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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an 31. 2023

나는 나한테 좀 소홀한 사람이 좋다

나이 든 여자의 알바 이야기 / 잊지 못할 고객

그녀는 정수기 고객이었다. 처음엔 아주 힘든 고객이었다. 정수기 점검을 하러 가야 하는데 통 약속을 잡아 주지 않았다. 항상 바빴다. 지방도 왔다 갔다 했고 강의며, 방송이며 스케줄이 차서 집에서 나를 기다릴 시간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방 갔다가 언제 올라오니까 그때쯤 전화하라고 해서 그때 전화하면 또다시 바쁘니까 한 달 후에 다시 전화 달라고 했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끌었다. 겨우 약속을 잡아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 갔을 때 그녀가 말했다.

"정수기 점검하러 저희 집에 관리자가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나는 내가 너무 집요하게 전화를 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렇게 처음 대면한 이후, 다행히 그녀는 어떻게든 약속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무심하게 타인을 쳐다보는 부잣집 부인이었다. 하지만 한 번씩 방문할 때마다 그런 인상은 한 꺼풀씩 벗겨졌고 어느 날부터 그녀는 조금 슬프고 피곤한 중년 여성으로 보였다. 그녀와 나 사이는 그만큼 허물이 없어졌다. 그녀는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나중에 나의 자식들이 독립하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나면 자기 집에 와서 같이 살자는 말도 했다. 나한테는 그렇게 살가웠지만 당시 그녀의 집에 오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집에 오는 게 싫다고 했다.


한때 그녀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었다고 했다. 나를 집에 들어오게 한 그즈음에는 우울증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저녁이면 우울증으로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술을 마시고 정신이 풀어지고 나서야 조금 견딜 만하다고 했다. 매일밤 약을 먹어야 잠이 들었다. 우리 둘은 가끔 저녁에 그녀의 집에서 술을 마셨다. 밤 열한 시가 넘어 그녀의 남편이 들어올 때까지 시간도 잊은 채 술을 마시다가 황급히 그 집을 나오곤 했었다.


정수기의 수입이 그리 좋지 않아서 내가 정수기 일을 그만두고 청소 일을 할 때 그녀는 나에게 카빙 데코레이션을 추천했다. 그녀는 카빙 데코레이션 분야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카빙을 시작한 지 2년뿐이 안되었는데도 그런 수준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나도 금방 배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는 그녀에게 카빙을 배웠고 수박 카빙과 과일 플레이팅 마스터 자격증까지 땄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수년간은 더 열심히 배워야 그녀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고 수입도 오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나는 당장 생활비가 걱정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만큼 빠른 성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가 카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했다. 가느다란 손목에서 시작된 그녀의 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손가락은 가늘고 아주 하얗다. 자세히 보면 관절들이 조금씩 불거져 있다. 조각도를 잡고 카빙을 하는 그녀의 손을 볼 때면 그녀의 손가락들이 칼날과 함께 낭창낭창 휘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쥐고 있는 조각도의 칼날 밑에서 호박 껍질이나 수박 껍질, 당근, 스티로폼들이 꽃으로, 강아지로, 독수리로 슥슥슥 완성돼 가는 걸 보다 보면 그녀의 손가락들이 마치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건 예술가의 손가락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떡 케이크도 배우기 시작했다. 앙금꽃을 배우면서 동시에 나에게 가르쳤다. 나는 처음엔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역시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배우고 밤낮으로 혼자 연습을 하더니 어느 날부터 완성품을 나에게 보여 주는데 내가 인터넷에서 본 어떤 떡케이크보다 화려하고 정교하고 창의적인 작품이었다.


그녀는 그 케이크들을 가끔 팔았다. 하나당 이십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녀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손재주와 창의력만이 아니었다. 카빙에서도 그랬지만 떡케이크를 배울 때도 최고를 향한 집념과 집중력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그녀는 많이 아픈 사람이었다. 10년간 항암 치료를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약을 끊었다고 했다.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온몸에 식중독과 같은 반점이 일어나면서 가렵고 쓰렸다. 눈은 한쪽은 녹내장으로 고통받고 있고 매일 인공 눈물로 산다. 그런데도 때로 눈이 깜깜해질 정도로 눈을 혹사하곤 했다. 카빙을 할 때도 그녀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는 나는 경탄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손목이 너무 아파서 수시로 손을 털곤 했다. 


아픈 몸으로 어떻게 작품 연습을 그렇게 치열하게 할 수 있는지, 그 강인한 정신력이 부러웠다.


