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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엄마 Apr 23. 2024

절벽을 내려오게 한 너

난 그 꿈속의 너를 기억해


늘 상처를 받으면서도 또 기대를 한다. 기대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걸 알면서도 나약한 마음 의지할 곳이 없어서 또 반복이다. 기댈 곳이 아니라는 게 마음으로 크게 다가오면 가슴 한편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모든 기운이 쑥 빠져나간다. 한기가 불어오고 추위가 느껴지면 몸이 더 굳어진다. 마음의 문을 다시 한번 굳게 닫는다고 큰소리치지만, 며칠 후면 또 똑같다. 한심한 나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걸까? 


한숨을 깊게 쉬며 싱크대 앞에 선다. 쌓인 설거지를 시작한다. 그릇에 묻은 음식 때를 벗기듯 내 마음의 때가 벗겨질 수는 없을까? 세제를 묻혀 뜨거운 물을 쏴아 부으면 기름때는 벗겨지는데, 마음에 쌓인 미움은 왜 닦아지지 않는 걸까? '네가, 내가 그렇지 뭐' 한숨에 섞어 체념하려는 순간  날 뒤에서 안아주는 부드러운 감촉, 포근하게 날 안아주는 그 손길에서 옛 꿈이 떠올랐다.


둘째 아기를 낳으러 가야 하는 며칠 전, 아이 아빠에게 빚이 있다는 걸 알았다. 괜찮다고 말했고, 괜찮을 줄 알았다. 아이를 낳고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산후통인 줄 알고 한의원에 갔는데 산후통이 아니라 했다. 마음이 아픈 것 같다는 말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난 괜찮지 않았다. 두 아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나를 바라보면 한심했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하는 자책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막막함까지. 내 탓이 아니라고 우겨봐도 그저 우기는 것일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약함이 싫어 몸부림칠수록 절망감은 커졌다. 


그런 어느 날 꿈에서 높은 산에 올랐다. 절벽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삶의 끈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원했던 삶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내가 아무리 기운 내고 열심히 살아보려 애써도 안 되는 건 안되더라. 무기력함이 날 감싸 안고 절망 앞에 무릎 꿇었다. 꿈에서라도 나는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그때 한 아기가 내게 왔다. 내 손을 잡아끌더니 내 등에 업혔다. 그 부드러운 감촉, 그 아기를 위해 난 산 아래로 내려왔다. 이 아기를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 찼다. 그렇게 꿈에서 깨었고, 꿈의 그 아기는 나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둘째란 생각에 더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설거지를 하는 나를 등 뒤에서 안아준 그 부드러운 감촉이 잠시 잊었던 그 꿈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 나는 요즘 왜 살아야 하는지, 무얼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막막했다. 뭘 해도 기분이 좋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오늘이 한심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뭘 할 때 행복한지, 내가 없고, 그저 눈앞에 닥친 하루를 살아내기 급급한 모습이 싫었다. 한심스러운 건 이 나이 먹도록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지금의 나였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목구멍을 죄어오는 것 같은 답답함으로 가득 찼다. 나이가 들어가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내 경제력과 앞으로 어떻게 변할 거란 기대 없는 내일이 주는 막막함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막막했던 그날, 그 절벽 앞에서 나를 살게 했던 포근한 내 인형을 꼭 안아본다. 따스한 감촉, 부드러운 볼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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