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가 말했다. “세상은 명백한 사실들로 가득하건만 아무도 관찰할 생각을 안 한다네.” 뛰어난 상상력과 추리력을 지닌 세기의 명탐정이 된 셜록 홈즈의 능력은 바로 ‘관찰’이었다. 살다 보면 증거가 불확실한 이론을 내놓는 사람들을 만나고는 한다. 사실을 이론에 맞추어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다면 증거는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관심과 관찰에서 나온다.
일상을 관심을 가지고 자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의 중요성을 알지만 너무 바쁜 탓인지, 아니면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탓인지. 눈에 보이는 것조차 그냥 지나쳐 버릴 때가 많다. 지금의 교육은 ‘창의적 상상력을 지닌 아이들’에 맞추어져 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전문서적을 읽는다. 물론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의적 상상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운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답을 가지고 있지만, 정답인지 모르는 현실
사람의 상상력이 지극히 ‘평범한 관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자꾸 잊어버리는 것인지. ‘무엇인가 분명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정형화된 모범답안은 비슷한 문제에 비슷한 대답을 낳는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가 부족해서 일을 못 하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쉽고 빠르게 정보를 찾고, 해결한다. 또한, 너무 많은 자극의 노출은 우리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잊어버리게 한다. ‘더 오래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빨리 생각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얻은 것만큼 잃어가고 있는 것은 ‘깊게 사유하고 관찰하는 능력’은 아닐까? 얼마 전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조카와 함께 공원에 산책을 갔다.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조카가 넘어지지는 않는지 유심히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걷기에 얼마나 불편한지’를 느끼며 공원의 산책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나는 혼자서 다시 그 공원에 나가보았다. 다들 건강하고 튼튼한 다리로 걷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고 있는데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이 유모차를 지팡이 삼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르신이 걷기에는 너무 불편한 길이었다.
‘공원을 산책하는 길조차 친절하지 못함’에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비단, 공원뿐만이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누군가에게는 매우 친절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극히 적대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탈 때도 어르신은 젊은이보다 천천히 걷는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좋을 텐데 바로 떠나버리는 기사님을 뵐 때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외치고 싶어 진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설마 대중교통을 이용하실 때 저런 일을 경험하시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가끔 한 번씩 고향에 내려갈 때면 유난히 더 작게만 느껴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 때가 많다.
누군가를 자세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청각의 한계가 바로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는다.”라고 했던 니체의 말이 정말 ‘옳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의 한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한계에 대해 깊게 고민해 봐야 한다.
오늘 내가 지나친 길에서
마주했던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한 풍경 속에 우주가 있다.
뛰어난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고 싶다면 일상 속에서부터 작은 일부터 관찰해 보자! 그러다 보면, 그 안에 담긴 진실과 진심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