, 음과 양, 여자와 남자 같은 거 말이야. 우리들은 너무 쉽게 양분하고 정해버리는 거 같다는 거야.”

얜 또 뭐래?

“계속해봐.”


“그래야겠지? 좀 방대해질 수 있고, 어차피 사랑이랑 사과가 해줄 거니까 성의 양분화는 빼고 설명해 볼게. 우리는 무언가를 인지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좋은 건지 나쁜 건지부터 파악하려고 해.”

그래. 다들 정신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이상한 거니까.

“예를 들면?”

“이야기가 있으면,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역인지를 구별하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되어있지 않아? 곤충이 있으면, 익충인지 해충인지 구별하고 있지. 아니, 우린 기대되지 않은 거의 모든 존재에 대해, 우선적으로 나쁘다고 정해놓고 생각하고 있어. 반대지만 비슷하게도, 귀여운 것에 대해선 우선적으로 편안해하고, 좋은 것으로 정해놓고 있지. 귀여운 것은 절대적인 것만 같아. 결코 판별되지 않잖아.”

항상 그래.

“또 뭔가, 불편한 것에 대한 얘기구나?”

“그럼! 우린 그 맛에 사는 미친놈들인 걸? 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 감히!

“뭐라고~!?”


“아무튼 이상하리만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우린, 판단을 끝내놓은 상태로 움직인다는 거야. 세상의 본질은 다원성 속에 있는데도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

“ㅎ! 너무 황당해서 생각한 걸 바로 말하고 그런다, 야. 다원성이 뭐기에, 진리의 이름을 자처할 수 있다는 거니?”


“음, 또 복잡한 주제지만 쉽게 말해서,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거야.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별해 주는 건, 모두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라는 거지. 물리적으론 유전자라는 생체지도의 메커니즘으로 알 수 있지. 다른 영역에선,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모두가 필연적으로 고독한 현상을 들 수 있겠네. 우린 모두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거고, 존재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중략)


“사실, 다원성은 지금 몰라도 돼. 나 말고 누군가는 자세히 설명할 테니까 뭐~. 중요한 건, 우리가 흑백논리로 세상을 이해하는 습관이 있다는 거야.”

“그래? 정말 그런가? 네 말이 맞는 거 같으면서도,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중립적인 입장이나 결정을 못 내리는 상태, 혹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대상이나 상황은 많이 있는 거 같은데?”

“당연히 그런 상황은 있지. 아니, 사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중요한 건, 그런 상황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


??

“그건 또 무슨 말이니?”

“난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간단한 사례들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다른 애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을 거야. 당연히 옳은지 그른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례들 말이야. 아마 다들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했을 거야. 쉽게 말해서, 우린 무고한 존재를 희생으로 하는 범죄와 같은 행위들은 따로 분석하진 않아. 이미 우린 답을 알고 있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따지고 싶은 건 그런 범주에 있는 게 아니야.”


점점 더 알 수가 없네.

“그럼 우리가 따지고 싶은 범주라는 게 뭐니?”

“다른 모든 것들 말이야. 당연하게 결과를 내릴 수 없는, 대부분의 경우를 따지고 싶어 하지. 네가 아까 말한 예시들이 그런 거야. 실제로 뭐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싶은 게 아니라, 세상의 대부분이 그 답을 모르는 모순적인 퍼즐인데, 우리가 그걸 굳이 간단하게 분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거지.”

!!


“하……. 인정하긴 싫지만, 저번에도 비슷한 얘길 했었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말한 예시들이 결국, 우리가 모호한 것들을 빨리 결정하기 위해 겪는 정신적 상황이라는 거구나? 중립이란 입장은 그 자체로 이미, 판단의 기준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반증이지. 결정을 못 내리는 상태를 의식하는 건, 어떻게든 결정을 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는 거야. 마찬가지로 좋지도 싫지도 않은 남이란 건, 다른 경우보다 훨씬 불편하고 구차해서, 차라리 정해놓고 싶어지는 법이란 거지.”

“바로 그거야! 이제 좀 알 거 같지?”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 그런 거 같네.”


“좋아, 좋아. 그럼 그다음을 얘기하자고.”

하…….

“아직 뭐가 남았니?”

“그럼! 이제 시작인 걸~.”

미치겠네.

“그래, 말해봐.”


우리가 너무나 쉽고 빠르게 결정을 내려놓는다는 건, 결국 쉽게 양분하고 있다는 거야. 쉬운 결정이란 건, 결코 다원적일 수 없어. 다원적인 건, 그 결과 말고는 손쉬운 것과 가장 거리가 먼 법이거든.


그럼 우리가 결정을 어떻게 내리고 있는 거겠어? 정말 찰나의 순간에 할 수 있는 결정, 바로 그게 좋은 거냐 나쁜 거냐는 거야. 우리가 그것에 우호적이냐 적대하느냐를 가장 먼저 정해놓는 방식이지.


