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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Oct 10. 2022

별 것 아닌 진료는 없다

사소함에서 원칙을 찾다



  동물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와 가장 먼저 진료다운 진료를 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어린아이들 예방접종 진료나, 간단한 심장사상충 예방 진료이다. 언급해야 하는 내용이 비교적 간단하고 환자들이 건강한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라 초보자가 보기에 적합하고 실수가 적은 진료이기 때문이다. 

  나도 초보 수의사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진료를 봐왔으니, 대충 계산을 해봐도 족히 천 건은 넘는 예방진료를 해왔을 것이다. 너무 자주 보다 보니,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하고 하는 처치도 동일한 단순한 진료에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나 피곤한 날에는 이렇게 똑같은 말을 계속할 바에는 녹음기를 틀어놓는 것은 어떨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들 때가 잇다. 


  저 연차 수의사 시기에는 이런 가벼운 예방 진료들이 참 쉽게 느껴졌었다. 정해져 있는 얘기만 해주면 되고 처치가 간단해서 진료가 빠르고 쉽게 끝났고, 빨리 이 진료를 끝내 놓고 더 많이 아픈 아이 진료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차를 더해가며 수의사는 동물 환자들 뿐만 아니라 보호자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아주 간단한 진료도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간다. 




  보호자의 마음을 이해하다


  어느 날, 로비에 보호자 한분이 눈물 콧물 흘리며 울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응급 상황인가 싶어 허겁지겁 로비로 뛰어나가 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발톱이 꺾여 피가 나고 있고,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자 보호자분은 수건으로 피 나는 발을 받치고 사색이 되어 울면서 서계셨다. 

  강아지 발톱이 꺾이면 피가 엄청 많이 나는데, 사실 위급한 상황은 아니다. 부러진 발톱을 깎거나, 많이 꺾여 있으면 뽑아주고 지혈만 충분히 해주면 별 문제가 아닌데, 보호자분이 보시기에는 피가 많이 나니까 너무 무서우셨던 것이다. 솔직히 나에겐 비교적 간단한 진료였지만 보호자분이 너무 놀라고 무서워하고 계셨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아이가 아프지 않게 처치해줄 수 있는 마취, 진정 옵션까지 찬찬히 설명드리고 사실 이게 엄청 무서운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켜드리며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얘가 워낙 미친 듯이 활발해서 혼자 뛰다가 이렇게 됐지 뭐예요."

  보호자분은 이내 웃으시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 되셨고, 아이가 최대한 안 아플 수 있도록 진정제 투약 후 처치를 진행해달라고 하셨다. 강아지는 아프다고 나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 피를 튀기며 몸부림을 치다가 진정제 투약 후 잠잠해졌고, 발톱 한 개를 뽑혔다. 아주 간단하게 상황은 정리되었다. 

  이렇듯 병원에서 일하며 늘 이런 일을 겪는 나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솔직히 발톱이 이미 거의 다 빠져버린 상황에서는 진정, 마취까지 하지 않더라도 순식간에 해결해버릴 수도 있는 5분 컷의 진료를, 30분이 넘는 시간에 걸쳐 본 이유는 보호자분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강아지 입장에서도 마취 하에 안 아프게 처치를 받았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예방접종 진료는 어려워


  아기 동물들의 예방접종 진료를 들어가면, 참 다양한 보호자분들을 만난다. 분양소에서 밥은 조금만 주라고 했다며 사료를 티스푼으로 2숟가락만 퍼서 몇 주째 주고 있다는 분도 계시고 빗질이라는 것을 해야 되는지도 몰라서 강아지가 눈앞이 안 보이게 털이 엉켜 있는데도 그냥 원래 그렇게 생긴 애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다. 믿기 어렵겠지만 발톱을 깎아줘야 되는지를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다. 

  이런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보호자분들의 교육이 적시에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반려 동물들은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하고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들은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존재라, 보호자 교육의 중요성을 매번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기초접종은 어린 동물들의 면역력 증강을 위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꼭 진행해주어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나, 진료 행위 자체는 주사 한 두대로 끝나기 때문에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이 간단한 진료 행위 뒤에 보호자분의 인식 변화와 기본 지식 함양이라는 더 큰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 페이지를 빌어, 반려 동물을 데려오게 되신 보호자분들은 여러 정보매체를 이용하여 내가 이 꼬마를 위해 어떤 것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간단하게라도 꼭 공부하시길 바란다. 보다가 모르는 것은 수의사에게 질문! 언제든지 도와드려요~)




  간단한 진료라도 검사는 꼼꼼하게!


  예방접종 다음으로 병원에 많이 오는 진료는 무엇일까? 단연 귀, 피부 질환이다. 피부에 조그맣게 뭐가 났다거나 털이 빠졌다고 오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귀를 턴다, 긁는다, 빨갛다 등의 증상을 가지고 내원해주시는 분이 매우 많다. 어떨 때는 아주 작은 뾰루지 하나만 나도 데리고 오셔서 이게 왜 난 거냐고 정확한 원인을 따져 물으시는 통에 울컥해져서 나도 모르겠다고 뚱하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피부 질환 또한 쉽게 봐서는 안된다. 나도 처음에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만 진단하고 치료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보는 전형적인 증상을 아는 것만으로 진료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질환 초기에 병소는 아주 작고 전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하얀 털이 엄청 풍성해서 까만 눈이 단추 구멍같이 작아 보이고 다리는 짤막하고 배는 토실토실한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아기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접종을 하기 위해 병원에 왔다. 외모는 너무 귀여운데 성격은 아기 특유의 활발함이 없고 어딘가 우울해 보였는데, 이제 막 분양받아 오신 터라, 아직 환경 적응이 안 되어서 우울한가 보다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료 구매를 위해 잠깐 병원에 들으신 보호자분께서 애기가 자꾸 긁는데 개들은 원래 그런 거죠? 하신다. 어느 정도나 심하게 긁느냐고 했더니 털이 뽑힐 정도로 뜯으면서 긁는다고 하신다. 

  엥? 그건 좀 이상한데? 얼른 데려와 보시라고 해서 봤더니 며칠 전에만 해도 보이지 않던 피부병 부위가 빽빽하게 풍성한 털 사이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전신 털을 빡빡 밀고 검사를 진행했더니 현미경 상에서 옴 진드기가 아주 징그럽게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보호자분께서는 옴 진드기의 세상에서 제일 징그러운 모습에 충격을 받으셨다. 

  "사람한테도 옮으니까 침대에서 같이 주무시거나 하진 마세요."

  사람한테도 옮는다는 말에 더욱 충격을 받으시고는 이걸 어쩌냐는 말을 백번 정도 하시는 것 같더니 주의사항을 단단히 듣고 귀가하셨다. 

  필요한 약을 먹고 다음번에 재진을 온 그 아기 강아지는 예전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고 진료대 위에서 너무 심하게 뛰어다녀서 떨어질까 무서울 정도의 성격을 되찾았다. 

  어찌나 미안했는지...

  그동안 가려워서 우울했던 거였구나. 첫날 진료를 봤을 때, 풍성한 털 아래 숨어있던 작은 병변을 발견했다면 좀 더 일찍 건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워낙 작고 안 보이는 병변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라고 위안하다가도 아무래도 너무 미안했다. 




  가벼운 진료는 없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같은 일을 오래 할수록 그것은 좀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간단한 일이나 습관처럼 하게 된 일들에서 놓칠 수 있는 만에 하나를 발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벼운 진료는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놓치기 쉬운 원칙이 있고, 간과하기 쉬운 보호자의 마음이 있다. 이 모두를 보듬을 수 있는 수의사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본 진료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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