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인 옛날에 어떻게 지냈어?”
“갑자기?”
“응. 궁금하거든.”
“넌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나?”
“당연하지!”
“그럼, 그거부터 얘기해 주라.”
엥? 이게 아닌데?
뭐, 알았어. 난 기쁘게 태어난 거 같아. 예전부터 심심할 틈이 없었거든. 내겐 모든 게, 새로워 보여. 알던 것들도 매일, 그 모습을 바꿔서 나타났으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항상 변하는 세계를 볼 수 있었다는 거야. 난 아마 그런 걸 볼 수 있는, 끄트머리 세대 중 하나였던 거 같아. 이상하게도 우리 집 앞마당은 초록 들판이어서, 사회의 태반이 검은 대지여도, 뭐가 가짜인지 알았던 거지.
그래서 난, 무작정 뛸 때가 참 좋았어. 물론 특별한 목적이 있어도 좋았지. 팽이를 쳐도 좋고, 잠자리를 잡아도 좋고, 술래잡기도 좋고, 무궁화놀이를 해도 좋고, 경찰과 도둑을 해도 좋았어. 아무리 생활의 태반이 건물 속에서 질서를 구현하는 거라도, 내겐 ‘진짜’ 속으로 탈출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가 주어졌지.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던 거 같아. 뭐가 옳고 그른지, 너무나 자명하다고 생각했어. 남들보다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심지어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그렇게 믿고 싶어 해. 왜냐면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살아있는 거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믿으니까.
안타깝게도, 난 사회라는 것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어. 지금이야 그게 다르게 숨 쉬는 방법의 실험이라는 걸 알지만, 그게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부숴버렸다는 걸, 훨씬 빨리 알아버렸거든. 넌 내가 이런 걸 알 리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도 순서효과라는 무서운 현상을 알아. 덕분에 난 사회라는 것에 좀 멀어졌지.
물론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걸 알았어. 하지만 이상하다고! 다들 멍청이야! 원래 이 도시는 푸르고 흙내 나는 곳이었다고! 난 비록 그 격변을 보지 못했지만, 너무 확실한 사실이잖아. 저 깊숙한 어딘가에 땅의 울음을 느낄 수 있어. 너무 거대하고 찢어지는 울음소린데도, 우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걸.
난 그냥 초록 들판에 살았어. 난 그냥 멀어졌지. 아니, 그냥 넘어진 거 같아. 분명 어딘가에서 끊어져 버렸어. 왜지? 왜 버려진 슬픔만 남은 걸까? 그래서 끝없이 생각했어.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누가 보여도 애써 피하면서까지 생각했어.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난 그걸 진짜로 할 수 있나? 왜 계속 망설였지? 왜 피하고 싶어 했던 거지?
덕분에 몇 가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어. 난 세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세상이 어떻든 내 마음에 맞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 그렇다면 확인해 봐야 해. 세상이 이상한지 내가 이상한지!
그래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가장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결론을 시험해 보려 해. 할 수 있는 만큼 달려보기로 했어. 그러다가 널 만나고, 이렇게 얘기하는 오늘이 온 거야.
초롱인 언제나 신기해. 언제나 그 눈이 빛나고 있어.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인데, 성장하고 있어. 어쩌면 너무한 거지.
“어때?”
“뭐가?”
“내 옛날이야기 말이야.”
“응. 예상했던 대로야.”
“아니~~~~!”
“?”
“재밌었냐고.”
“ㅎ! 대충 다 알고 있는데 재미가 문제인가?”
“아니, 이건 정말 정말 중요해.”
“어째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항상 똑같아도 항상 재밌잖아. 나도 할머니처럼 언제 하든 재밌고 흥겨운 얘길 한 걸까? 하고 기대하고 있단 말이야.”
“음~, 바라는 게 뭐야? 아! 재미없는 얘기라도 모르는 척해달라는 거지?”
“넌 정말 요령이 없어!”
초롱인 절망적인 표정을 꾸며냈어.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니야. ㅎㅎ.”
