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리 로슈의 상자

희미한 흔적

by 숨은결


그곳은 아주 작았는데 거대한 인형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겉으로 보면 상자 속에 인형이 담긴 것처럼 보였다. 인형은 여러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었는데, 얼굴은 무표정했다. 보통의 인형은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유독 그 인형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인형에게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인형을 만든 사람은 어떤 이였길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얼굴을 화장기 하나 없는 분위기로 만든 건지 모르겠다. 더욱 심한 것은 인형 머리에 리본끈 하나 없는 점이었다. 대신 그 인형은 나무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빨간색 볼을 실에 꿴 채 붙잡고 있었다. 저건 대체 무엇일까?

그림을, 아니 상자를 쳐다보던 그는 점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밥을 먹는 것도 잊고 상자와 인형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앉아 있었다. 마치 인형도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 바라보는 듯했다. 인형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떻게 보일까? 행복해 보일까? 아니면 밥을 못 먹은 게 그대로 드러나서 굶주린 사람처럼 느껴질까? 이런 생각에 잠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인형이 입고 있는 드레스였다. 인형의 드레스 자락은 넓게 좌우로 잡아당긴 아코디언처럼 펼쳐져 있었다. 인형의 머리나 얼굴에 비해 드레스는 신경 써서 만든 것 같아 보였다.


뚫어져라 인형을 쳐다보던 그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며 의식이 사라져 가는 듯 느꼈는데,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서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투명한 유리벽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유리창 청소를 했었지? 저렇게 깨끗했었나? 잠시 투명하게 빛나는 듯한 유리벽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분명하게 생각나는 건, 그가 자기 침실 앞에 있던 탁자에 앉아 있었다는 정도였다. 아, 그리고 탁자에 올려놓은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그림이었는데, 누가 그렸는지 모르겠다. 침실 창문으로 비친 햇살이 그 그림을 조명처럼 환하게 비추었고,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햇살과 그림, 그리고 그림 속의 인형에 사로잡혀서 꼼짝하지 않은 채,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이것이 전부였다. 왜 그렇게나 이 그림에 끌렸던 걸까? 인형은 마치 누군가에게 붙잡혀 묶여 있었던 걸까? 그래서 상자에 갇혔을까? 생각이 방향도 없이 흘러간다.

그는 이내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여긴 내 방이 아니야.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온 곳곳에 유리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오로지 그 유리벽에 비추는 햇살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그리고 유리벽의 가장자리에는 산자락이 보였다. 걸어서 가면 금방 도착할 것만 같은 그 산자락은 꽤 거대했다.


하지만 산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고, 지금 이곳에는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오로지 그 산을 배경으로 공중에 매달린 인형과 나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하나도 예쁘거나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은 그 무표정한 인형이 그를 응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네가 와도 소용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형의 시선에 그는 숨이 막혀왔다.

갑자기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천장은 유리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늘도 아니었다. 그걸 본 그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나는 내가 바라보던 그림 속의 상자에 들어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인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뿐인데! 다시 인형의 눈으로 시선을 향하던 그는, 침실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분명 그가 그림을 응시하고 있을 때 햇살이 침실 창문으로 넘치게 흘러들어 오더니, 인형을 비추었다.


그런데 순간, 인형의 표정이 바뀌었고, 놀란 그가 숨을 들이마시는 동시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무표정한 인형의 얼굴은 순식간에 환한데 어쩐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뭇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눈을 뜬 그는 다름 아닌 인형이 사는 상자 속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공중에 매달린 인형만 존재하는 이곳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지?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영문도 모를 의문에 다시 사로잡힌 그는 점차 의식을 잃고 있었는데, 눈을 감았을 때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인형의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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