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구렁텅이(16:10-31)

내 문 앞에 형제에게

by 나무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계층화가 이루어지고,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증가할 수 있다. 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면 범죄율도 올라갈 수 있다. 교육의 불평등은 빈부격차를 더 공고히 만들고, 보건 의료 혜택의 격차가 커지면 건강에도 격차가 벌어진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점점 불만이 높아지고, 정치적 혼란이 증가하고 극단적 정치세력이 등장할 가능성도 높아질 거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빈부격차가 점점 심화해 왔다는 점이다. 신분제도가 있었던 때보다 민주주의 이후에 빈부격차는 훨씬 심해졌다. 왜 그럴까? 부자들의 부와 그들이 누리는 기술적 혜택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는 왕도 노비도 에어컨 없이 지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부자들이 누리는 혜택은 평범한 사람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가난은 어떤가? 가난은 여전히 생계를 걱정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먹을 물조차 쉽게 구하지 못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부자들이 누리는 기술적 혜택이 많아질수록 지구에 재앙이 닥치고 있다는 게 바로 그 문제다. 앞서 이야기한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의 면적이 줄고 있다는 거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극단적 갈등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빈부격차가 증가하는 게 사회적으로 유익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부자들은 왜 계속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 걸까? 오늘 본문은 부자가 어떤 마음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지와 그로 인한 결과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어떤 동네에 호화생활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집 문 앞에 거지 나사로가 있다. 그는 영양결핍으로 피부에 버짐이 나있다. 그는 부잣집에 잔치가 많다는 걸 알고 남은 음식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잣집 문을 넘어설 수도 없었고, 부자도 문밖의 나사로를 만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빈부격차가 만든 큰 구렁텅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었다.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의 권세가 가득한 곳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극심한 목마름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때 저 멀리에 나사로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부자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했다.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좀 적셔주실 수 없습니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가고 싶어도 건너갈 수가 없다."


그때 부자는 생각했다. 살아 있는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그는 살아있는 형제 다섯에게 돌아가 자신이 겪는 일을 알려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이미 이야기하였다. 그들이 그 말을 듣는다면 회개할 것이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 중에 누가 가더라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왜 형제들을 찾아가려고 했을까? 그도 형제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사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부자와 나사로는 어떤 사이일까? 그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들은 형제다. 즉 사람을 가려 사랑하는 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어디까지 할 수 있겠는가? 이성적으로 모든 사람이 한 형제라는 걸 안다 해도, 현실을 그렇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나 하나님일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나 모든 이웃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그러면 부자가 잘못한 게 무엇인가? 부자는 자기 형제를 사랑했다. 단지 그와 관계되지 않은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과연 부자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내 식구 먼저, 내 자식 먼저'라는 마음은 부자와 나사로 사이의 구렁텅이를 더 크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예수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사귀어야 할까? 나사로는 부자의 집 문 앞에서 죽었다. 남는 음식이라도 얻어먹고자 하는 마음으로 거기까지 간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보게 되었다.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지만, 내 집 문 앞에 자리한 후에는 부자가 나사로를 알아보게 되었던 거다.


그렇다면 부자가 나사로에게 남는 음식을 주었다면 어땠을까?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구렁텅이가 그토록 커다랄 수 있었을까? 비록 부자가 나사로를 집으로 들여 그를 씻기고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고 함께 잔치를 벌이지는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부자가 나사로를 도왔다면 구렁텅이는 그만큼 메워졌을 거다.


마찬가지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다고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또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 많은 사람을 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가까이에 찾아온 사람은 어떤가? 한계가 있더라도 베풀 수 있다면 그만큼 구렁텅이의 크기는 작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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