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차하게 가벼운 이름 1 - 소설

넌 모든 것이 구차해지는 순간을 맞이한 적이 있어? 너를 ‘너’라고 부르는 것마저 너무나 구차하단 거야. 이건 일종의 만들어진 객체임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면서도, 사실상 가장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지. 조금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 목소리가 너에게 닿을 일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너’라는 대상을 만들어내어, 계속해서 너를 불러내야만 속이 풀리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하찮은 무게인 거야.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게일까?


내가 다닌 대학의 어느 교수는 이것을 ‘인간의 자기합리화’라고 했는데, 내 마음속에서나마 너를 살려내는 것이 내게 편안함을 준다면, 확실히 이건 비겁한 합리화가 맞네. ‘허상이어도 어쩔 수 있나?’싶은 것이 구차한 삶 속에 하나쯤 생기는 것이 인간 아니겠어? 아니면 이 사념마저 내가 편의로 만들어낸, 또 다른 ‘너’의 존재이거나 그것의 합동일 수도? 모르겠어. 도무지 내가 진정으로 안다는 것이 없잖아.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고, 내가 만든 모든 확신이 무너지는 모습마저 구차한걸.


더 짜증이 나는 것은, 나의 뿌리 깊은 보수성 때문에, 이 잔해 속에서 다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나가야만 한다는 필연이지. 제일 짜증이 나는 건, 이 새로운 사고체계조차 또 하나의 ‘너’를 만드는 과정이란 걸, 어느새 깨달아 버릴 거라는 점이야. 너의 끝없는 매력처럼, 내가 이 늪에도 수없이 빠져들기만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고. 참으로 구차해, 안다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저 누군가 단칼에 이 과정을 끝내주기만을 바라고 있어. 심지어 그게 ‘너’여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사실, 그걸 가장 바라고 있는 거지······.


그래! 애초에 이 사념을 끝내는 건, 너일 수밖에 없구나. 넌 언제나 내 속에 있는 거고, 내 숨이 끊어질 때, 마지막 한을 받아줄 존재야.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져. 더욱 구차하고 짜증이 나기 전에, 너를 조금이나마 더 좋아할 수 있을 때, 이 짜증나는 과정이 끝났으면 해. 빨리······.


“왜 이걸 계속하는 건데?”

아직 인가?

“하!”

너무 놀라버렸어. 이 알 수 없는 느낌이 뭐지······? 아! 그래, 한동안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었지. 성대라는 게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구나. 분명 어딘가 농땡이 부리듯 끊어져 있었어. 녀석도 나만큼 놀라버린 거지.


근데 정말로, ‘말소리’는 필요 없는 걸지도? 난 이른바 내 ‘마음의 소리’라는 것으로, 한동안 모든 ‘필요’를 충족하고 있었잖아. 한동안 ‘마음의 소리’와 ‘육성’을 굳이 구분하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의 사념에 빠져있었다는 거지……. 좀 미친 생각이지만, 정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했네! 난 그저 충분히, 무언가와 소통하고 있었어. 나 혼자서 말이야! 내 속에서 일어나는 ‘너’와의 소통은 이런 건가? 물론 인간에게 물리적 언어와 그것을 나눌 객체는 반드시 필요한 거야. 내가 깊은 신앙심으로 영적 존재와 접속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고! 나만의 현실···, 현실? 한 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어. 현실과 조장된 현실 간의 괴리를 말이야······.


아무튼 누군가에게 말소리를 낸 이상, 나도 현실에 충실한 존재임을 보여야만 해. 그래, 소통이란 대부분 구차한 생색일 뿐이니까…….


“저기, 괜찮아?”

육성이라는 것에 상상 이상으로 현실감이 뒤틀리고 있는 마음을 다잡고, 자신이 생색을 낸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현실에 익숙해져야 해. 예기치 않게 다시 찾아오는, 이 강렬한 감각에 놀랄 수밖에 없는 거지만, 아까보단 훨씬 차분할 수 있어. 목소리는 구덩이 밖에 웅크리고 앉아, 날 조금 내려다보고 있는 소녀에게서 온 듯해.