나는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집념이 부러웠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격을 피곤해 하는 듯했다. 어느 날 내가 '나는 나 자신을 몰아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자 그 말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메모를 했다. 그 말이 그녀의 마음에 닿은 또다른 이유는 어쩌면 우울증으로 자신의 불안한 마음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너무 예민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음이 선천적으로 여리고 착해서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녀는 특히 그래 보였다.


그녀는 키우던 강아지를 하늘나라에 보냈는데 그로부터 두 달간을 눈물로 지냈었다. 그 시절 몸도 많이 허약해져서 하루하루를 극도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보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내가 차로 병원에 데려가야 할까 봐 매일 전화를 했다. 다행히 또 다른 강아지를 한 마리 들이고 나서 조금씩 회복했었다.


그녀의 얘기들을 들어보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한테 지나칠 정도로 잘했다. 마치 친 형제처럼 애정을 보이고 아낌없이 베푸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하다가 상대방이 매몰차게 떠나가거나 배반을 하면 한없이 절망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한테 너무 실망을 많이 해서 새로 사람 사귀는 걸 두려워할 정도였다.


그런 경험이 있는데도 그녀는 또 나한테 지나치게 잘했다. 갈 때마다 자기 집에 있는 물건들, 음식들을 이것저것 내놓고 다 가져가라고 했다. 집안 청소 한번 해주고 다른 집 청소의 배가 되는 돈을 주길래 한참을 싸워서 겨우 깎아 받았다. 그녀는 나의 어려운 처지를 그렇게라도 돕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누군가 나에게 과도하게 베푸는 것이 부담스럽다. 나도 상대방에게 그만큼 노동을 제공하거나, 밑반찬이라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정신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나 자신이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처지이다 보니 그런 게 아마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 나는 예전부터 나한테 좀 소홀한 사람이 좋았다. 30년간 영업을 해왔기 때문에 남한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혼을 바치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성의를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너무 친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 나는 좀 불안해진다. 일 때문이든, 단순한 친목관계이든 처음에는 좀 서먹서먹하다가 10년 이상 꾸준히 만나다 보니 서로 여러 가지 알게 되어 편안해진 사람그런 사람이 좋다. 경조사가 있으면 서로 고민 없이 부를 수 있지만안 불러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이가 좋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서로 좀 소홀한 사이가 좋다.


어느 날 그녀는 그녀를 실망시킨 누군가에 대해 고백하며 또다시 서러워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매정한 어투로 말했다.

"동생은 너무 헤퍼요. 나중에 배신당해도 서럽지 않을 만큼만 해줬어야죠. 나한테도 지나치게 많이 퍼주잖아요. 서로 오래 가려면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실컷 베풀고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그건 아니죠."


그녀는 너무 놀라서 거의 울 것 같았다. 그다음 날부터 한참 동안 그녀는 나에게 연락을 안 했다. 아마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몇 달 후 내가 연락을 하고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단 하나의 선물만 주면서 말했다.

"헤프다는 소리를 할까 봐 안 줄라고 했어요."


지금도 나는 그녀에게 정말 미안하다. 마음이 유독 여린 그녀에게는 내가 쓴 용어가 너무 심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사실, 후회가 되진 않는다. 그 말을 안 했으면 그녀는 계속 이것저것 내가 갈 때마다 뭔가를 챙겨 주었을 것이고 나는 매번 심정적으로 피곤함을 느꼈을 것이다.


10년 전쯤 친구 두 명과 시나리오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들은 내가 첫 직장에서 만난 동기들이었다. 나로서는 사회에 나온 이후의 베스트프렌드로 꼽는 친구들이었다. 당시 내가 쓴 소설 하나를 갖고 시나리오로 각색하기 위해 품평회를 했는데 한 친구가 매 씬마다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나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진행돼야 하는지 거듭 설명을 했다. 그 친구가 어느 순간 짜증이 난 듯 말했다.

"왜 그렇게 자꾸 변명을 해요?"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순간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그 친구들과 절교를 하고 싶었다. 몇 달간 혼자 그 순간을 곱씹곤 했다. 그때마다 그날의 욱한 마음이 되살아났지만 동시에 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어느 날 그때의 욱한 마음이 사라지고 창피함도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비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비판들을 겸허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나의 바보 같은 행동을 멈추게 해 준 강렬한 목소리들이 있다. 내 친구의 비판 한 마디도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다. 그 억양까지 고스란히 뇌에 각인돼 있으면서 항상 나를 각성하게 한다. 정수기 동생에게도 내 말이 그런 목소리로 기억됐으면 한다. 그래서 후회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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