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스며들어 한 그루가 된다는 것

- 폭풍우 속에서도 곁을 지키는 사랑에 대하여

by 노란 잠수함

휴대전화 진동과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지인이 여행지에서 찍어 보낸,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뒤엉켜 자라는 ‘연리목(連理木)’ 사진이었다. 사진 속 안내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에 비유해 사랑나무라고도 부른다.’


처음엔 그저 신기한 풍경으로 넘겼지만, 다시 보니 배경이 되어준 두 나무의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팽나무와 아까시나무였다. 팽나무는 바닷가 포구에서 잘 자라 ‘포구나무’로 불리며,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낭만적인 나무다. 반면 아까시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억척같이 뿌리를 내리고, 가시를 품은 채 달콤한 꿀을 만들어내는 생활력 강한 나무다. 바다를 동경하는 팽나무가 이상주의자라면, 척박한 현실을 개척하는 아까시나무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같달까. 성격도, 자라온 환경도 판이한 두 나무가 도대체 어떤 시간을 견뎠기에 한 몸이 되었을까.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거대한 배가 차가운 대서양으로 침몰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고요한 두 장면을 비춘다. 하나는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공포를 달래주는 어머니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차오르는 침대 위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나란히 누운 노부부의 모습이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그들은 놀라울 만큼 평온하다. 생의 마지막 호흡을 사랑하는 이의 체온과 함께한다는 것. 그 숭고한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묵직한 잔상으로 남았다.


그 장면은 며칠 전 비 내리던 출근길, 차창 밖 풍경과도 겹쳐졌다. 장대비가 쏟아져 시야가 흐릿한 거리, 우산 하나에 의지해 걷고 있는 중년의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낡은 배낭을 메고 있었고, 여자는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고 있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지팡이가 되어 묵묵히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거센 비바람에 우산이 휘청거려도 맞잡은 두 손은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거리 위에 뿌리내린 한 그루의 연리목처럼 보였다.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폭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한 몸. 말없이 건네는 손길, 서로의 속도에 맞춰 나아가는 걸음. 그것이야말로 꾸며내지 않은 삶의 가장 진실한 풍경이 아닐까.


지인이 보내준 연리목 사진을 다시 확대해 본다. 이질적인 두 나무는 어떤 고단한 과정을 거쳐 한 몸이 되었을까. 태풍이 몰아치던 밤에는 서로의 줄기를 붙잡아주었을 테고, 가지가 찢길 듯 폭설이 내리던 날에는 서로에게 기대어 체온을 나누었으리라.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짓무르는 고통을 견디며, 두 나무는 서로에게 수액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둘은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생의 가장 큰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비바람이 몰아칠 때 도망가지 않고, 서로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고 단단한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서로 다른 팽나무와 아까시나무, 영화 속 노부부, 그리고 빗속의 두 사람. 이 모든 풍경은 결국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스며들어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끝까지,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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