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와 용서(17:1-10)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할 것인가

by 나무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정상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정상궤도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죽을 수도 있다. 어떤 길은 발을 헛디디면 좀 놀랐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어떤 길은 발을 헛디디는 순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죄를 짓는 건 정상궤도를 이탈하는 일이기에 때로는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는 완전히 궤도를 이탈해 죽음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라는 건 어떤 도덕을 어기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걸 죄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상궤도란 무엇일까? 이는 성경이 사람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을 신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즉 사람은 누구나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신의 형상답게, 곧 존엄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존엄하게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성경은 자유, 사랑, 믿음, 소망, 감사, 기쁨 등 사람이 생명 충만하게 살 수 있는 개념을 보여준다. 반대로 생명을 죽이는 행위, 곧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을 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존엄을 훼손하는 건 무엇인가? 무시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생각과 말은 존엄을 훼손시킨다. 즉 신의 형상을 신의 형상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그만큼 존엄이 훼손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뭘 할 줄 알겠니."라는 말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그러니 이런 말들은 당연히 죄에 속해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말을 나 자신에게 한다면 어떨까?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아니야, 내가 어떻게 저런 걸 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면 당연히 자유롭고 생명 충만한 삶을 살기 어렵다. 그러니 이런 생각 또한 죄의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 그런 말로 나의 존엄을 훼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는 경고하라고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그건 나의 존엄을 훼손하는 말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 말을 무시한다면 어떨까? 그런 경우에는 일일이 대응하기가 힘들다. 물론 더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이 있겠지만, 할 수 있다면 거리를 두는 게 지혜롭다. 언젠가 다시 서로의 존엄을 세워주는 관계로 만나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상대가 용서를 구한다면 어떤가? 예수는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상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한다. 이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겐 한계를 두지 말고, 계속 용서해 주라는 거다. 도대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을 어떻게 계속 용서하라는 걸까?


반복된 용서를 위해서는 사람이 왜 진심으로 회개하고도 또 같은 죄를 반복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사람은 왜 존엄을 훼손하는 일을 하는 걸까? 즉 "네가 뭘 제대로 하겠냐."와 같은 말을 어디서 배워서 하게 되냐는 거다. 사람의 행동과 말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즉 그런 말을 일상적으로 듣다 보면 습관적으로 그런 말을 뱉게 된다는 거다.


그런데 그 사람이 친구의 경고를 통해 그 말이 존엄을 훼손하는 안 좋은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십 년도 된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어려운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엄을 훼손하는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이 잘못된 죄의 습관을 바꾸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자꾸 자기의 가치를 낮춰보고 스스로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청소년이 설교 한 번 듣고 '아 그러면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간의 잘못된 생각에 대해 회개한 후 스스로 사랑하고 자신을 존엄하게 여겨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하자. 그런다고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뀌게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만약 회개하고 자기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친구가 집에 돌아가 습관적으로 자기의 존엄을 훼손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어떤 반응이 생길 수 있을까? '아, 진짜. 또 그런 생각 하네. 난 진짜 왜 이러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이 친구의 마음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괴로워질 수 있다. 즉 오히려 정상궤도로 돌아와 존엄을 회복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나 여유를 갖고 '이제 시작인데 뭘. 회개하고 다시 나를 사랑하려고 해 보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떤가? 아직 갈 길이 멀기에 큰 티가 나지는 않을 수 있더라도 분명 존엄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고는 말할 수 있을 거다.


타인을 용서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이 오랫동안 궤도를 이탈했다면 돌아오기까지의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런데 "왜 회개해 놓고 똑같은 잘못을 해?"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또 속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아도 '그래, 일곱까지는 용서하라고 했으니까'하는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어떤가? 오히려 존엄을 회복하는 게 어려워질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또한 그렇게 내가 용서해 준다는 마음으로 반복된 용서를 한다면 용서하는 자는 자기의 공을 생각하게 될 수 있다. 즉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 기도하고 애쓰고 용서하고 격려해서 네가 조금 회복된 거야.'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상황을 이해하고 여유를 갖고 죄에 대해 분명히 경고하는 태도, 또 용기를 내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태도를 보인다는 건 결국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넉넉한 마음은 결국 자기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즉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미 그 자체로 보상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니 오래 걸리더라도 잘못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에 대해 용서하는 일에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도록 해보자. 우리의 인생에 있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만큼 복된 일이 또 있을까? 사람이 사람답게, 신의 형상이 신의 형상답게, 존엄한 존재가 존엄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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