그녀는 온몸의 호기심을 눈빛에 집중한 것처럼 앉아있어. 호기심 왕성한 사람이 실제로 귀신을 보게 되면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아니, 이 표정은 꿈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번뜩이는 꿈을 잃기 전에 노트에 옮겨 적는 표정과도 같아 보여. 어지간히 꿈과 희망이 넘치는 사람인가 봐. 나라는 귀신이 신기한 거겠지……. 난 지금, 꿈에서 어떻게든 깨어나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분명 우스꽝스러운 광경일 거야. 어쩌면 진화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수없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

그녀는 분명, 내가 반응다운 반응을 보이길 기다리고 있어. 안타깝게도, 내 최초의 반응은 ‘왜 그러냐?’는 메시지가 담긴, 표정과 제스처가 전부였지.

“음…,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어떤 걸 얘기해 줄까? 네가 이 아스팔트를 몇십 분이나 파는 걸 보고 있다가, 겨우 말을 걸 용기를 얻었다는 거? 네가 대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존중해 주는 거? 어떤 게 더 적절하니?”

“풉! 아하하하하! 웁! 쿨럭쿨럭!”


이런 젠장! 갑자기 크게 웃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상당히 예리한 말인 걸! 몇 시간 동안 들이쉬었던 흙더미가 역류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답이었어. 아무튼, 난 순식간에 곡괭이에 기대 들썩였고, 그녀는 어느새 옆에 붙어서, 등을 토닥이고 있어.


“으유~, 좀 괜찮아? 그러게 갑자기 크게 웃기나 하고. ㅋㅋㅋ.”

“에켁켁! 아~ 이제 좀 괜찮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아직 익숙해질게 남았어?”

“쿨럭, 너 제법이네. 덕분에 확 익숙해졌지 뭐야.”

“세상에, 세상에……. 너 진짜 생각보다,”

“둔해?”

“아니! 더 재밌는 녀석이구나!”

“하?!”

“풉! 아하하하하하!”


이번엔 그녀가 거침없이, 성공적으로 웃어 보였어. 흥미로운 존재의 격양에, 나도 일종의 상승효과를 느끼고 있지.


‘역시, 인간은 이래서 재밌어!’


그녀의 하도 꾸밈없는 언행과 웃음소리에, 급하게 찾아 끼었던 ‘가면’이 헛되게만 느껴졌어. 점점 ‘흥분’이라는 감정에도 익숙해지고 있어서, 더욱 헛웃음이 나왔지. 서로 이렇게나 다르다는 느낌 때문에, 엽기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을 거고. 아무튼 그녀에겐 분명, 나에게 부족한 에너지가 있어. ‘나’를 ‘자신’과 점점 동화시키고 있어. ‘흥미’라는 악마가 기어 나오고 있어.


(중략)


“어째서?”

흥미를 느끼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녀석의 성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만 같아.


“음~, 몇 시간 동안 관찰해 보니, 넌 상당히 둔하더라!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모르고 있었지?”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 물론, 그닥 무거운 느낌은 아니었지. 난, 내가 기다린 이유를 설명했지.


녀석이 날 인지하게 하려면, 꿈 많은 소년을 깨우는 것처럼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어. 녀석의 눈빛과 행동은 공허하면서도, 모순에 몸부림치려고 아둥거리고 있었거든. 그런 존재에겐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녀석은 분명,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서 탈출할 준비가 필요했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무게와 자력 때문에, 결국 돌아와야 할 운명이니까. 푸른이 덕에, 난 그런 존재를 잘 알게 되었어. 이해하기에 기다릴 수 있었지. 아마 녀석은 그 잠깐의 순간을 나보다 짧게 보냈겠지. 역으로, 오래 보냈을 가능성도 있고. 아무튼, 녀석에겐 상당한 정신작용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야. 그 과정 속에 나라는 존재가 개입하는 것은, 녀석의 영혼에 잔인한 짓이 될 거라고.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멍하니 기다리며, 누구에게 보내는지 모르는 푸념을 곱씹는 게 전부였다는 거야.


