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극복하기

난 이 시대가 맥락에 따라 일종의 ‘혐오표현’이 될 수 있는, 강력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시대라고 생각해. 내가 이런 표현들에 대해 아는 바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꼰대’라는 표현에 대해선 몇 가지 의문과 답답한 점이 있더라고.


내가 처음 ‘꼰대’라는 말을 접했을 때 든 생각은, ‘?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 결국 모두가 꼰대가 될 운명이지 않나?’하는 거였어. 물론 지금은 이러한 ‘혐오표현’이 될 수 있는 단어들의 사용에, 수많은 맥락과 층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꼰대’라는 말이 내포하는 공격성 자체엔 거대한 모순이 있는 거 같다는 직감을 가지고 있거든.


‘꼰대’라는 말은 원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는데,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변형된 속어라고 해. (출처: 위키백과)


학생시절에 권위적인 어른을 ‘꼰대’라고 부르던 세대가 사회인 세대가 되면서, 은어가 자연스레 권위적인 상사 등을 지칭하는 언어로 확장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네.


내가 생각하는 ‘꼰대’라는 표현의 자기모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꼰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몇 가지 층위,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특히나 현대의 ‘혐오표현’을 설명하기 위해선, 그 용어가 사용되는 상황, 장소, 발화자의 의도 등의 복잡한 화학작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으니까.


먼저, ‘꼰대’라는 말이 은어로써 사용되던 층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 단어의 탄생은 지극히 ‘세대적’인 환경에서 이뤄졌다고 봐. 처음은 몇몇 학생만이 공유하는, 공공의 적을 지칭하는 ‘혐오표현’이었고, 이런 식으로 ‘새로운 세대가 본인들에게 잔소리와 권위를 들이미는 존재를 아니꼬워하는 심리’자체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하나의 인류적 역사이기 때문이야.


일단, 젊은 인간세대의 이런 ‘반항심’은 하나의 ‘고정된 상수처럼 언제나 존재한다.’ 정도로 정의하고, 이러한 반항심을 잘 표현하는 하나의 은어가 특유의 어감과 ‘비대면 공유의 시대’를 통해 대중적인 ‘혐오표현’이 된 배경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


내가 짚고 싶은 부분은, 권위적인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거부감이 상승했다는 점이야. 정확하게는 거부감을 더 잘 표현하고 묵인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확대되었다는 것이지.


이러한 경향을 민주의식의 강화나 시대의 변화(발전), 다원화 사회와 개인주의에서 찾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이념 자체를 프레임으로 내세우는 강력한 집단에서 이유를 찾는 게 현명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맞아, 이 측면은 미국이라는 최강의 국가가 현대 민주사회를 구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세팅된, ‘지정학적 개인’으로 정의하고 넘어갈 생각이야.


세 번째로 정의할 층위는 ‘꼰대’라고 정의되는 행동의 범위야.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표현의 시작은 거의 전적으로 세대적인 것이었지만, 본격적으로 확대된 계기는 ‘이해할 수 없는 권위주의적 사고로 나에게 지적하는 높은 사람’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에 있어. 이것은 ‘꼰대’라는 표현을 단순한 세대적인 갈등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집단적 권위의 불합리함으로 확장하는(주로 ‘직장’이라는 생계의 필연을 통해) 중요한 장치가 되었지.


또한 ‘꼰대’라는 표현이 하나의 담론으로 대중 사이에 서로 교환될 때 나타나는 다원화도 중요한 범위를 지정하고 있지. 쉽게 말해서, ‘어느 정도까지가 확실히 ‘꼰대’인가?’에 대한 합의를 정하는 거야. 재밌는 점은 이러한 담론이 공유되는 집단의 범위나 구성원의 평균적인 계층에 따라 그 합의가 상이하다는 것인데, 일단은 어느 집단이든 ‘꼰대’라는 혐오표현을 사용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선을 지정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정도로 넘어가도록 할게. (적어도 타인에 대한 모든 지적이 ‘꼰대’라는 표현으로 귀결되진 않는다는 거야. 특정 집단에선 ‘남성’에 대한 모든 긍정적 표현이 ‘남미새’라는 혐오표현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더라고.)


이상의 층위들을 바탕으로 ‘꼰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예시를 살펴보면, 몇 가지 재밌는 사실에 도달할 수 있어. ‘꼰대희’라는 유튜브 채널로 시작해 보자. 이 사례는 해당 주제를 얘기하기에 매우 적절한데, 채널의 제목 자체가 ‘꼰대’인 인물의 캐릭터화에 중점이 있고, 특유의 연출로 ‘꼰대’의 이미지를 희화화하여, 친밀하면서도 어찌 보면 귀여운 인간 군상의 하나로써 ‘꼰대’라는 단어를 정의하고 있어.


