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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Oct 04. 2022

그럼에도 너를 사랑해

MUE(원인불명의 뇌수막염) 질환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그것은 재앙일 것임에 틀림없다.

나의 가치관, 나의 생활 습관, 나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가고 껍데기만 남은 상태.

더 이상 내가 아닌 나를 바라보아야 하는 사랑했던 가족들과 친구들.


  "스틸 앨리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아내, 그리고 저명한 학자이자 대학 교수로 살아오던 앨리스가 조기 발병 성 알츠하이머에 걸리면서 기억을 잃어가는 내용이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뇌의 변화가 앨리스의 소중한 추억들을 하나씩 앗아가는 와중에도 스스로를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담기면서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앨리스의 주변 인물들의 아픔에 주목했다. 총명하기 그지없던 아내가 화장실이 어디인지를 찾지 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바지에 오줌을 싸고 서 있는 모습을 봐야 했던 남편,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마치고 내려와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엄마가 자신에게 모르는 배우에게 대하듯 예의를 갖춘 칭찬을 늘어놓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딸.


  뇌에 발생하는 질환은 통증과의 싸움이라기보다 한 생명의 존엄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그 안에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똘망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눈이 구슬처럼 까맣고 윤기 나는 것이 어찌나 똘망똘망해 보이던지. 품에 쏘옥 들어올 정도의 크기에 옅은 갈색의 아주 잘 관리된 털을 가진 치와와 똘망이는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싫은 처치를 할 때에는 여지없이 물려고 하는 새침한 아가씨였다.


  똘망이가 병원을 찾아온 이유는 경련이었다. 경련이 한번 시작되면 혀가 파랗게 되고 입에 거품을 물며 온몸이 강직되는 등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증상을 보였고, 검사 결과 뇌 안에 염증이 발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명은 MUE(Meningoencephalitis of unknown origin : 원인불명의 뇌수막염). 이 질환은 진단과 함께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고 치료 과정 또한 처참할 수 있어, 수의사로서 웬만하면 만나기 싫은 질환이다.


  심지어 똘망이는 병세가 아주 빠르고 재발이 자주 나타났다. 온갖 약물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경련은 자주 재발했고,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지친 데다가 약물의 부작용까지 겪으며 토실토실 앙증맞던 몸매는 팔다리는 앙상하고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온 데다 털은 거칠거칠하고 관자놀이 뼈가 툭 불거진 안타까운 외모로 변하였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 성격이랄 게 남아있는지 모르겠는 상황에 직면했다. 언제나 눈을 빛내며 싫은 주사를 들이대면 물고 화를 내던 아이가 이제는 온몸을 내어준 채 멍하니 하늘만 응시하게 되었고, 깔끔쟁이 성격이라 소변을 보고는 몸이 묻을까 봐 반드시 입원장 구석으로 피해있던 아이가 이제는 소변 위에 누워있게 되었다. 질환 말기에는 하루 종일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증상이 심해져,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바닥에 피가 날 때까지 걷다 지쳐 쓰러져 잠들고 다시 깨면 또다시 목적 없이 걷는 증상이 반복되었다.





  똘망이의 보호자분은 예쁘장하게 생긴 40대 정도로 추정되는 여자분이었다. 화장품 가게를 하고 계시다는 그분은 하루에 7번에 걸쳐 먹여야 하는 약을 하루도 빠짐없이 스케줄대로 먹이셨고 약을 먹이기 위해 가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셨다.

  경련 중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똘망이를 위해 하루 종일 그 아이를 바라보고 계셨고 어디에 부딪히거나 다치지나 않을지 보살피셨다.

  

  불러도 반응이 없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주어야 먹고 하루 종일 정처 없이 걷기만 하는 똘망이는 더 이상 똘망이가 아니었을지 모르나, 보호자분은 그 아이의 빛나던 시절을 기억하고 끝없이 사랑하셨다.


  스틸 앨리스 영화 속, 앨리스의 딸 리디아는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거처를 먼 곳에서부터 옮겨온 뒤 엄마를 돌보기 시작한다. 자신 스스로조차 잊어가는 한 사람을 끝까지 기억하고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똘망이의 보호자분이 바로 이런 분이었다. 비록 그 아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여도, 나를 반기고 나에게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여도 끝까지. 그렇게.





  똘망이는 점차 더 쇄약 해져갔고 이제 정말 끝이 오려나 보다 하던 어느 날, 출근 준비를 하려던 차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똘망이 사망해서 보호자분 와 계십니다."
  병원에 도착해보니, 보호자분께서는 똘망이를 담요에 곱게 싸서 안고 꽃같이 앉아계셨다. 남겨진 보호자분의 창백한 얼굴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똘망이는 치료 전반부에 장기 기부에 동의를 하셨고, 똘망이가 죽으면 뇌를 적출하여 육안적, 병리적 검사를 통해 확진을 하고 앞으로의 학술 발전에 기여해 주시기로 서약서를 쓰셨다.

  그래서 나는 그날 똘망이의 뇌를 적출해야 했다.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적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눈으로 보게 된 똘망이의 뇌. 정말 말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었던 끔찍한 질환의 흔적을 보며 나는 똘망이와 보호자분을 언제까지고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이 아이가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

  그럼에도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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