좀 멍청해 보여도, 이 방법은 정말로 가장 효율적이긴 해. 적어도 고민하느라고 시간을 쓸 필요가 없어지거든. 무슨 이야기가 되었든, 무난하고 착한 녀석과 이상하고 나쁜 녀석의 대결구도로 생각하면, 많은 것들을 단순하게 넘겨버릴 수 있어. 심지어 ‘우리가 어떻게 감정을 느끼고 무엇을 바라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정해진 것’인 양 살아갈 수 있지. 보너스로, 나 자신이 전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충실한 만족감까지 매일 충전해 주고 말이야. 정말 이거만큼 충실하고 효율적일 수가 없지.


‘또 무서운 얘기가 시작되고 있어…….’


하지만 이게 그냥 멍청해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정말로 멍청한 일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모두가 혹시, 헛수고하는 게 아닐까? 아니 애초에, 도대체 누가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른지를 판단하고, 홍해를 가르듯이 가려버릴 수 있다는 걸까? 누가 그 확신에 책임을 지고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그걸 정확하게 알아내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야. 너무 많은 요인들이 뒤섞여있을게 뻔하니까. 물론 우리가 이런 말하는 건 참 웃긴 일이지만, 당장에 증명하거나 적어도 분석조차 할 수 없는 의문들에 섣부르게 파고들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내가 하고 싶은 게, 그런 뜬구름을 잡는 것도 아니고. 내 역할은, 그나마 이런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거니까.


하지만 너무 당연한 의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 우리가 너무나 쉽게 많은 것들을 양분한다는 건,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야. 세상에 어떤 것이 그렇게나 확실하게 좋고 나쁠 수가 있겠니?


이건 너무나 당연한 진리야. 뭐든지 과유불급이란 말은,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거야. 물론 이 사자성어는 선악이랑 별개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선악도 마찬가지거든. 선이라고 해서, 많을수록 좋을 리는 없는 법이야. 악이라고 해서, 적을수록 좋을 리도 없는 법이지.


물론 우린, 나름대로 판별하고 있어. 적어도 확실하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류해 놓았지.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물론 도덕률이란 것도 언제나 옳거나 과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경험과 지혜를 통해 분간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단 거지.


하지만 그건, 빠르게 끝나버리는 문제야. 이미 해결된 것들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는 법이니까.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쉬운 양분을 하려고 한다는 거야. 주로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나 책임 떠넘기기의 일환으로 일어나는 일들이지. 어떨 땐 당연하다고 여기는 도덕률이 직접 위협당할 때도 있고.


이건 비단 요즘 일어나는 일은 아니야. 오히려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지. 우린 어느 시대나 도덕률을 가지고 쉬운 양분을 해왔어.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무서워하는 상태지. 혼란스러우면 여전히 쉬운 방법으로 희생양을 어떻게든 찾아냈고, 도덕률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버린 거야. 그 모든 과정을 역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너무 당연하게 이뤄진 일이었지.


‘어, 어우.’


결론적으로, 우린 항상 옳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맹목적인 혜택을 주었어. 어떨 땐 신성하다는 이유로 어떨 땐 법이라는 이유로 어떨 땐 세상이 혼란 속에 있다는 이유로 그 모든 걸 정당화했지. 반대도 마찬가지야. 우린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너무나 잔혹했어. 그 옛날엔 더러운 혈통이었고 사탄의 가르침이었지. 마녀의 저주일 때도 있었고 허무맹랑한 소리일 때도 있었어. 요즘은 아마, 미친 소리라고 부르고 있지.


언제나 그래왔는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문제일 수 있을까? 틀린 말은 아니야.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는 문제라면, 경제학의 감가상각처럼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넘겨버릴 수 있어. 실제로 여태 그래왔지. 적어도 세상엔 확실히 정해져 있는 원칙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생각한 원칙이 틀릴 수는 있어도, 그것과 세상의 진리가 우리를 옭아매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까. 아까도 얘기했듯이, 알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는 것에 대해,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잖아?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어. 우리가 지금 세상에 대해 내린 결론은, 결국 아무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다는 거야. 대부분의 가능한 가정이 틀리거나 들어맞는 것보다 훨씬 많은, 알 수 없는 미지수들이 우리 주변을 영원히 에워싸고 있다는 거야.


우린 아직, 거의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입자는 우리가 유심히 관찰하기 전엔 파동이었다가, 보는 순간 입자가 돼. 모든 성현의 옳은 말들은, 다 나름의 허점을 가지고 있어. 우린 임의로 세상에 정답을 정해놓고 살고 있지만, 우주는 온몸으로 그런 답 따위 없다고, 아니 그런 답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수수께끼라고 제시하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우린, 계속 쉬운 양분을 습관처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걸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눴다면 그 이유는 물론이고, 그런 분류가 단순한 편의와 기계적인 정의에 의한 현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어.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해 편리한 분류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분류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해. 오늘은 양분하기 전에 끝없이 생각해 보길 바라.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홍시 태양 -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