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책상 위에 올려둔 폰에서 울리는 알람소리
서둘러 화장실로 가 대충 세수를 하고 어제 입었던 네이비색 슬랙스를 찾아 입었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5일째 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터라 집 앞에 있는 빵집의 오픈 타임 아르바이트를 덥석 물었다. 아직 오픈 타임에 구해진 아르바이트생이 나뿐이라 정신없이 바쁘지만 그런대로 힘찬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했다. 도톰한 후드티를 입고 집을 나와 살짝 찬 공기를 마시며 빵집으로 뛰어갔다.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 이 시간은 이른 출근을 하는 몇몇 직장인의 발걸음 소리로 채워져 있다. 베이킹 공간을 제외하고는 아직 어둑어둑한 매장의 조명 스위치를 하나씩 누르며 빵집을 들어가면 포근한 냄새가 매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정말 언제 맡아도 미칠 것 같은 갓 나온 빵의 고소한 냄새는 이 시간이 아니면 맡기 힘들다. 아르바이트지만 오랜만에 어딘가로 일을 하러 간다는 즐거움이 빵냄새와 함께 배가 된다.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터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요 근래의 일상이 마냥 들뜨기만 했다. 시험 준비를 하며 다녔던 '하버드독서실'은 빵집에서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면 있었고 용돈을 받아썼던 나는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향하던 중 가끔 이 빵집에 들러 좋아하는 모카크림빵이나 번을 사 먹곤 했었다. 6월에 있었던 지방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발령을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기다려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 들렸다. 뭘 하며 지내야 할지 생각하다 해외여행이라도 한번 길게 다녀오라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에 4개월 뒤 출발하는 아이슬란드행 비행기 티켓을 신용카드로 덜컥 샀다. 비행기 티켓은 그동안 모아둔 돈과 할부로 어찌 사긴 했다만 기타 경비를 계산하다 보니 이건 여행이 아니라 해외노숙자가 될 판이었다. 최대한 빨리 여행경비를 모아야 했다. 이것이 무료했던 일상의 공시생에서 눈코 뜰 새 없는 열혈 아르바이트생으로 거듭하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되는대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더니 빵집 한 군데, 돈가스 식당 한 군데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고 그렇게 시작하게 된 프랜차이즈 빵집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오픈 아르바이트생은 새벽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수십 가지 종류의 빵을 식힌 후 진열하고 약 7시 30분경 배달 오는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빵, 케이크, 각종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중간중간 출근길에 커피를 사러 오는 손님들과 아침 일찍 나온 따끈한 빵을 사러 오는 손님들도 빠르게 상대해야 한다. 오전 손님들의 대부분은 매일 같은 시간에 오거나 같은 종류의 커피와 빵을 사는 손님들이라 입구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얼굴을 보면 바로 뭘 주문할지 알 수 있기에 빨리 손님을 쳐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아주 가끔 구워져 나오는 빵 중에 망한 빵이 생기는데 그걸 먹을 수 있다는 아주 큰 장점도 있다. 갓 나온 빵을 커피 한잔과 먹으며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이라니!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빵집 여사장님은 오전 아르바이트생을 원래 두 명 구하고 있었는데 인건비 부담으로 우선 나를 먼저 채용하고 일을 시켜본 후에 안 되겠다 싶으면 한 명을 더 구하겠다고 했다. 역시나 혼자는 꽤 버거웠는데 사장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3,000세대가 넘는 대단지 아파트 안에 위치한 빵집이었고 주변에 못해도 30개가 넘는 학원가가 자리하고 있었기에 빵집 손님은 오전에만 해도 100명은 넘었다. 또 테이블만 해도 10개 이상인 큰 편에 속하는 매장이었기에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혼자 손님상대, 빵 포장, 진열, 음료제조, 제품 추천을 다 하기에는 일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2주쯤 지났을 시점에 사장님은 오픈타임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더 뽑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력서는 20장 가까이 들어왔고 면접 대상자는 최종 3명으로 추려졌다. 남자 1명, 여자 2명이었다. 면접 당일에도 나는 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11시쯤 한 남자가 빵집으로 들어왔다. 내 또래 거나 두세 살 많아 보이는 남자였는데 바로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와 면접을 보러 왔다는 말에 카운터 뒤쪽으로 달려가 사장님을 불렀다.
"사장님! 면접 보러 어떤 남자분 오셨어요!"
안쪽 베이킹룸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던 사장님은 비닐장갑을 벗고 종이 몇 장을 들고 나왔다.
"세하야, 손님 지금 없는 것 같은데 너도 같이 면접 보자."
"네? 저도 같이요? 제가 뭘 하죠?"
"그냥 대충 사람 괜찮은 지나 같이 일하기 편할 거 같은지 너도 보면 좋잖아? 어차피 세하랑 같은 타임 일할 사람인데 너도 봐야지."
그렇게 얼떨결에 사장님과 같이 면접심사위원이 되었다. 면접을 보러 온 남자 이름은 오석복, 나보다 3살 많았고 취직준비 중이라고 했다.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살고 있다 했고 빵집 아르바이트 경험은 없지만 하면 뭐든 잘할 수 있다며 당당하게 사장님과 나를 뚫어져라 보며 본인을 어필했다.
"저는 힘도 셉니다! 뭐 무거운 거나 배달할 것도 제가 다 잘할 수 있어요. 여기 일하는 분들이 여자분들만 있는 것 같던데 저 같은 남자도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이와 생긴 것에 비해 이름이 너무 올드하다는 것 말고는 딱히 흠은 없어 보였다. 적극적이고 의욕 넘치는 모습이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 같았다. 사장님이 이것저것 질문하는 사이, 유모차를 끌고 들어오는 손님이 있어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장님은 그 뒤로도 10분가량 석복 씨의 면접을 보았다. 카운터에서 아메리카노를 만들다가 면접을 끝내고 걸어 나가는 석복 씨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힙업이 바짝 되어있어서 몸관리에 엄청 신경을 쓴 듯했다. 갑자기 저분이랑 같이 일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들뜬 기분으로 나도 몰래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출근을 해서 평소와 같이 일을 하는데 사장님이 종이 몇 장을 들고 나와 나에게 아르바이트생을 같이 골라보자고 했다. 어제 내가 12시까지 일하고 퇴근한 뒤에 두 명의 여자분이 더 면접을 보러 왔었는데 둘 다 무난하게 괜찮았다고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장님은 나만 괜찮으면 오픈 타임에는 본사 배송 제품 정리나 쓰레기 처리 등 힘쓸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남자를 뽑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이때다 싶어 나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배달 오는 짐들을 정리하는 게 조금 힘들기는 했어요. 남자분이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요! 나머지는 제가 하나씩 가르쳐서 잘할 수 있게 도울게요."
"남자랑 같이 일하는 거 안불편하겠어?"
"저는 상관없어요.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오석복 씨? 그분 선하게 생기셔서 손님상대도 괜찮게 하실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한번 일을 시켜보자. 내가 연락해서 다음 주부터 오픈타임 나오라고 할게~ 이번주까지만 세하 네가 고생 좀 해줘."
속으로 '올타쿠나!'를 외치며 사장님께 활짝 웃어 보였다. 다음 주부터 같이 일할 사람이 생긴다는 게 기뻤다. 조금 떨리기도 했다. 남자라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그저 낯가림이 있는 소심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음주가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