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뒷산에 오른다. 산행이라 하기엔 멋쩍은, 산어귀부터 산꼭대기까지 삼십 분이면 족히 걸어 오를 수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등산로를 따라 십 분가량 올라가면 작은 정자가 나온다. 그곳에서 등성이를 타고 정상을 향해 걷노라면 산자락에 걸쳐진, 둘레길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는데 경사가 꽤 급한 편이지만 등성이에서 둘레길까지의 거리는 오 분 남짓 걸어 내려가면 될 만큼 짧다. 나는 둘레길을 걷기 위해 이 길을 자주 이용한다.
그런데 이 길에서 여러 번 마주친 여자가 있다. 주말 오전 열 시 안팎으로 산에 오르곤 하는데 그녀와 나의 산행 습관이 비슷한 듯하다. 그녀는 언제나 등산복치곤 다소 길이가 긴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주홍빛 등산화를 신고 있다. 늘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보라색 바탕에 은색 별무늬가 그려진 배낭을 멘다. 토시며 머리끈도 매번 그 빛깔 그 모양이다. 그렇게 항상 같은 차림새로 산기슭에서 등성이 바로 앞까지 왕복 십여 분 되는 거리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참으로 성실하고 한결같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지만 모르긴 해도 두세 시간은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한 데는 그녀에게 그렇게 하고도 남을 만한 결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이 길을 고집하는 이유를 어림쳐 보았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서린 곳이기 때문일 것이라거나 불가에서는 번뇌를 씻어내기 위해 삼천배를 한다는데 그런 연유로 삼천 번을 오르내리려 작정한 것은 아닐는지. 그도 아니면 어느 돌팔이 무속인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치성(致誠)인가 하는 억측 따위였다.
나는 그런 그녀가 측은했다. 만일 그녀가 이 길을 빠져나가 등성이에 올라선다면 솔향기 스민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힐 수 있고, 덤으로 바다색 하늘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길에서 벗어나 둘레길을 걷는다면 선선한 그늘을 펼쳐주는, 마음씨가 그만인 팽나무를 만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하얀 숭어리보다 향기가 더욱 기막힌 아까시나무를 마주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운이 좋으면 쇠딱따구리의 절창(絶唱)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뿔싸, 지난번 산행에서 그녀의 산행 방식과 내 삶의 모습이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항상 같은 곳을 오르내리는 그녀처럼 나도 삶의 이런저런 짐을 어깨에 메고 산어귀에 들어서듯 아침마다 출근을 한다. 그리고 매일 정해진 산길을 오르듯 어제와 같은 오전을 보낸다. 그런 다음 열두 시 전후로 점심을 먹고 나면 슬슬 하산을 시작해 그제와 같은 일을 하다가 산자락을 밟아 내려오듯 퇴근을 하는 것이다. 이런 하루하루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그녀의 산행 방식과 내 삶이 그야말로 닮은꼴 아닌가.
둘레길을 걷다 말고 팽나무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순환 열차처럼 살아온 삶을 되짚었다. 인생이라는 악보에 도돌이표를 그려 넣고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반복하듯 살아온 삶이었다. 때로는 권태로운 일상이 지루했고 단조로운 생활에 지쳐 맥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家長)으로서 식솔들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반복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지닌 것들의 숙명이다. 수컷 극락조는 암컷의 사랑을 얻기까지 현란한 춤을 되풀이한다. 짝짓기를 마친 바다거북 암컷도 해안가 모래사장에 산란을 반복한다. 가을 나무 역시해마다 마른 잎을 떨어내 이듬해 새잎이 돋아날 자리를 채비하지 않던가. 그지없이 단순하고 답답한 시간들을 참아 내며 반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인 줄을 그제야 알게 됐다. 그렇다면산행 중에 만났던 그녀는 일찌감치 '반복적인 삶'의 이치에 통달한 도인(道人)이 아닐까?
예전에 아무 곳에서나 느닷없이 나타나 ‘도(道)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땐 답을 몰라 손사래 쳤지만이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물론입니다. 도(道)란 반복적인 삶을 충실히 수행(遂行)하는 것이지요.’라고 시원하게 답하겠다. 그가 이 답을 듣게 된다면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