“ㅋㅋㅋㅋ~, 그건 맞아~. 그래도, 네 옛날얘기는 얼마나 재밌고 흥미로운지 들어봐야겠어. 날 비웃을 자격이 너한텐 없을 거니까.”
“오늘도 헛소리 잘~하네~.”
“빨리 얘기나 해!”
내 시작도 세상이 이상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 다만, 처음부터 확신하고 있었지. 자명해! 세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상한 곳이야! 다들 미쳤어. 너무 한심할 정도로 멍청하다고!
내 시작은 이런 식으로, 인간 혐오에 대한 확신이었어. 왜 인간을 혐오했는지에 대한 건, 지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 너도 안다고 생각하고, 곁다리로 얘기하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내린 결론은, 혐오스러운 인간을 더 명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거였지.
하지만 나름의 시련이 있었어. 곧, 가면이 필요하단 걸 알았거든. 이런 생각을 가졌다간, 남들이랑 도저히 섞여 살 수가 없어. 인간혐오를 하는 나도,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나의 삶은 반드시 사회에 예속될 필요가 있어. 난 인간혐오를 안 동시에,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알게 된 거야.
그 가면이라는 게 뭐냐고? 누가 되었든 인간다운 삶을 위해선, 연기자가 되어야 하는 폭력이야. 있지도 않은 보통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서, 규격에 안 맞는 사람을 정신 이상자로 만드는 시스템이지. 우린 진정한 의미로 나다울 수가 없는 거야. 정신 이상자가 되는 건, 궤도를 벗어난다는 거니까.
내 생각은 남에게 정신병으로 치부되는 것이야. 우리 모두를 욕보이는 거니까. 나 혼자 편하게 지내려는 수작이니까. 그래서 가면이 필요했어. 정상을 연기한다는 건, 내 생각이 남들에게 거부될 거란 것을 아는 것만큼 간단한 거였어. 생각 없이 사는 척만 하면 되거든. 누구도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생각하지 않는 게 편하니까!
난, 나 자신을 지키려고 남들과 똑같은 행동을 했어. 구역질이 나는 일이지. 항상 다른 생각을 하면서, 남을 기계처럼 대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켕김도 잠깐일 뿐이야. 익숙해지면, 연기하는 삶에 조금씩 몰입하게 되지. 남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따돌리고, 요즘 핫한 게 뭔지 관심을 가지는 일들 말이야.
거기에 가장 큰 함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야. 난 누구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채, 모범적인 학생으로 살아왔어. 혼자서 옳다고 믿는 생각을 꽁꽁 숨기기만 했던 거지. 그게 내가, 내 안의 목소리랑 같이 사는 유일한 방법인 줄 알았던 거야!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걸, 곧 알게 되었어. 난 항상 내 지식이 모든 것을 아우르길 바라는 사람이야. 그럴듯하고 타당한 모든 의견과 언어들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난 그 답을 남들보단 잘 안다고 믿었으니까.
근데, 그렇지 않았어. 이 배회를 시작하기 직전에, 내가 거대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걸 확신해 버렸어. 결론 없이 텅텅 비어있는, 내 삶을 발견한 거야.
“…….”
“…….”
“어때? 네 얘기보다 훨씬 재밌지?”
“음…, 아니.”
“비꼰 거야.”
“알아.”
퍽이나!
(중략)
“… 그럼, 다음 친구가 그걸 알려준다는 거야?”
“응…….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어.”
“걔가 누구기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나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뭐야 그게~, 그건 날 말하는 거잖아!”
“재미없어.”
“장난친 거 아닌데?”
“…….”
“알았어. 그럼, 그 사람은 네가 고민했던 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다는 거야?”
“…….”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
“흠~, 좋아. 그럼, 이것만 답해줘. 네가 그렇게 강박적으로 가면을 쓰고 싶어 할 만큼, 정상적인 삶이란 게 소중한 거야?”
“…….”
“그런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