일단 ‘꼰대희’ 채널이 ‘존재’하는 현상을 얘기해 보자면, 만약 ‘꼰대’라는 표현이 상대적으로 더 공격적인 ‘여혐’이나 ‘남혐’같은 혐오표현과 같은 위상으로 사용되고 있다면, 이러한 유머 채널이 공공연하게 소비되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만큼 이 채널은 일상에서 쉬이 마주칠 수 있는 ‘꼰대’적 상황을 최대한 ‘부드러운 공감대’로 표현하고 있어. 과거에 <개그콘서트>에서 진행했던, <밥묵자>라는 프로를 기본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어른이 먼저 먹어야 아랫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전통이 대표적이지. 그 밖에도 외국 출신의 출연자가 반말을 할 때면 놓치지 않고 눈치를 주는 것이나, 어른이 말하는데 꼬투리를 잡는다는 식의 장면이 자주 등장하지.


중요한 건, ‘개그’의 본질을 잘 활용하여 진행자인 ‘꼰대희’와 참여하는 ‘게스트’가 그 꼰대적 상황을 유하게 넘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야. ‘꼰대희’의 권위적인 전통에서 비롯한 행동이 진지한 반론을 받는 것도 아니고, ‘게스트’의 반권위적인 행동이 실제로 압박을 받지 않아. ‘꼰대희’와 ‘게스트’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행동에 ‘이질적인 귀여움’을 느끼고, 서로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좋게 좋게 이해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프로를 진행하고 있어.


내가 보기에 이 프로는 ‘꼰대’라는 키워드에서 만날 수 있는, 인간의 솔직한 이면(귀여움)과 부드러운 충돌을 잘 보여주는 희극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례가 훨씬 많이 존재하지. 직장을 비롯한 수많은 ‘인간집단’의 본모습은, 권위적인 전통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아. 어찌 보면 이것은 ‘역사’의 필연이기 때문에, 절대로 단기간에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권위’가 전무한 집단은 집단으로써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지.(이것 또한 필연이야)


재밌는 점은, 과도하고 확실한 ‘권위주의’나 ‘반권위주의’를 ‘꼰대’라는 키워드로 솎아내는 현상이 일상의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는 거야. 자신의 직급에서 나오는 권위를 아랫사람에게 부조리하게 사용하는 예시에서, ‘꼰대’라는 표현은 확실한 혐오표현으로 ‘응징’의 도구가 되지. 동시에, 윗사람이나 기존질서의 모든 요구에 과도하게 자신의 ‘권리’만을 찾는 존재에겐, ‘꼰대’라는 ‘무기’와 무리에 섞일 ‘자격’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이것은 인간의 무리생활에서 자주 발생하는 양상인데, 무리의 구성원이 서로에 대해 평가하고 과도한 언행을 보인다고 생각되는 개체를 배제하는 현상이야. 즉, 다수의 구성원이 상식적이라고 합의하는 특정한 ‘선’이 존재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무리’의 생리로 응징하는 형태의 정치를 의미하지.


솔직히 기분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회’란 이런 구조를 자주 보이고 있다는 게 사실이야.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무리’의 생리가 ‘꼰대’라는 현상의 정도를 판가름하는 척도로 사용됨과 동시에, 인간의 ‘꼰대’적인 성향을 잘 나타내는 예시가 된다는 점이야. (이런 ‘무리의 생리’에게 어떤 권한이 있기에 ‘꼰대’적인 것의 척도를 판별한다는 거겠어? 그 본질은 또 다른 형태의 권위 행사일 뿐이야.)


조금 원초적인 얘기로 돌아가 볼까? 몇몇 사람들이 ‘꼰대’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그들에겐 어떤 유인이 작용하기에 일견 꼴사나운 행동을 당연하다는 듯이 행하게 되는 걸까?


‘꼰대’가 아직 은어인 시절(세대 차이라는 층위)에서의 ‘꼰대’적인 행위는, 자라나는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훈계에서 비롯한 거야. 그들이 ‘훈계’라는 행위를 좋아하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동기와 행동에 ‘꼰대’라는 개념은 매우 희미하게 작용하지.(아마 자신들의 선생과 부모도 자신에게 이런 식의 잔소리를 했었다는 회한 정도일 거야)


반면에 그들에게 해당 행위의 정당성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이것은 그들이 특별히 젊은 세대를 괴롭히기 좋아한다거나 자신의 권위에 심취해 있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런 행동이 유구한 전통과 상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대전제야. 쉽게 말하면,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세상의 규칙에 맞게 행동하고 있고, 아직 그것을 모를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조금이나마 가르쳐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거지.


