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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Dec 10. 2023

아홉 살 모로를 그리며


어느 날 문득 그 아이를 떠올렸다.

 손을 흔들며 웃어주던 곱슬머리의 아이를.


이유도 없이 그 아이를 떠올렸을 때, 어떤 연유로 나의 대뇌 피질이 오래된 기억 서랍을 새삼스레 다시 열어 보이는의아했지만 곧 그런 궁금증과는 별개로 그 무렵의 그와 나, 그 교실 풍경, 그때 그 기찻길에 관한 상념 마음이 말랑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허공으로 전부 바스라지기 전에 서툰 글이나마 그날장면들을 옮겨 적기로 결심했다.




모로. 아홉 살 그 아이의 이름은 모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하나밖에 못봤다. 그래서 지금껏 모로라는 그 아이를 세월이 지나도 많이 침식하지 않고 온전히 간직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나이가 마흔이니 아홉 살 적 기억들이라 해봤자 대부분이 드문드문 떠오르는 파편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얼마 안되는 아득하고 빛바랜 파편들 중 유독 모로와 관련한 장면들만 그렇게 또렷한 컬러감으로 회상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 아이를 꽤나 진정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


그러니까 모로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아이였다. 아홉 살의 내가 아무리 조숙했다 한들 고작 생후 8년 만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스스로도 왜곡된 기억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여러 번 다시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좋아하는 감정이 맞았다. 나는 주 잊다가도 몇 년에 한 번씩은 이렇게 맥락 없이 그를 떠올렸는데 그때마다 어쩐지 모로에 대한 회상은 갈수록 아름답고 애틋하윤색되었다.




금의 아홉 살들과 달리 삼십 년 전의  많은 아홉 살들은 부모 도움 없이도 혼자서 먼 거리를 걸어 등하교를 다. 벌이 가정인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등굣길은 아빠나 엄마가 출근길에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셨지만 하굣길은 언제나 나 혼자서 집에까지 걸어가야 했다. 때로는 귀찮은 하루살이 떼가 들러붙고 때로는 새로 산 구두가 진흙길에 엉망으로 젖어들어도 그때는 그런 게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홉 살의 여자 아이매일 무서움과 쓸쓸함을 꾹 참아내며 한적한 기찻길을 따라 20분을 걸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교를 할 때 까만 곱슬머리의 아이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의 딱 중간 그애의 집이 있었다. 학교 뒤편에 길게 뻗은 철길을 건너면 주택가가 보이고 그중 화사한 장미가 담 위로 피어있는 벽돌집이 나오면 아이는 그때까지 나와 걸음을 맞춰 천천히 걷던 것을 멈추고 후다닥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그곳이 아이의 집인 모양이었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사라지는 그애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후로 나 혼자 적적하게 걸어가야  길이 너무 길다고 느껴졌다.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 채로 내일도 이 길에서 그 아이를 만나기를 기대했다.


하굣길에서 우리는 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애가 내 앞에 가면 그냥 그의 뒤통수를 대놓고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러면 안심이 되고 좋았다. 반면에 내가 앞서는 날에는 왠지 뒤통수가 따갑고 뒤가 궁금해졌다. 때때로 고개를 돌려 그의 운동화가 아직도  따라는지 슬쩍 확인하곤 했다. 그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고개를 돌리며 나를 의식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야, 침이! 집에 가냐?"


그제서야 그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낯익던 형체가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모로인 걸 깨달은 순간, 나는 눈물이 나올만큼 그애가 반갑고 좋아져버렸다. 그때부터였다. 모로가 내 머릿속에서 분명히 살아 숨쉬게 된 건.




로는 1학년 4남자아이 중에서 가장 키가 컸다. 그래서 여자 중에서 가장 키가 컸던 나의 짝꿍이 됐다. 곱슬머리에 웃을 때면 눈이 몹시 가늘어지던 그 애는 장난기가 많았다. 새침한 여자애였던 내게 수시로 장난을 치고 괴롭게 굴었다. 1학년의 나는 그 애를 많이 싫어했다. 어느날 나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고 그애는 담임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날 그애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진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어느날은 내가 책상 가운데에 선을 그었다. 그애의 팔꿈치, 손가락, 연필 같은 것이 선을 넘어오면 모로의 등을 퍽퍽 소리가  정도로 세게 때렸다. 걔는 맞으면서도 좋다고 웃었다. 일부러 조심성 없게 선을 넘어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더 화가 났다. 그후에 어떻게 됐더라... 기억의 파편이 드문드문...


그러다가 2학년이 되고 반이 떨어지면서 그제야 그애가 좀 괜찮아졌다. 복도 모로마주치면 나는 전히 데면데면하게 굴었지만, 그애 늘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나는 벽돌집 그 아이가 모로인 것을 확인한 날부터 매일 하교를 할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모로와 함께 걷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그날도 모로의 뒤통수는 집이 보이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날도 나는 잠시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았고. 

모로가 집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모로가 말했다.


"백침이! 가라. 내일 또 보자!"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서 환하게 웃으며 열심히 손을 흔드는 모로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은 내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었다. 나도 만큼은 처음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부끄러워서 이번에는 내가 그의 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달음박질 치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모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엄마가 말해주기를 그애가 미국인가 어딘가로 이민을 갔다고 다. 뻔하고 흔한 드라마 클리셰 같지만 그건 정말 충격적인 실이었다. 아홉 살의 나는  애가 잠시 아프거나 어딜 다녀오느라 학교에 못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나라로 영영 가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건 마치 그애가 갑자기 수증기처럼 증발했다거나 달나라로 이사를 갔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후로 한동안 그 애를 떠올리면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했다. 아홉 살도 그런 기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후 삼십 년이 더 지났다. 거기 있던 철로가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가 살던 동네도 몰라보게 변했다. 모로의 근사한 벽돌집도 어느새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는 3층짜리  건물이 올라갔다.  


아홉 살의 수줍던 여자아이는 지금은 딱 그때의 모로같은 개구쟁이 아홉 살 아들을 키운다. 오늘 모로가 머리에서 튀어나온 건 나의 아들에게서 의 햇살 같은 웃음을 발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모로의 다음 출현 시기는 장담할 수 없다. 그에게는 다 잊었다 싶은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깜짝 등장하는 짓궂은 취미가 있으니까. 


그래도 그가  귀여운 아홉 살 소년 그대로  안 어딘가에 살아간다는 사실은 나를 꽤 즐겁게 한다. 실제의 모로가 머나먼 다른 나라에서 중년의 일상을 보낼 때, 나만의 모로는 아름다운 벽돌집에서 쉬다가 심심할 때면 다시 창문을 열어젖히고 힘차게 손을 흔들어 올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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