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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Sep 24. 2023

월화 5-2

5. 언덕 너머


자동차가 저수지 옆을 지나고 있었다. 그새 내려앉은 어둠은 유령을 불러 모아 진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등등한지 세차게 뻗어나가는 전조등 불빛마저 위태로웠다.


그러나 발칙한 나의 천사는 어둠이 내려앉은 차창 밖을 바라보느라 말이 없었다. 


낯선 두려움과 긴장감 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훔쳐보았다.


도대체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의 허벅지가 왜 그토록 유혹적이었던 걸까? 아마 지금도 나는 그 아이의 허벅지를 보면 똑같은 유혹과 알 수 없는 슬픔과 애잔함에 빠져 들지 모른다.


희고 쭉 뻗은 다리의 위쪽 그 단단하고 아름다운 곡선의 손짓에 나는 울음을 터트릴 지경이었다.




느닷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지독하게 보수적인 독실한 기독교적 가정에서 자란 나는 성에 눈을 뜨면서 그러니까 수미와 경험을 한 뒤로 의처증에 시달렸다.


월화가 다른 남자를 만나 호텔을 들락거리는 걸 알면서도 쓸개 창자 다 빼놓은 것처럼 너그럽기만 했는데 수미에게는 곁눈질조차 용서가 되질 않았다.


아무 남자하고 거래하듯 잠자리를 하는 월화는 성스러웠지만 약혼녀인 수미는 성스러움으로 위장한 창녀처럼 헤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만 빼고 그녀 가까이 있는 모든 남자들을 의심했다.


게다가 수미의 첫 경험 상대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수미의 처녀성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혹은 누구에게 바쳐졌는지 알아내려고 그녀를 집요하게 추궁했고 못살게 굴었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날 밤 선교관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미를 만난 기쁨도 잠시 나는 곧 의심의 구렁텅이에 빠져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미치광이처럼 수미를 추궁하고 괴롭혔다.


나 역시도 힘들어서 미칠 지경이어서 멈추려고 했지만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날 수미는 나를 만나면서 몇 번 자위를 했던 적이 있다고, 그때 뭔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고백하면서 수치스러운 듯 오열했다.


나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그리웠고 자신도 모르게 자위를 하곤 했다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는 아무런 대상도 없이, 그러니까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도 없었는데,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새벽에 자취방을 나와 슬리퍼를 끌고 청량리까지 걸어가서 화대를 지불하고 나이 많은 창녀에게 동정을 바쳤다.


그리고 맨발로 뛰어나와 어두컴컴한 골목에 서서 엉엉 울었다.


수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수미를 껴안고 통곡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동정이 너무도 하찮게 버려졌다. 순결과 동정을 고귀하게 여기던 시절의 오류 혹은 우발적 사건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약한 지성이었고 내 정서적 결핍이 심각했다.




이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듯  같은 또 다른 일화를 이쯤에서 적어두어야 할 것 같다. 그곳 저수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사건인데 다시 언급할 기회가 없으리라는 판단도 선 탓이다.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그 사람의 장례식행렬뿐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청년회 회장이 들려준 것이다.  

  

그날 나는 교회 종탑 아래 서서 꽃상여를 앞세운 장례 행렬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꽃상여였고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짐작컨데 그날은 수요일이었고 그날 밤, 수요예배 후 청년회장이 선교관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낮에 본 꽃상여에 대해 내가 관심을 보이자 들려준 망자의 이야기이다.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던 아가씨가 실연을 당하고는 이곳까지 와서 저수지에 몸을 던졌는데 마침 율오리 노총각이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뛰어들어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그녀를 살려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낭만적이고 영웅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청년회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죽고자 했던 여자. 그러나 죽지 못한 여자. 그 여자가 노총각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당신 것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그뿐 아니었다. 평생을 당신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금석맹약도 서슴없이 했고 아직 나이 어린 도시 처녀가 호미 들고 밭 매는 농사일도 산골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는 금방 잊히는 법인지 아니면 은혜가 원망으로 바뀐 것인지. 얼마 못 가서 여자는 자기 목숨을 살려준 남편을 홀대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산골에서는 못 살겠다는 불평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 사람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전답을 모두 처분해서 도시로 떠났다. 그자의 전답은 모두 청년회 회장의 아버지가 사 들였단다.


도시에서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이 업종을 바꿔대던 여자는 결국 시장에다 순대 국밥집을 차렸다. 밥도 팔고 술도 팔다 보니 아내는 장돌뱅이 남자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사내는 자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도 못 본 척 자리를 피해 주며 그럭저럭 살았다. 세 아이들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임질에 걸려서 병원에 갔다. 아내하고 잔적 밖에 없었지만 아내 탓이라고 원망하지 않았다. 그냥 임질만 치료하러 갔는데 지나치게 친절했던 의사가 사내에게 무정자증이라는 것까지 알려줬다. 그사람 의뢰하지도 않은 검사비용까지 들이고 충격에 빠졌다. 아이들마저 딴 사내놈 씨라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를 붙들고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결국 그 사람은 옥상에 올라가서 아내가 순대집 앞에 걸어놓은 솥을 열고 국밥을 말고 있을 때를 기다렸다가 거꾸로 다이빙하듯 쑤셔 박혔다.


그것이 그 사람의 복수였을까요! 청년회장의 질문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난들 어찌 알겠는가.  


대강 이런 이야기지만 나는 뭔가 표리부동함과 삶의 부조리에 충격을 받았다. 마치 나와 수미의 고귀한 동정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 캐내기처럼 말이다.




- 무슨 생각해!


- 선생님이랑 했어?


그 아이는 내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 어린것이 별 걸 다 묻네. 그게 니가 할 질문이냐?


나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문득 율오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내가 한심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리고 치졸하지만 여태껏 어린것한테 농락당한 기분도 들었다.


수미의 등장이 준 선물일지 몰랐다. 수미는 미의 여신을 고뇌에 빠트렸고 나를 구속에서 해방시켰다. 덕택에 나는 올바른 선택을, 아니 미의 유혹을 뿌리칠 결심으로 단호해졌다.


다시 말해 그 순간 나는 월화와 끝내려고 마음먹었다. 하긴 월화의 알 몸, 그 신비롭고 충격적인 아름다움과 마주친 적이 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월화가 나를 일방적으로 자기라 불렀고 나도 마치 그 아이의 연인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미가 선교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더 이상 그 아이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설혹 있다고 해도 멈춰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겨우 열다섯이라는 게 확실해졌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 아이가 열다섯이라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혹은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더는 아니었다.


그 아이를 잘못 상대했다가는 크게 망신을 당하거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쳤다.


- 뭐, 어린 거. 열일곱 살이 어리냐. 병신아.


그 아이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어른이 되어서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어리다는 말은 듣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분노를 촉발하는 불쏘시개 같은 거였을지 몰랐다.


- 너, 열다섯이잖아? 기껏해야 열여섯이겠지.


나는 그 아이의 화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더 약 올리고 싶었다.


- 열일곱이라니까, 나이 처먹은 게 뭐 자랑이라고 지랄이냐, 개새끼야.


-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다 말을 함부로 지껄여. 내려.


나는 브레이크를 밟고 내려서 월회를 끌어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아이를 껴안고 싶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넘겼다.  


- 놔, 미친놈아. 똥차 타고 니는 주제에.


월화가 손을 뿌리치고 내리며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이게 어디다.


나는 월화의 따귀를 갈겼다.  순간 월화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치다 길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태연한 척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나는 차에 오르지 못하고 길아래를 내려다봤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수지 수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 월화야.


소리쳐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작가님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늘 건강조심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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