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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ul 20. 2024

24.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아~

2024. 3. 23. 숙소의 필요충분조건

  "남미 여행인데 위험하거나 힘들었던 적 없었어요?"

내가 남미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주변 지인들이 항상 묻는 질문 중 하나다.

그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날은 바로 이날이다. 새벽 1시에 모기에게 내몰려 음산한 골목을 떠돌던 날.


  낮에도 음산하게 느껴졌던 이 골목은 밤에는 더욱 무섭게 변하였다.

불량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불안한 태도로 수상쩍은 걸 피워대며 삼삼오오 무리 지어 있기도 했고, 바지를 반쯤 벗고 뭔가를 들여다보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부랑자를 멀찍이서 보고 피하기도 했다. 괜히 작고 만만한 동양인 여자를 만나면 시비를 붙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휴대폰 구글맵만 뚫어져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속도로 걸었다.

  나보다 걸음이 느린 온이는 심지어 나를 뒤따라오느라 뛰어야 했다는 후문이...

(아마, 초고속 카메라로 찍었으면 내 발 2개가 모두 공중에 떠 있는 순간이 분명 있었을 거다. ㅋㅋㅋ)

'Lo siento(미안해)... 온이... 숙소를 빨리 찾아야 된다는 생각 말고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었어...'ㅋㅋㅋ


  진짜 죽으란 법만은 없다. 두 번째로 드른 3성급 호스텔이 문을 열어두었고 남는 방이 있었다. 방 상태 따위는 묻지 않고 그냥 덥석 여기서 묵기로 한다. 모기만 없으면 돼. 모기만.

방에 들어가 보니 싱글침대보다 약간 큰 수준의 침대 한 개만 덩그러니 있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여인숙 수준의 방이었지만, 부랑자들이 있는 거리에 다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 우리는 만족하기로 했다.

좁디좁은 화장실에서 (바닥에 뭘 떨어뜨려서 주우려면 머리가 벽에 닿을 정도였음) 겨우 샤워만 마치고 누우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완전 똑바로 누우면 서로 안닿고 잘 수 있음 ㅋㅋㅋㅋ




  아니, 방 청결 상태가 안 좋았던 건 눈감아주더라도, 이건 너무하다. 어떻게 해야 모기가 수백 마리가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런 방을 사진만 그럴듯하게 찍어 올린 ABNB 주인장이 괘씸했다.

이미 ABNB 고객센터에 연락을 취하고 모기가 몰려다니며 날아다니는 끔찍한 방 상태를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동영상을 본 고객센터에서는 군말 없이 호스트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전액 환불해 주겠다고 하였고, 금일 묵은 숙소의 금액이 이미 낸 금액의 하루치 숙박료보다 높을 시, 차액 보상도 고려해 본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로까지 뛰쳐나가서 5성급 호텔에 묵을걸!!! 억울 ㅠㅠ)

  그래, 눈이 있으면, 그 동영상을 보고도 그곳에서 그냥 자란 소리는 못하겠지. 환불을 해준다기에 조금 안심은 되었지만 호스텔의 나쁜 상태와, 한껏 예민해진 내 신경상태와, ABNB 고객센터와의 늘어지는 대화가 (반응이 매우 느렸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번 답장이 오는 수준) 모두 복합되어, 나는 거의 잠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온이는 이 와중에 잘 잤다. 부러운 녀석...)




  이날은 믿기 어렵겠지만 아침에 이과수에서 숙소 정전으로 시작된 하루로, 하루가 정말 이렇게까지 길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어차피 못 자는 잠... 밤에 새로운 ABNB를 찾아내어 예약 완료하고, 그쪽 호스트에 메시지까지 보내두었다. 모기는 없냐고 묻고 체크인 방법과 시간에 대해 문의하였다. 불굴의 한국인!! 아침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 모기소굴에 두고 온 짐을 빛의 속도로 챙긴 다음 치안이 좀 더 낫다는 팔레르모 지역의 새 숙소로 향했다.


 새로운 숙소 바로 옆 카페에서 체크인시간까지 기다리다가 드디어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난 하룻밤 사이에 거의 할머니의 몰골로 변하였다. (온이가 자꾸 날 보고 웃는다 젠장...ㅡㅡ;;;;)

볼이 쏙 들어가고 다크서클이 이렇게 진하게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보았다. ㅋㅋㅋㅋㅋ 해탈....

정말 이 정도면 누구에게 썰을 풀어도 재미진 에피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나 남미 여행 가서 고생 좀 해봤다고 이야기하기에 손색없지 않은가!


체크인 기다리며 초코케익으로 심난함을 달래는 할머니...




  심신이 쇠약해진 우리는, 오늘은 다른 계획들을 모두 접어두고, 팔레르모 지역만 좀 돌아보며 구경하기로 했다.

Vive cafe라는 카페에서 flat white를 마셨는데! 오오오!!! 아르헨티나에서 먹은 커피 중 베스트! 드디어 찾았어 맛있는 커피!! 커피 한잔에 기분 좋아진 우리는 토요일이라 다소 북적이는 거리를 다시 신나게 걷는다.

한국의 가로수길과 비슷하다는 이곳은, 옷가게와 편집샵이 많이 늘어서 있고, 주말이라 벼룩시장까지 열려 있는데, 힙하다는 온 동네 젊은 사람들이 죄다 몰려나온 듯 노천카페와 음식점들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다.


Cafe vive~! 플랫화이트 짱!!
벼룩 시장에서 빠질 수 없지! 길거리 공연가들


길거리 자판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늘어놓고 파는데, 살만한 물건들은 전혀 없었지만 쓸데없는 물건을 구경하며 목적 없이 그냥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들의 평범한 삶 속에 내가 들어와 슬쩍 살펴보는 듯한 느낌.

  그들은 삶이 여유롭지 않아 보였지만 마음이 팍팍해 보이지는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모두 웃어주었고, 물건을 안 살 것 같아 보여도 여지없이 친절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못해도, 본인이 영어를 못하는걸 오히려 미안해했고, 최대한 이해하고 도와주려 했다.


  Chori라고 하는 초리판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예쁘고 깔끔하게 꾸며놓은 패스트푸드점 같은 그곳에서 초리판을 먹으며, 이과수 자판에서 동그란 의자에 앉아 먹던 초리판이 생각났다. 야외 그릴에서 거칠게 구워내던 초리판과 온 얼굴이 주름지게 웃으시던 주인장 할머니. 여행 중에 여행을 추억하다니... 왠지 쫌 멋진데? ㅎㅎㅎㅎㅎ


예쁜 노란 인테리어의 Chori


  아이스크림까지 단디 사 먹은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아아~~~ 맨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깨끗한 바닥에 모기 없는 숙소라니~~ 이게 행복이었구나!!!

점점 바라는 게 적어지는 여행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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