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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해영시 Dec 09. 2022

밤베르크행 기차 안에서

어느 독일 청년과의 우연하고 열띤 대화

기차에서 내리라니 이게 웬말. 


밤베르크로 가는 기차에 문제가 생겼다. 승객들은 기차에 타 앉았는데, 운전을 해야 하는 기관사가 다른 곳에 있고 도착하려면 멀었기 때문에 내려서 다른 기차를 기다렸다 타야 된다는 것이다. 철도 직원이 기차 안을 다니며 생목소리로 승객들에게 일일이 알리고 다니고 있었다. 내리세요! 내려서 도대체 어떤 기차로 가야 된다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을 하려고 그에게 묻는 순간, 앞자리에 있던 젊은 청년이 자기도 밤베르크로 간다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그와 얘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몇 개의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박사논문도 쓰고 있다고 했다. 


우리 기차가 왔다. 기차 안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밤베르크까지 1 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동안 그와의 흥미로운 대화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런 게 여행의 즐거움이지.  


전공이 시장 권력  


우리는 약 1시간 동안 꽤 많은 얘기를 쉴 새 없이 했는데,  막스와 바그너의 전시회에 대한 얘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베를린에서 열렸던 막스와 바그너에 대한 전시회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 청년은 매우 흥미 있어했다. 그는 학부 전공이 경제학이라고 했다. 그래서 혹시 막스의 자본론을 읽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내가 예전에 벼룩시장에서 1970년대 동독에서 출판된 귀한 버전의 자본론을 발견해서 사 두었는데 몇 장 읽어보지도 못하고 이사하면서 이웃에게 대뜸 줘 버린 것이 가끔 아쉽다고 덧붙였다. 그는 뷔이츠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막스를 잘 모른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 딱 한번 다뤘고 자신도 조금 읽다 말았다고 했다. 경제학과에서 자본론이 별로 존재감이 없었단다. 최근의 흐름인가 했더니, 이미 몇십 년 전부터 그랬다고 했다. 동독과 서독으로 갈린 후 체제 경쟁이 시작되었고, 동독에서 칼 막스의 이론이 지배적이었기에 오히려 서독 대학에서는 막스를 별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바로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 건물이 생각났다. 훔볼트 대학은 통일되기 전 옛 동독 지역에 속해 있었다. 건물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중앙 정면에 보이는 대리석 계단 위 커다란 벽에 금색으로 글자를 새긴 기념판이 보인다. 그 기념판에는 실천 철학이 담긴 막스의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그저 다양하게 해석만 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베를린에 와서 훔볼트 대학 건물에 들어가면 이 글귀를 소중하게 찍는 것을 봐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청년은 자기네 과에서는 주로 Marktmacht (마크트마흐트. 시장 권력)에 대해 다뤘다고 했다. 자신도 시장 권력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논문을 쓴다고 했다. 그가 다루는 주제가 요즘의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진 글로벌 시대에 너무나 필요한 것이라, 나는 „와우“ 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경제에 대해 깊이는 모르지만 전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너무나 심한 이 시대에 왠지 한 젊은이가 그런 주제로 논문을 쓴다는 게 반가웠다. 그의 논문이 시장권력을 규제하고 조정하여 뭔가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는데 작든 크든 어떻게든 기여하게 되리라는 축복의 말이 저절로 나왔다. 가끔 신문의 통계들을 보면 독일도 양극화가 심화되어 인구의 4분의 1이 상대적 가난에 놓여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채식주의자

 

또 다른 주제는 채식이었다. 시작은 아프리카의 식량난에 대한 것이었다. 최근에 새삼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아프리카 대륙에 아프리카 사람들 모두가 먹고 남을 식량이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자체에 충분한 식량에 없는 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다. 결국 아프리카 내에서의 배분의 문제였던 것, 그 어디나 그렇듯이. 새롭게 인지한 사실인지라 내 머리에 매우 강하게 남아 있었다. 


청년은 나의 말에 덧붙여 새로운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것이 또 내 눈을 더 넓게 뜨게 해 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식량을 유럽에 팔면 값을 더 비싸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럽에 수출하고, 유럽에서는 팔아도 남아돌아 많은 식량을 쓰레기로 버리고 정작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리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참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십여 년 전에도 이미 미국에서 남아도는 우유 값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그냥 바다에 버린다는 얘길 듣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면서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서구 나라들에서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고, UN의 경우엔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 현상들이 참 딱하고 갑갑해했던 기억도 났다. 


