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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Jun 06. 2016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아이야, 건강하게 자라거라!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올라서서 탁자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웃옷을 벗었습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600여 미터...... 먼 길은 아니었지만 후반 300 미터는 제법 언덕을 올라야 했습니다. 결혼식에 다녀오느라 입었던 재킷 밑으로 드레스 셔츠가 땀에 젖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남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두 팔에 안고 왔던 작은 꽃다발 두 개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니, 먼저 와 계신 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작은 교실만 한 크기의 방은 독서실과 놀이방을 겸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오른쪽 구석으로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미끄럼틀이 있습니다. 방 한가운데는 작은 책장이 파티션처럼 놓여 있습니다. 맞은편 벽을 따라 책장이 기대어 있고, 책장 위로는 플라스틱 상자들이 얹혀 있습니다. 먼저 오신 분들이 각각 한두 명의 아이들과 놀이도 하고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장난도 하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방 가운데로 몇 걸음 내딛었습니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아이는 빨간색 상의를 입고 있었습니다. 흔히들 폴로셔츠라고 부르는 반소매 셔츠를 밖으로 내어 입었습니다. 아직 어색한 몸짓으로 걸으며 방 안을 둘러보던 저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마치 이제껏 저와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에서 저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아이였습니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아이의 두 팔은 힘차게 허공을 갈랐습니다. 서너 살쯤 되었을 듯한 아이를 쫓아가서 한달음에 잡고 나면 너무 싱겁겠죠? 저는 낮은 책장을 사이에 두고 반대방향으로 돌았습니다. 저와 다시 눈이 마주친 아이는 얼굴에 웃음을 보였습니다. 얼굴을 한가득 채울만한 커다란 웃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마주했던 순간에 보았던 무표정한 하얀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경계감을 내려놓은 그 순간,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벽 쪽에 기대어 있는,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책장 위에는 작은 반투명 플라스틱 상자들이 포개어 쌓여 있습니다. 아이는 그중 하나를 말없이 가리킵니다. "이거 내려줄까?"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직 아이는 제게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우리는 방 가운데에 펼쳐 놓은 상아색의 자리 위에 올라앉았습니다. 아이의 손은 아직 고사리 같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은 손입니다. 언뜻 보아도 짝이 다 맞지 않을 것 같은 레고 장난감들을, 아이는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게 집어 밖으로 내어 정렬해 봅니다. 무언가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의지는 얼굴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아이의 얼굴은 특별한 감정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얀 피부에 순박하게 생긴 아이의 얼굴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표정입니다. 아이의 손동작은 유난히 천천히 움직입니다. 말은 걸어 볼 때가 왔습니다.

    "이름이 뭐야?"

    "......"

    얼굴을 숙인 채 눈도 맞추지 않고 있는 아이에게 그리 훌륭한 질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저씨 이름은 오, 주, 현이야. 넌?"

    "OO, 김 OO"

    "그렇구나, OO아, 반갑다. 지금 무얼 만들 거야?"

    아이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헬리콥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헬기"

    "그래, 그럼 우리 헬기를 만들자."

    아이의 손이 그제야 조금씩 바빠졌습니다. 푸른색과 회색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아이는 그 작은 손가락을 여러 번 놀려야 했습니다. 문득 아이는 작은 조각들을 제게 내밉니다, 아무 말없이. 기다란 흰 조각의 양쪽 끝에 작은 빨간 조각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얇은 조각들이라 어린아이의 여린 손가락 끝으로는 떼어낼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걸 떼어 줄까?"

    "네."

    옆에 있던 아이가 다른 선생님의 휴대폰에서 헬리콥터 사진들을 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작은 눈을 껌벅거리며 넘겨다 봅니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합니다. 제 전화기에서 헬리콥터 사진들을 검색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거 봐도 돼요?"

    "그럼!"