물론 모든 ‘나이 든’ 세대가 정확하게 이런 동기에 맞게 행동했다는 얘기가 아니야. ‘꼰대라는 표현이 은어에서 벗어나고 무한 공유의 시대에 대중적으로 사용되면서, 이 언어는 하나의 판가름이 필요한 개념으로서 작용해 왔다는 거지. 동기와 실질적 행동을 분리하고, 허용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인간집단의 특성으로 재조정된 사례야.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난 우리가 본질적으로 ‘꼰대’적인 존재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어. ‘꼰대희’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모두 나름의 귀여운 ‘고정관념’을 가지기 마련이고, ‘꼰대’라는 말의 역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러한 ‘고정관념’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인 규칙에 의거하는 거야. 또한 우리가 ‘꼰대’라는 말을 담론화하면서 나타났던 일종의 ‘꼰대 솎아내기’ 현상도 인간이 서로 공유하는 ‘배타성의 합의’, ‘배제의 정치’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꼰대’적인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현상이라는 거지.


내 생각에 ‘꼰대’ 담론을 진정으로 마무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전제는, 우리(인류)가 그 자체로 ‘꼰대’적인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거야. 생각보다 ‘꼰대’라는 잣대가 우리를 광범위하게 수식할 수 있는 표현(인간의 귀여움부터 권위의 폭력, 그리고 집단의 정치)이라는 것은, 우리의 습성을 잘 표현하는 개념이라는 거지.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어른’이라는 희귀한 자원에 목말라 있기에,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느끼는 순간 ‘꼰대’적인 습성이 드러나 버리는 건지도 모를 일이야. 내가 겪어온 고난을 겪고 있는 미숙한 존재에게 괜히 뻗대고 싶고, 내 의견에 동의하는 무리를 확인(소통)하는 것으로 사회적 안정감과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는 거지.


사실 우리에게 그런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것의 뿌리엔 우리의 귀여운 구석이나 인간 사회의 필연적 생리뿐만 아니라, 현대의 Supply Chain(공급사슬)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헛된 자립감’에서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는 거고 말이야. 우리는 전 사회적 분업으로 서로의 생산 활동이 연동되어 있음에도, ‘돈’이라는 매개체를 소유, 사용하는 것만으로 ‘합리적 인간’이라는 칭호가 발급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으니까. 거의 모든 것과 교환할 수 있는 자본의 점유로 ‘자유’의 노예를 양산하는, 흥미로운 구조지.


다행인 건, 우리가 ‘꼰대’라는 주제에 있어서 충분히 논쟁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야. 시대가 지나면서 어느 정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권위의 행사’인지가 끝없이 조정되고, 집단에 응징과 개인의 권리가 나름의 균형을 이루는 주제라고 생각해.


쓸데없이 장황한 말을 해버렸지만, 우린 조만간 ‘꼰대’라는 혐오표현을 극복하는 수준에 도달할 거야. 내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분별없이 ‘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당신에게 득이 될 수 없다는 거야. 그것은 ‘노화’의 필연을 망각하는 일이고,(내가 쓴 ‘불멸의 가정’이라는 글이 생각나는 대목이네) 정도에 따라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모욕하는 몰상식한 표현일 수 있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본인이 느끼는 우월감이나 정당성이 얼마나 치졸한 근원에서 오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응징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꼰대’라는 개념으로 무너지고 상처받는 양측의 막대한 피해가 무색할 정도로, 이 주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데도 말이야. 우리는 모두 평생을 ‘어린아이’로 살아갈 뿐이야.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몇 안 되는 특출한 인물일 뿐이고, 시스템의 특성이 유리한 무리에게 ‘어른’의 명함을 일시적으로 대여해 줄 뿐이라고.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권위’라는 개념에 중립적일 정도로 숭고한 존재는 절대 아니며, 사회라는 게임 속에서 국지적으로 유리해질 수 있는 조건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항상 기회를 엿보는 하이에나라는 거지.


결국 사회의 모든 것이 ‘권력관계’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꼰대’와 같은 거의 모든 혐오표현이 얼마나 협소한 행위인지 금방 알게 될 거야.


unnamed.jpg 이미지 출처: <꼰대희>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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