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부모교육을 실시하였다. 호기심에 신청하였다. 대략 8명 내외의 직원분들이 둘러앉았다. 아동기 부모교육인지라 자녀들 연령이 초등생 이하인 엄마 아빠들이었다. 아빠들 4명, 엄마들 4명 정도였다. 지금 이 기관의 남자분들은 꽤 자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교육을 용기 내서 신청하고 듣는 것을 보면 꽤 노력한다는 의미겠지.
교육은 2회기로 진행되었다. 교육이어서 일방적인 강의만을 생각했는데, 빙 둘러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가정생활에서 각자의 힘든 상황을 이야기해 보고 가족구성원들의 가족 세우기도 진행하였다. 가족들을 대변하는 모형을 내 앞에 세워두고 그 가족들의 구성을 통해 나의 심리를 들여다보려는 노력 같았다. 현재 나의 가족들의 관계에서 원가족(나의 부모, 형제)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의 부모님과 나의 관계가 현 가족의 구성에도 영향을 주는 듯하다. 강사가 과거에 부모님의 관계는 어땠는지,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심리였는지 물었다. 글쎄, 과거의 나를 꺼내는 것은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대개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는 아픈 기억을 꺼내려한다. 현재 나의 심리를 들여다 보고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과정은 심리치료의 기본인 것 같다. 어린 나를 마주해야만 더 나아질 수 있다고들 한다. 정말일까? 늘 의구심이 든다. 아픈 과정을 뒤헤집지 않고도 현재와 미래를 보면 안 될까. 내 발목을 잡지 않은 과거라면, 굳이 문제시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여직원들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느 집 남편들이나 똑같은 모양새다. 알아서 일을 하는 남편은 없으며 부인의 요구를 더 듣느냐 안 듣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 듯싶은 정도. 남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신들의 부인이 남편을 조금 더 믿고 맡겨 주었으면 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나의 가정이 가장 심각한 모양새가 됐다. 가족심리를 전공한 강사가 난감해하며 '솔루션을 드려야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질 텐데...' 하며 한참 동안 침묵해 있었다. 그 침묵의 시간은 굉장히 나의 가정과 생활이 심각한 의미라는 듯이 느껴졌다. 두 시간가량 쉴 새 없이 참가자들의 말을 가로채 가며 열의를 보였던 강사가 말을 잇지 못하니 내가 어찌해야 할지... 강사는 상담기법으로 침묵을 이용했을 수도 있으나 내 눈에는 그저 난감해하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사실 각자의 솔루션은 각자가 갖고 있다. 상담가는 조력할 뿐이다. 의외로 내 문제는 답정, 내가 정해놓은 답이 있을 경우가 많다.
안 그런 척하려고 했지만, 그 상황에서 나는 강사보다 더 당황해했다. 그리고 깊게 상처받았다.
내 상황을 문제시했다는 것.
강사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내 상황이 해결불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결사를 자처하는 강사가 해결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고작 2시간씩 2번을, 개인치료로도 어려운데,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공감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사람들은 자기의 스토리를 읊는 것을 즐긴다. 스스로 말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기도 한다. 상담가가 해결책을 구하느라 눈을 굴리는 사이 상대는 혼란스러워한다. 그저 "네 말이 맞아. 힘들었겠네." 그 말로 상대는 위안을 받는데. 대체로 대화는 경청으로 시작해 경청으로 끝나는 게 좋다. 해결책을 이야기해 주려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거나 (나와 혹은 상대와)싸우기 일쑤다. 친구 관계든 상담 관계든. 모든 관계에서 나는 네 편이다. 그 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상대는 안도한다. 내 얘기를 듣고 재고 비교하고 제삼자의 의견을 대신 말해주는 상대라면 다시는 입을 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갈구한다.
네 말이 맞아.
잘했어.
네 마음이 그럴만하네.
그 말을 들으려고 대화한다. 아니, 그 말을 들으려고 언어를 습득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 행동에 너의 마음은 옳다.
내가 그런 행동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감정에 옳고 그름을, 좋고 나쁨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저 감정일 뿐. 그 누구도 아닌 나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