물론 이런 글로벌 단위의 시장 원리만이 아프리카 굶주림의 전체 원인은 아니다. 내전과 가뭄 등으로 인한 내부 정치문제, 자연재해 문제도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어쨌든 본질은 배분의 문제인데,  전체 아프리카 인구에게 충분한 식량이 있으면서도 모두가 배고프지 않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왜 이리 불가능한 것인지, 우리 둘은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우리는 식량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늘어난 육류 대량소비를 꼽기에 이르렀다. 사람이 바로 먹을 수 있는 곡식들이나 식물들을 육류 소비를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대량으로 먹기 때문이라는 것은 요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얘기는 당연히 곧바로 채식에 관한  얘기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은 몇 년 전부터 비건 (Vegan) 이 되었다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피타고라스가 채식주의자였던 거 알아? "  


나는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는 잠깐 기다려 보라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책을 하나 꺼내 들었다. 만화책이었다. 제목은 <동물 윤리> (Tierethik)였다. 그는 한 페이지를 펼치더니 피타고라스가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며 동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연설하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갑자기 나도 기억이 하나 새록 올라왔다. 예전에 같이 살던 독일 친구가 비건이었다. 그녀는 내가 생전 처음 직접 홍합탕을 끓이던 날, 냄비 뚜껑을 열더니 „으, 동물이잖아! “ 하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괴롭다는 듯이 부엌을 뛰쳐나갔다. 사실 그녀는 어시스트 의사였는데, 수술실에서 살을 지지는 냄새가 생각나서 윗집 사람들이 스테이크를 굽는 냄새조차 참을 수 없어했다. 


이 얘기는 우리들의 식습관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비건이 되었다고 했다. 나도 오랜 기간 육류 소비가 인류의 식량위기뿐 아니라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동물 사육 환경과도 연계된다는 정보들을 차곡차곡 접하다 보니 몇 년 전부터는 자연스럽게 고기를 거의 안 먹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건강 때문에 가끔 고민이 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는 비건이 되기 전 여러 책을 읽었는데 채식이 건강에 전혀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자신은 비타민 12 보충제 외에는 챙겨 먹는 것도 없는데 건강상태가 너무 괜찮다고 했다. 사람마다 다르기에 그의 말을 바로 일반화하기는 힘들겠지......


나는 주로 채식을 하려 하지만 1년에 몇 번 고기를 두어 점씩 먹을 때도 있다. 이번에 뉘른베르크에선 호텔에서 뉘른베르크에서 손으로 만든 듯한 진짜 소시지가 나왔을 때 며칠을 참았었는데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세 개나 먹었다. 물론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였지만. 내 평생 뉘른베르크에서 진짜 소시지 한 번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합리화하면서. 정말 감동적으로 맛있었다. 시판에 파는 소시지와는 달랐다. 아예 채식을 선언하고 단호히 먹지 않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실은 내 뒷머리엔 여전히 자연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축산업에 종사하는 축산업자들이 남아 있다. 그들의 생업은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 그래서 가끔 고기를 먹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키운 축산업자들의 고기를 찾아 먹으려 노력한다. 다행히 베를린에는 그런 곳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어짜피 1년에 몇 번 먹지 않아 그들에게 크게 도움은 안 되겠지만. 


잠시 식민지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그는 독일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부분은 참회를 했지만, 다른 예전 식민지에 대한 부분은 사과하는데 늑장을 부렸다는 것을 지적했다. 내 기억으로도 독일 정부가 말리비아(Malibia)에서의 종족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작년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래 걸렸구나 싶었다.   


한글. 세종대왕님, 자랑스러워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한글에 대한 얘기로까지 흘러 왔다. 그는 대학 때 과에 중국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고 했다. 본인도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옆 나라인 한국에 대해서도 흥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 한자와 한글의 차이점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에게 한글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한자는 형상을 추상화하고 간단화하여 만든 뜻글자인데 반해 한글은 소리의 모양을 따서 만든 소리 글자라는 것, 예전엔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대왕이 함께 만든 것이라 알려졌었는데 최근에는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거의 혼자 만든 거라고 밝혀지고 있다는 것, 아마 세종대왕이 산스크리스어를 비롯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문자들을 먼저 깊이 연구하고 만들었을 거라는 것,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고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는 것,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게 된 계기가 기가 막히다는 것, 즉 백성들이 글을 몰라 곤경을 겪는 것을 측은히 여겨 이를 해결하고자 한글을 창제하려 기획했다는 것 등등. 


한글 창제는 한국인인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어마어마한 사건이기에 한껏 신나서 설명해 주었다. 그는 매우 놀라워했다. 눈동자가 커지며 알파벳과 같냐고 묻더니, 가방을 뒤적였다. 종이와 연필을 찾아 내밀면서 한글을 써 달라는 것이다.  


자음과 모음을 써 주고 어떻게 발음 나는지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물은 뒤 한글로 써 주었다. 그는 너무나 좋아했다. 여자 친구의 이름도 써 보겠냐고 했더니 여자 친구가 너무 좋아할 거라며 써 달라고 했다. 종이에 적힌 자기 이름과 여자 친구의 이름을 번갈아 보더니 너무 예쁘다며 종이를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여자 친구에게 보여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여자 친구가 렌틸콩 스프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면서 싱글벙글했다.  

 

밤베르크 역에 도착했다. 서로 토닥토닥 포옹한 후 헤어졌다. 기차 안에서 참 즐거웠다는 말을 서로 남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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