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인식하는 삶
기본적으로 나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민, 주권, 영토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가? 일단 주권은 신에게 있을 테다. 그렇다면 영토는 어디일까? 알 수 없다.
신은 우주만물을 창조했다. 그러니 신은 우주보다 더 큰 개념이다. 그러니 천국은 사람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의 인식 수준은 우주를 인식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의 백성은 누구인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만 천국백성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또한 인식 수준의 한계 때문이다. 즉 저 먼 우주에 또 다른 신의 형상이 있는지 우주를 초월한 또 다른 세계에 누군가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사람이 발붙이고 있는 땅이 천국에 속해있고, 나 자신이 천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첫 번째는 상상력이다. 즉 "사람은 무엇인가?", "이 세계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같은 질문과 상상을 통해 사람은 이 세계가 창조세계라고 상상하게 되었다는 거다. 두 번째는 배움이다. 먼저 산 사람들의 상상이 후대에 전해지고, 후대는 배움을 통해 천국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후대가 선대의 상상을 배우기만 할까? 배움을 토대로 또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신과 천국에 대한 이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변하고 확장된다. 배움에 상상을 더하는 방식으로 사람의 인식은 확장되어 온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이 세계와 신에 대해 또 사람에 대해 확정하듯 말한다면 이는 정말 교만하고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와 창조세계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사람은 늘 배움에 열려있고, 스스로 질문하고 상상을 확장해 나가야 하는 존재이다.
천국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천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천국은 더 확장된 개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배움을 통해 천국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을 어떤 나라로 배우는가. 앞서 우리는 천국의 영토와 백성이 인식할 수 없는 개념임을 알아봤다. 그러나 사람은 아는 만큼 인식하고 그 인식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의 주권은 무엇인가? 천국의 주권은 신에게 있고 이는 신만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신의 통치가 곧 신의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총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생명을 살리는 사랑을 경험할 때 신의 통치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고 해서 다 신의 사랑을 인식할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예수가 사마리아에서 배척당한 후 사마리아를 직접적으로 거치지 않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길을 가다가 어떤 마을에 들어갔다. 그런데 저 멀리서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불렀다. 왜 그랬을까? 낫고 싶은 마음,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했고, 그들은 가던 중에 몸이 나은 것을 알게 된다.
그중 한 사람이 이를 확인하고 큰 소리로 신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를 본 예수는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구원을 선포했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병이 낫고 제사장에게 이를 보여 건강한 사회 구성원의 자격이 회복된 것은 신의 사랑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여길 수 있고, 어떤 이는 필요할 때만 신을 찾다가 그렇지 않을 땐 신경 쓰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신의 사랑과 신의 통치 즉, 신의 나라의 도래라고 믿는 사람은 어떨까? 신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생명충만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사람이 있다. 감사하지 않은가? 자식을 낳았다. 감사하지 않은가?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서 재밌게 놀았다. 감사하지 않은가? 배우고 싶은 걸 배우고, 먹고 싶은 걸 먹는다. 감사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감사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감사하며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마리아인만 감사하였다는 건 불신자만 감사하고 신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신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인가, 스스로 신자임을 나타내는 사람인가.
천국을 인식하며 산다는 건 감사를 누리며 사는 삶일 수 있다. "부족한 게 뭐가 있어서 그러냐. 감사한 줄 알라."라는 식의 억지 감사가 아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생명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아차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신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은 잔혹하다. 노아의 때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 같다. 그런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신의 통치를 거부한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의심하고,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 생명을 살리지도, 살아나지도 못한다. 그러나 어떤 세상이든 신의 사랑을 인식하고 감사하며 신께 영광 돌리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천국은 쟁취하는 자들의 것이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