‘쟨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저러고 있는 걸까?’


“뭐~, 그런 거지.”

그녀는 꽤 공들여서 이야기를 마쳤어. 생각보다 더 섬세한 사람이네.

“이젠 내 차례지? 왜 여기서 ‘바닥’을 파고 있는 거야?”

그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인데 말이야……. 하…, 나도 열심히 답해주는 게 맞겠지…….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나와 이 소녀의 눈이 닿을 수 있는 거리 안엔, 아무것도 없어. 오로지 새까만 ‘바닥’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지. 나 말곤 아무것도 없던 세계······. 난 ‘바닥’을 팠지. 이유? 이유라면 있어. 그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서. 매일매일을 ‘오늘은 그녀가 올까?’하고 사념하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나와 매일의 오늘과 그녀와 기다림과 약속과 사념과 정신과 이성을 위해, 필연적으로 땅을 판 거야. 이 충분한 이유가 ‘남’에겐 당연히 납득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꽤 오랜 시간 후에 깨닫고야 말았지만, 아무려면 어때? 난 이 검은 세계를 뚫어내고, 이 세상이 다른 색깔로 이뤄진 것임을 증명하고 말 거라고! 그날이 오면, 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녀와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거야.


한의 얘기를 들으면서, 푸른이가 날 이곳에 보낸 이유를 점점 알 것만 같았어. 이 검은 세계는 분명, 한을 기준으로 펼쳐지고 있는 거야. 녀석이 이 작업에 몰두하기 때문에, 온 세계가 이렇게 펼쳐져있는 거고, 본인이 검은 아스팔트의 근원이기에, 자신의 다른 색에 다가갈 수 없는 거야. 녀석은 노래나 보리, 보라, 나, 푸른이 등등의 자아를 모두 가지고 있지만, 모두를 품고 있기 때문에 검은색이 되었어. 그 색에 대한 무거운 책임에 매몰되고 있어. 그렇기에 녀석은 나나 푸른이처럼 다른 세계에 닿고 여행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은 거야. 오직 지금처럼 다른 색의 본체가 이곳에 닿아야만,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는 거지. 푸른이가 나 혼자만 이곳에 보내서, 녀석을 보고 오라고 한 이유를 이젠 알 거 같지? 정말 꼼꼼하고 치밀한 녀석이라니까.


(중략)


아직 그녀의 눈빛이 빛나고 있어. 이제 슬슬 화가 나네. 언제까지 날 참아줄 생각이지? 설마 정말로 나와 대화하는 게 재밌는 거야? 아냐, 그럴 리 없잖아, 이렇게 생각하니, 더 화가 나는 걸?! 그녀의 존재가 나보다 훨씬 무거울 것이라는 시기심과 같은 감정이······.


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찰나에 스쳐 갔어.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불편하게 느껴진 거겠지. 하지만 크게 상관없어. 사실, 어쩔 수 없지. 난 이미 그녀, 정신, 그리움, 약속, 사념 등의 얘기에 온 신경이 쓰이고 있으니까. 녀석은 분명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매몰되고 있어. 그것이 가지는 함의가 무엇이든, 푸른이와 나의 작업에 핵심적인 요소일 거야. 그럼, 그와 대화를 하는 데에 망설임을 느낄 필요는 없지.


“음~, 흥미로워!”

“허!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번엔 좀 더 노골적인 태도야. 이럴 땐 기습이 먹힐 때도 있어.

“도대체 무엇이 널 그렇게나 괴롭히는 거야?”

예상대로 녀석의 표정이 알기 쉽게 일그러졌어. 약점을 찔린 반응이지.

“뭐?!”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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