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입장에서 시간이 비껴가는 일이란 없어.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흐르는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모든 것은 세월을 맞아버리고 죽기 마련이라서, 시간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지만, 자신 이외의 것에게 시간이 비껴가길 바라는 건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
시간의 흐름은 실시간으로 느끼는 거야. 내 몸과 마음이 세월에 풍화하는 건, 언제나 관찰하는 일상이지. 난 삶에 대한 내 마음이 조금씩 무뎌지는 걸 느끼고 있어. 동시에 내 육체가 ‘편의성’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것도 느끼고 있지. 예전처럼 재밌게 독서를 해내기 힘들어지고, 점점 손톱이 쉽게 갈라지고 있다는 말이야. 조금만 시간이 더 지나면, 훨씬 가혹한 변화가 훨씬 가파른 속도로 찾아오겠지. 정말로 다 시간문제야.
이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물론 세세한 변화의 속도는 다르겠지만, 반드시 그 변화를 맞아가며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내 입장에서 그건, 관찰되지 않은 무언가일 뿐이야. 까놓고 말해서, 다른 존재에 대해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거라곤, 관찰한 한 순간뿐이란 건 당연한 거지. 냉혹한 말이지만, 사실이라고 생각해. 당장 너 자신을 봐봐. 얼마나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세세한 특징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니.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통제한 관찰을 아주 조금 벗겨내는 것에 불과해.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히 어렵고 위대한 일이지.
즉, 내 입장에서 누군가의 이미지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을 업데이트할 수 있겠지. 누군가를 관찰하고 예상하고 업데이트하는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니까. 어쩌면 타인에게 시간이 투과하는 것까지 직접 관찰해 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럴 수는 없지. 딱히 죽음이 그 사이를 가르지 않더라도, 영원히 추억과 상상 속에 남을 인간관계란 차고 넘치기 마련이야. 때론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도 그럴 수 있는 거고.
나의 시간은 언제나 관찰되지만, 소원해져 버린 사람의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는 거야. 만약 그가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상당히 잔혹한 상황이네. 분명 우주의 어딘가에서, 그 사람의 시간이 흘렀거나 흐르고 있을 거지만, 내겐 그걸 알아낼 재간이 없어. 내게도 투과한 그 시간을 그 사람에게 상상해 버리면, 결국 훨씬 선명한 상상인, 과거에 머무르게 되지.
중요한 건, 그 소중한 타인의 모습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거야. 타인에게 시간이 비껴가길 바라는 마음은 여기에서 시작하는 거지. 내게 소중했던 타인의 모습이, 딱 나의 기억에서 변하지 않길 바라는 건, 언제나 모든 게 변해가는 세상을 버티는, 힘이 되는 법이거든. 세상살이는 이렇게 힘든 거지만, 그 사람은 예전처럼 아름답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묘한 버팀목을 확보할 수 있거든.
결국 이것도 자신을 추억하는 방식이라는 거야. 타인을 향하는 마음은, 자신을 향하는 마음을 투과하는 법이거든. 소중한 타인과 함께한,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이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야.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내 곁에 가져와 버리면, 희망과 절망의 향신료 속에서, 당연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니까. 지금의 난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대체할 수 없을 테니까.
언제나 무언가 소실되는 현실 속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건 이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야. 난 이게 모든 사람이 보수적이고, 꼰대처럼 굴며, 아이의 동심을 잃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과거의 추억을 갈고닦으며 하나의 원동력으로 삼고, 추억 속의 자신과 누군가의 시간이 비껴가길 바란다는 거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거지. 추억은 과거에 고정된 거고, 시간은 절대 비껴가지 않는 거니까.
난 내가 가장 빛났던 시절 속에 헤어진 사람들과, 그때부터 여전히 날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의 시간이 비껴가길 바라고 있어. 내겐 시간이 정통으로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에겐 그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게 기도하고 있지. 누구보다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았던 그녀가, 여전히 내 첫사랑의 모습으로 살아줬으면 하고 있다고. 항상 눈곱이 끼어있고, 머리는 부스스하며, 자기가 드러눕는 곳이 주차장이든 뭐든 신경 쓰지 않는 녀석이었으면 좋겠어.
이건 그 시절 이후의 나를 강하게 구성하고 있어. 난 그녀에 대한 향수 때문에, 누구보다 쿨하고 자유롭고 싶다는, 일종의 객기를 가지게 되었지. 녀석에 대한 상실을 자기애로 극복하는 방식 말이야. 이건 비슷한 시기에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야. 여전히 젊은 시절에 가졌던 순수함이나 이상을 가지며 살아줬으면 좋겠어. 누군가에겐 여전히 음악을 가장 사랑하길 바라고, 누군가에겐 변함없이 사회운동 속에 고심하며 살아줬으면 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좀 너무하고 이기적이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준 녀석들에게도 마찬가지야. 물론 녀석들에게 현실의 벽이 나타나는 순간을 목격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빛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강인한 사람들이거든. 어찌 보면 그들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거야. 난 그런 강인함 따위 없으니까. 그저 추억 속에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마약의 환상처럼 활용하고 있어. 전혀 쿨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아. 그렇기에 녀석들에게 실제로 시간이 비껴간 거 같아서 다행이야.(물론 녀석들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겠지만 ^^) 다른 소중한 사람들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점점 더 강력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모두에게 찾아오겠지. 다들 그런 나이가 되어가고 있어. 시간이 비껴가길 바라는, 이 바보 같은 바람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날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져. 난 또 어떻게 절망하고, 그들은 또 어떻게 나름의 극복을 보여줄지, 기대되고 두려워. 시간 따위 흐르지 않아 버리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