    아이는 처음으로 눈을 반짝였습니다. 스마트폰이 처음은 아닌 듯, 화면 속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키워 보기도 하고 다음 사진을 넘겨 보기도 합니다. 옆에 있던 아이가 제 것을 빼앗긴 양, 제 전화기를 덮석 쥐고는 헬리콥터 사진들을 보겠다고 하자, 아이는 강하게 거부합니다. 두 번째로 눈이 반짝였습니다. 단호한 얼굴이었습니다. 아이는 헬리콥터를 다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조각들을 상자 안에 주워 담고, 자신이 만든 것을 상자의 뚜껑에 올려놓고 그 상자를 제 허리춤에 끼고는 일어난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아이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미끄럼틀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어느덧 아이는 제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아주 또렷하게 의사표시를 할 줄 알았고, 또한 반듯한 존댓말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 저 어린아이로 하여금 저렇게 반듯하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릴 때 제게 야단을 듣고 나면 풀이 죽은 얼굴로 내키지 않는 듯한 존댓말을 쓰곤 했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한쪽 편에 얌전히 내려놓았던 장난감에 또 다른 아이가 손을 대려 하자, 아이는 얼른 가서 조용히 상자를 집어 옵니다. 아이의 행동은 차갑지는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아이의 모습은 처연합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행동에 대해서 반드시 되갚아야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것을 고이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만이 보입니다. 아이는 참으로 순하고 착합니다.


    문득, 잘 놀던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미끄럼틀 옆 문 앞에 서서 아이가 뭐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알아듣지 못한 제게 허리를 낮추어 아이에게 되물었습니다.

    "쉬해야 해요."

    "오, 그렇구나. 미안해. 선생님이 알아듣지를 못했어."

    바지를 내려 주자, 두 걸음밖에 있는 변기까지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아이는 제가 밖에 서 있는 것을 곁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짓궂은 아이들이 화장실을 불을 꺼도 제가 다시 켤 때까지 아이는 놀라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제 어깨보다 높은 세면대 위로 손을 뻗어 손을 씻겠다는 아이에게 물비누 펌프질을 도와주겠다고 하였지만, 아이는 "제가 할 수 있어요" 합니다. 그때까지 담담하고 처연한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가슴속에 누르고 있던 뜨거운 것이 불쑥 올라와 제 손등 위로 떨어졌습니다. 얼른 흐르는 수돗물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비누를 씻어 내립니다.

    "비누를 적게 쓰는 것이 더 좋단다. 그리고 비누를 아주 깨끗하게 씻어야 해. 흐르는 물에 여러 번...... 물이 차가워?"

    비누기를 다 씻은 손은 허공에 털며 토끼처럼 뛰어 화장실에서 방으로 올라서서는 돌아보며 아이가 씩 웃습니다. 앞뒤로 흔드는 몸에 맞춰 팔을 위에서 아래로 뿌립니다. 수건이 없어 닦아내지 못한 손의 물기를 털어 내면서 씨익 웃습니다. 처음으로 웃었습니다. 멀리서 한 선생님께서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얼른 아이는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제가 신을 신는 동안에도 제 손을 놓지 않습니다. 복도를 따라 식당으로 옮겨갔습니다.


    먼저 와 있는 아이들이 있었고 다른 자원봉사자 선생님들도 계셨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져다 먹는다며 먼저 동생들을 챙겨 주기를 원했습니다. 아이는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배식은 봉사자들 가운데 여자분들이 맡고, 남자들은 주방 안으로 다른 일을 도우러 갔습니다. 기다란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를 신고 손에 일회용 장갑을 끼고는 김치를 썰어서 냉장고용 김치통에 넣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 한두 명은 주방 안에 설거지하는 곳까지 와서 그릇과 수저를 두고 갔지만, 대부분은 식당 한편에 마련된 곳에 그릇을 올려두나 봅니다. 제 손을 잡아끌던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처음 본 아이인데 어느새 가슴을 비집고 들어와 앉았습니다.


    주방 일을 마치고 돌아섰을 땐 아이들은 이미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걷어올렸던 셔츠의 소매를 내려 고치고, 가방을 들고, 웃옷을 입고 나설 때에 문득 떠올랐습니다. '아, 아이와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구나.' 아이는 제 손을 이끌고 가서 제 방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양치를 잘 하고 자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아이는 혹시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는지...... 그런 생각에 마음이 미치자 발길이 무거웠습니다.



    토요일 오후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신 분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도 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 이 만두를 좋아할는지......


    저녁상 머리 대화 속에서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는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아서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정말 작은 아이인데, 반듯하고 깨끗한 아이인데, 착하고 순한 아이인데......

    엄마 품에 있으면 천사같이 맑고 귀여운 아이일 텐데......

    아빠 품에 있으면 누구보다 밝은 개구쟁이일 텐데......


    선배님이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동안에 아이를 잊어 보려고 싱거운 소리들을 지껄이며 왔습니다. 도착할 때엔 날이 저물어 완전히 어둑한 하늘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고운 꿈을 꾸며 잘 자고 있겠죠?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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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6901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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