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나면 모두 꿈속으로
러쉬에는 향은 같지만 이름이 다르게 출시된 제품들이 몇 가지 있다. 팬지와 올리브 브랜치. 사쿠라와 럽럽럽. 원스 어폰 어 타임과 쏘화이트.
그리고 슬리피와 트와일라잇.
라벤더와 통카가 뒤섞인 향이 똑같이 나지만 바디 로션과 샤워 젤에서는 슬리피라 불리고, 바디 스프레이와 배쓰밤에서는 트와일라잇이 된다.
두 이름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했다.
형용사와 명사.
졸음과 황혼.
아, 졸음은 잠의 시작이고 황혼은 밤의 시작이지.
졸음 속 황혼을 지나 밤의 시간은 길게 일렁인다.
트와일라잇에 사용되는 라벤더는 숙면에 좋은 향으로 유명하다. 나는 라벤더 향을 맡아도 잠이 잘 오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대신 다른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한층 괜찮아진다는 거.
환절기마다 무릎을 쑤셔대는 정체 모를 통증도, 나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기억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던 하루도 일단 자고 나면 괜찮아졌다. 그 아픔들도, 아파했던 나도 다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고등학생 때는 잠이 많이 부족했다. 아주 가느다란 빛과 소음에도 예민한 나는 4인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푹 잠든 적이 하루도 없었다. 랜덤으로 배정된 룸메이트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들로 만나왔지만 생활 소음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볼펜을 딸깍이는 소리, 옷장을 여닫는 소리, 이불을 펄럭이며 뒤척이는 소리까지.
그래서 나는 자주 식사를 거르고 그 시간에 잠을 잤다. 저녁시간에는 기숙사에 잠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면학 시작 전에 깨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실 완전히 잠 속으로 파묻히지는 못했다. 그저 눈을 감고 생각을 비우며 누워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피로가 녹아 나오는 기분이었다.
트와일라잇에서 통카 향을 처음 맡았을 때 아 이거, 하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너무도 익숙한데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향이었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번뜩 메모장을 켜서 한 마디를 적었다. 로투스 향. 나에게 통카 향은 로투스 향이었다.
계피향이 나며 설탕 알갱이가 씹히는 얇고 바삭한 비스킷. 로투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 중 하나였다. 언젠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지 한 친구는 내 생일날에도 선물 위에 그 과자를 두 통 얹어주었고, 내가 밥을 거르는 날에는 종종 그 과자를 사다 주었다. 학교 내 편의점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위치에 진열되어 있는 로투스를 골라 가끔 쪽지도 덧붙여 가면서.
그런 날이면 기숙사로 들어가 로투스를 머리맡 책상 위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내 잠은 늘 한밤중을 향하지 못하고 저녁과 밤의 경계에서 아슬하게 휘청였다.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깨어날 수 있는 상태로. 말하자면 황혼. 황혼처럼 어스름한 잠. 결국 잠이 빛이 보이는 쪽으로 넘어지면 나는 몸을 일으켜 로투스 몇 개를 베어 먹은 뒤 면학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니까 그때 나를 어떻게든 살게 한 건 교과서에 나오는 5대 영양소가 아니라 로투스 과자의 설탕 알갱이였다.
기숙사는 나에게 고등학교 생활 중 가장 부피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싫은 이유 한 스푼에 좋은 시간 두 스푼 정도로. 잠을 못 자서 괴롭긴 했지만, 결국 내 브런치 연재의 시작이 기숙사에서 몰래 먹은 떡볶이였던 것처럼.
한 학기마다 룸메이트들이 바뀌며 흥미로웠던 건 방마다 인사법이 다 달랐다는 점이다. 언젠가의 방에서는 나와 룸메이트 한 명의 기상 시간이 비슷했는데, 외출 준비는 늘 내가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나머지 두 명의 룸메이트들은 아직 잠들어 있는 사이, 그 친구는 먼저 방문을 열며 쏟아지는 불빛과 함께 인사를 했다.
다녀올게.
나는 고데기로 앞머리를 쓸다가 그 말이 들려오면 옷장 옆으로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이따 봐, 라고 대답하곤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 어감을 좋아했던 것 같다. 인사 끝에는 방문이 닫히며 다시 어두운 적막이 찾아왔지만, 남겨졌다는 쓸쓸함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형태는 제각각이었지만 어떤 방에서든 아침에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반면 잠들기 전에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남아있는 공부나 과제량에 따라 수면시간이 불규칙했고, 자신이 언제 잠드는지 조차 알아채지 못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방에 몸을 누인 첫날, 모두가 자리에 누워 불을 끈 시간에 건너편 침대에서 룸메이트가 낮게 읊조린 한 마디를 아직도 기억한다.
잘 자, 좋은 꿈 꿔.
평범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인사말. 나는 그제서야 아주 어릴 적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잘 때 이후로는 한 번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색함을 숨기며 너도 잘 자, 라고 속삭이고 책상 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 같은 학교지만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그때의 룸메이트와는 그렇게 친해졌다. 그 애는 그런 인사말들에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트와일라잇과 슬리피라는 이름으로 뒤섞인 여러 제품들 중 나는 바디 로션을 가장 좋아한다. 보라색 크림을 손가락으로 조금 떠 올리면 달달함과 향긋함이 뒤섞이며 약간 멍해진다.
그러니까 이제 나에게는 책장 넘기는 소리나 스탠드 불빛이 흘러오지 않는다. 골격이 작은 나에게도 꽉 맞던 작은 침대가 아닌 내 방의 내 침대에서 잘 수 있다. 그렇지만 잘 자라는 인사말과 머리맡의 로투스 과자도 없다. 나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걸까.
이제 내 잠은 황혼에 오래 머물지 않고 한밤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뒤죽박죽 부유하는 기억들 사이에는 가장 따가운 시간을 흘려보낸다. 밤이 이불처럼 덮어줄 테니까. 일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