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3km.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엄마가 있는 곳의 물리적인 거리다. 숫자로는 쉽게 쓸 수 있지만 실제로 엄마와 나 사이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을까. 엄마는 단 한 번도 한국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데, 나는 꽤 많은 도시를 여행했다. 나는 서유럽에 살고, 예술을 공부했고, 교육을 받을 기회가 충분했고, 남들보다 문화적으로 더 많이 누리는 위치에 있으며, 심지어 내 일을 지지해주고 요리와 살림을 살뜰하게 하는 애인까지 있다. 엄마의 삶에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을 테지만 지금의 나와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엄마는 오빠가 가장 먼저 교육받을 기회를 얻는 게 당연한 시대에서 자랐고, 서른 살 무렵엔 이미 결혼 못 하는 늙은 여자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엄마는 그 당시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결혼과 출산을 늦게 한 편인데 주변에서 많은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모든 걸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나를 성공한 여성으로 키우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했다. 엄마는 내가 어딜 가서도 리더의 자리에 있기를 바랐고, 여성이라서 할 수 없다는 말 따위는 적어도 엄마에게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늘 여성으로서 외모를 신경 써야 한다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똑똑한 것뿐만이 아니라 외모까지 완벽해야 했다. 살이 찌는 것도, 얼굴에 작은 뾰루지 하나도 용납되지 않았다. 내가 항상 예쁜 외모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에는 '여자니까'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영화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를 보면, 주인공인 흑인 여성의 곱슬머리를 감추기 위해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매일 머리를 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완벽한 외모에 집착하는 게 지겨워져서 홧김에 삭발을 해버리는데 그걸 보고 어머니가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물론 코미디 영화다. 나도 스무 살이 된 후 충동적으로 머리를 아주 짧게 잘라버린 적이 있다. 물론 그건 영화는 아니었다.
올여름에 3년 만에 한국에 가게 되었는데, 인천 공항에서 달려온 내 얼굴을 보자마자 엄마의 온갖 지적이 시작됐다.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좀 늘어난 주근깨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았었는데, 엄마는 내 기미와 주근깨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속상하다는 듯 울상이었다. 옷차림도 하나하나 문제가 됐는데, 유럽에서는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입고 다녔던 옷이 단순히 가슴 부분이 파였다는 이유로 엄마가 과하게 화를 냈다. 노발대발하는 엄마 때문에 결국은 집에 가서 옷을 다시 갈아입고 나와야 할 정도였다. 더워 죽겠어서 입은 건데 등이 좀 보이는 옷마저도 못마땅해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유럽에서 입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한국에선 안돼.', '네가 그 옷을 입는 거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의 몸을 쳐다보는 게 싫어.' 엄마가 말한 이유를 솔직히 이해할 수는 있었다. 엄마가 내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해결 방법이 내가 그 옷을 안 입는 거라는 것에 내가 절대 동의를 못 해서 문제인 거지. 내가 공격받지 않고 자유롭게 옷을 입을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다. 사회가 그런 말을 멈추거나, 내가 그런 옷을 입지 않거나. 아마 엄마는 후자를 선택한 것 같다. 세상이 그런 말을 그만둘 리가 없다고 체념했기 때문에 혹은 계속 그런 말을 듣다 보니 그게 왜 잘못된 건지도 잊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그게 엄마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말에 화가 나다가도 이내 슬퍼졌다. 엄마의 엄마가, 그 엄마의 엄마도 들었을 말을 내가 또 듣고 있으니까.
옷차림, 외모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결혼, 연애 이야기까지 엄마와 내게는 한 세대의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는 기분이다. 무책임한 아빠와의 결혼 생활, 이혼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엄마가 '그래도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게 큰 행복'이라는 말을 할 때면 모순적이면서도 슬프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나쁜 건 엄마가 내게 요구하는 기준 때문에 나도 모르게 강박을 느끼고 그 잣대를 스스로 들이밀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자유로워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사실 지금도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느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도 다른 여성들에게 여성 혐오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진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부분이 계속 고민돼서 여러 자료나 책등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엄마와 여성혐오를 연결 짓는 걸 꺼리는 듯했다. 엄마는 무조건 희생적이고 모성애로 가득 차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성 또한 여성혐오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불편하다고 해서 그걸 일어나지 않는 일로 치부한다면 바뀌는 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엄마를 탓하거나 원망하고 싶진 않다. 오히려 엄마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순응하고 맞춰 살아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여성 혐오를 재생산할 수도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여성 혐오적인 사회의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누구보다 성공적인 여성이 되기를 바란 것도 본인이 여성으로서 겪었던 멸시와 서러움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서라는 것도 안다. 엄마의 모든 말들이 나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하지만 어떤 사랑이 내게 온전한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조금 못된 딸이 되더라도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난 엄마가 원하는 여성이 되어줄 수 없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또, 내 딸도 나처럼 여성이라는 사실을 한계로 느끼며 살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