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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an 10. 2024

계획 대로 되지 않는 행복한(?) 여행 (2)

[여행] 제주 (애월, 올레 7코스, 한라산) 1/2~1/4

  지금은 새벽 6시. 여기는 한라산 관음사 주차장. (데자뷰 아님)

어제 몸이 너무 피곤했는지, 갑자기 일찍 잠자리에 드니 몸이 반항을 하는 건지, 결국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3시간도 제대로 못 잔 채, 한라산으로 차를 몰고 떠났다.

근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분명 등산 시작이 6시부터라 주차된 차와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단 한대의 차도 없고 사람도 안 보인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고, 혼자 이 어두운 산으로 들어가는 건 무서워서 사람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기로 하고 차에 앉아있었다.




  눈을 떴다. (갑자기 왜 눈을 떠?)

한 시간이 지난 7시였다. 차에서 잠이 들어버린 거다.

갑자기 잠이 든 것도 우습지만 새벽 7시인데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건 더 이상했다.

이젠 더 기다릴 순 없고, 혼자라도 나가봐야지!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맞습니다. 이상합니다. 네...)


  덕유산 백련사는, 등산로 입구에서 어느 정도 올라가야 나오는, 등산로 중간에 있는 절이다.

나는 관음사도, 한라산의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는 절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새벽 7시에 관음사 절에서 등산스틱을 들고 방황하고 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여기가 등산로 입구가 아닌가? 내가 잘못 온 걸까?'

(잘못 온 게 맞지 그럼 아니겠니? 왜 의심조차 하지 않고 헤매고 있었는지...)

의도치 않게 관음사를 샅샅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시던 남자분이 나를 부른다.

누가 봐도 등산하러 온 거 같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 딱해 보이셨나 보다.

  "어디 가세요?"

  "등산로가 여기서 연결되는 게 아닌가 봐요? 못 찾겠어요! ㅠㅠ"

  "타세요. 데려다 드릴게요."

('뭐 이런 저세상 똥멍충이가 다 있어?'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지만.... 워낙 선한 인상의 분이셔서 얼굴에 티가 나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내가 내비게이션으로 찍은 곳은 '관음사 주차장', 실제로 가야 하는 곳은 '관음사지구탐방지원센터'.

둘 사이는 1km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나는 엉뚱한 곳에 차를 대놓고 잠까지 잔 것이다.

아저씨는 알고 보니 관음사 관리자분이셨고, 나에게 진짜 등산로 입구를 보여주시고, 다시 관음사 주차장에 내려다 주셨다. 차 몰고 지원센터까지 가라고 해주시는데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린 뒤 내렸다.

여행을 하다 보면 꼭 이렇게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푸는 분들이 있다. 똥멍충이의 마음이 참 따수워진다.

그리고 '넌 어쩜 이렇게 바보 같니?'라는 자책을 딱 10번 정도하고 마음을 풀기로 한다. (자신에게 관대한 편)




이렇게 금쪽같은 새벽시간 1시간 반을 허공에 날려버리고 7시 30분에 드디어 등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눈덮린 한라산 등산 시작!!


눈 덮인 한라산은 초반부터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시작하더니 고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더 예뻐졌다.

세계자연유산인 국립공원의 위용을 뽐내며 아주 잘 가꾸어지고 정돈된 등산로가 가지런히 지나가고 있었고, 많이 내린 눈으로, 길과 길이 아닌 곳 모두가 온통 하얀색이었다.

얼마 전에 혼자 갔다가 죽을 뻔했던 한계령-오색 코스의 설악산이 울끈이 불끈이 상남자 스타일이었다면, 한라산은 그야말로 곱게 단장한 아가씨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설산의 풍경을 보며 걸으면 힘도 들지 않을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힘들어 죽을 뻔했다. 특히 삼각봉대피소를 넘어서 정상까지 1시간 40분 정도 더 가야 하는데, 그 길에서는 그 누구도 속도를 내지 못한다. 아주 건장해 보이는 남자분들도 거의 다 비슷한 상태이다.


눈이 쌓여 계단이 보이지않는 길


아이젠을 찬 신발은 무겁지, 바닥은 눈 때문에 미끄러운데 푹푹 빠지지...

'이제 거의 정상인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한 시간 정도 하는 동안 정상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내 뒤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이젠 정상 좀 보고 싶다!!!"라고 울부짖는 바람이 혼자 폭풍공감을 하며 웃어버렸다.


눈,서리 폭탄맞은 불쌍한(?) 나무들


  이제 더는 못 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눈앞이 갑자기 더욱 환해지며 정상이 나타났는데,

눈 덮인 백록담을 보자마자 입 밖으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정말.. 태어나길 잘한 것 같다.. 이런 풍경을 보게 되다니...'

산 아래쪽으로 깔린 운해는 어떻고... 이렇게 예쁜 운해는 처음이다. 곱고 일정하게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렸는데, 아무도 아직 밟지 않은 눈이 하늘에 쌓여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장관을 뒤로하고 내려가려니 아쉬웠지만 우리 새침한 한라산 아가씨는

'내가 예쁜 건 알겠는데 그렇게 빤히 오래 쳐다보지는 말아 줄래?'라고 하는 듯이 차가운 바람을 계속 불어댔고, 가만히 서서 경관만 보고 있자니 몸이 얼어서 다시 내려가야만 했다. (시간도 빠듯했고..)




  나는 앞서 설악산 다녀온 이야기를 쓴 글에서도 언급했듯, 내려갈 땐 굼벵이 같은 속도이다.

발목이 꺾일까 봐, 미끄러질까 봐 무서워서 움찔거리면서 내려가느라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번 한라산 정상 근처에서의 길은 눈이 아주 폭신폭신하게 쌓여있어서 넘어져도 눈 위에 엉덩방아를 찧는 수준의 타격만 있을 것 같아서 겁이 덜 났다.

그래도 속도가 빠르진 못했다. 그냥 눈 길 위의 굼벵이.

내려올 때 내내 움찔거리지만 않았어도 훨씬 빨리 내려갔겠지만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하산을 마치고 나니, 총 8시간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대피소에 짐을 나르는 듯 보이는 미니기차(?) 몰래 타고 내려오고 싶었다.


  이번 한라산의 설경은, 그간의 내 산행 이력 중 최고에 꼽히는 경관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겨울산을 제대로 보려면 날씨를 정말 잘 만나야 하는데, 이번 산행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돌아와서 나의 제주 여행에 대해 지인들에게 얘기했더니 모두들 "그건 여행이 아니라 극기훈련인데??"라고 한다.

  하긴.. 올레길 걷고 한라산 등산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맛집 하나 제대로 못 찾아다니고, 이틀연속 새벽 3시에 일어나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니.. 극기훈련이 맞긴 하다.

  그래도 극기 훈련같았던 이 여행이 얼마나 내 기억에 오래 남을지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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