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기억 촉진제 (후편)

감정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들

by 숨은결

한동안 조용했다. 소리 없이 다녀간 그 사람은 이후에 한번 더 다녀갔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담 엑스의 집을 방문하려는 이가 한 명 더 나타났다. 의기양양하게 등장한 이 사람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지만 그 발걸음은 놀라울 정도로 신중함이 엿보였다. 신분을 알리지 않은 채 사람 없는 골목을 왕복했다. 유일하게 그가 만난 이는 마담 엑스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담 엑스의 집을 방문해서 그녀를 만났지만, 더 우선적으로 요구한 것은 마담 엑스의 넓은 정원의 한가운데 있는 수영장을 보게 해 달라는 게 전부였다. 마담 엑스는 그의 말을 듣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고 한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왜 수영장을 보려고 했을까? 뜨거운 태양 아래 이글이글 달아올랐던 수영장의 물속에는 왜 들어가려고 한 것인지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군가는 수영장을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업체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마담 엑스 집의 수영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그곳을 빌리고자 왔다는 말도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았다.

소문의 진위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두 명의 방문객이 차례로 마담 엑스를 방문하고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후였다. 하늘이 흐려서 곧 빗방울이 후드득 쏟아질 것만 같은 어느 날 오후였다. 좀처럼 열리지 않던 마담 엑스의 대문이 손님을 맞이하려고 열렸다. 현관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담 엑스는 역시 검은색의 고전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드레스를 입은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담 엑스와 인사를 나눈 방문객들은 함께 집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시간이 흘러, 이윽고 다시 현관문이 열리고 마담 엑스는 손님들을 대동하고 정원의 수영장 쪽으로 향했다. 어라, 정말 수영장에 문제라도 있나?

수영장 앞에 선 손님 중 가장 처음에 나타났던 사람이 옷을 입고 수영장으로 몸을 던졌다. 수영장은 하늘을 담은 채 하늘색으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물속으로 뛰어들자 사방에 물이 튀었다. 마담 엑스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으나 바라보기만 했고 어떤 웃음의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다만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방문객은 몰래 숨을 훅하고 들이켰다. 물속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여기예요. 이곳에서 그게 사라졌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는 마담 엑스를 향해 말하면서도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을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물로 시선을 변경했다.
마담 엑스는 “확실한가요? 그 자리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저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일이 일어났을 때 목격했으니 알 겁니다.”
마담 엑스는 조금 멀리 떨어져 서 있던 사람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사실이에요? 당신이 본 것과 일치하나요? 확인해 줄 수 있어요?”


긴장한 채 뻣뻣하게 듣고 있던 이는 입을 뻐끔뻐끔하다가 말했다. “네…네… 맞아요. 분명 저곳에서 일이 벌어졌고, 눈 깜짝할 새 바로 사라져 버렸어요! 하지만 그게 사라지던 순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냥 아무 흔적도 없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요. 그리고 순간 물속의 색깔이 진해졌던 것 같아요. 확실하지 않아요. 잘 모르겠어요. 그 순간은 햇빛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봤는지 알 수 없어요.” 물속에 있던 사내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끝난 줄 알았던 이 사람은, “그런데 물의 색깔이 순간 진해지는 동시에 수영장에 있던 사람이 몸을 움찔했어요. 착각했던 건지도 모르지만.”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말이 끝나자 임무를 완수한 군인처럼 다시 차렷 자세로 돌아갔다.

마담 엑스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수영장을 응시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에, 마담 엑스는 이렇게 말했다.
“ 그랬군요.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알았어요. 이야기가 보이네요. 일단 몸이 젖었을 테니 들어가서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옷은 집사가 가져다 드릴 거예요. 그러고 나서 차를 마시면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담 엑스의 정원에 있는 수영장은 물보다 더 파란색으로 가장자리를 칠했고 한편에 다이빙이 가능한 발판이 있어서 다이빙이 가능하다고 한다. 또 수영장 모서리에서 주기적으로 물이 한바탕 뿜어져 나와서 보는 즐거움과 물줄기에 몸을 맡길 수 있어서 더욱 재미있다는 말도 들었다. 마담 엑스는 이렇게 좋은 수영장을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했다. 나라면 결코 그런 낭비는 하지 않았을 텐데!

난데없이 나타났던 두 명의 손님이 돌아가고 나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바로 마담 엑스가 일주일에 한 번 대문을 오픈하고 수영장을 외부인에게도 개방한다는 안내문이 대문 앞에 떡하니 붙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야기는 삽시간에 마을에 퍼졌다. 마담 엑스는 왜 그렇게 좋은 수영장을 타인에게도 쓰라고 허락한 걸까? 수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수수께끼로 남았다.

후문에 의하면, 두 명의 방문객 중 한 명은 놀랍게도 수영장에서 몰래 놀고 간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함께 있던 다른 한 사람은 그날 수영장에 놀고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의 형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동생과 친구를 발견하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고 집에 데려오기 바빴다. 집에 돌아와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는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전말은 이러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수영장에 꼭 들어가 보고 싶던 아이들은 몰래 놀고 나왔다. 다행스럽게 그날 날이 더워서인지 돌아다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때마침 마담 엑스는 차를 타고 외출한 뒤였다. 아이들은 물속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그만 화장실에 갈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 별수 없이 수영장 물에 실례를 범했는데 그 순간 주변의 물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면서 몸이 떨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너무나 즐거웠던 기억이었나 보다. 남의 집 수영장인 걸 잊어버린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좋아했다고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친구 아버지에게 전하자, 함께 마담 엑스를 찾아가서 앞으로도 수영장에서 놀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보자고 하였다. 마담 엑스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으나 누구도 제대로 경험한 적 없었고 더군다나 몰래 수영장에서 놀았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무서웠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란 건, 마담 엑스가 이야기를 듣고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제 누구나 잊지 못할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됐다. 긴장과 초조함으로 마담 엑스 집을 방문했던 그날 수영장 물은 살짝 따뜻했지만, 내가 아는 여름 중 가장 푸르렀다.


추신) 이 글은 데이비드 호크니와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미니 픽션 실험글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니 픽션 시리즈는 감정에 따라 포스터 색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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