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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비 Dec 25. 2022

오리들은 어디로 갔을까

대전 대청호

눈이 많이 올지도, 도로가 꽁꽁 얼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출발하고 봤다. 떡볶이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처럼 마음이 급했다. 

첫 100km는 오랜만에 차를 타고 달리는 기분에 취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대전에 가까워질수록 매서운 눈보라가 치고 급기야 녹을 줄만 알았던 워셔액도 얼어붙어 나오지 않으니 덜컥 겁이 났다. 운전석 유리창이 뿌옇게 변하니 앞이 보이지 않더라.


엉금엉금 휴게소까지 기어가 일단 주차하고 내렸다. 바로 옆 아저씨가 차 본넷을 열어 워셔액을 넣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의 구원자가 되겠구나 싶었다. 다급한 요청에 선뜻 도움을 준 아저씨는 조금은 당황스럽게도 호스를 입에 물어가며 얼음을 녹여주고 열과 성을 다해 차를 고쳐주고는 쿨하게 떠났다. 무조건 도움을 받아내겠다는 부끄러운 부탁에도 진심을 다하는 모습, 제 것 마냥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일 만큼 기억에 남는다. 귤이 조금밖에 없는게 아쉬웠다. 한 박스는 드려야지 될 정도로 감동적인 사람이다. 

올 해가 지나기 전에 선행 하나 베풀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무사히 도착한 대청호는 흐리고 눈이 내렸다. 미술관 관람 후 나오니 아주 새파랗게 하늘이 빛나는데 그 마법 같은 파랑색이 온 계절을 닮아 있었다. 언제나 청명하게 푸르른 하늘. 그 밑에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그 하늘 밑에서 시작한 드라이브가 멋지다. 거대한 호수 주변을 천천히 달리며 이 추위에도 얼지 않은 호수를 생각했다. 반짝 반짝 빛이 나도 그 속은 얼음장처럼 추울 호수에 사는 것들이 궁금해진다. 그 많은 오리들은 어디로 갔을까.

호밀밭의 파수꾼이 생각났고 내가 점점 엄마를 닮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서 엄마의 흔적을 찾는다. 아주 잠깐 그리움의 눈물이 났다. 이 차에서 함께 했던 시간과, 함께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나 달라져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엄마가 있다면 나와 함께 겨울의 모습을 보러 갔을까. 

내 나이의 엄마가 궁금하다. 나처럼 이 풍경들을 품기 위해 많은 곳을 찾아 갔겠지. 그 길에서 느꼈을 감정들을 알고 싶다. 그 감정, 느낌, 생각들을 엄마의 목소리로 듣고 싶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 가고 싶은 길이었다.


대청호 둘레길을 걸으면서는 너무 추워서 그 많던 생각들이 사라졌다. 사부작 사부작 새하야 눈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뽀드득- 소리가 나던 호수의 길 덕분에 천천히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얼굴이 시리던 바람과 발소리에 맞추어 밟히는 눈의 무게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다시 자취를 감춘 푸른 하늘과 그 모든 것들을 말 없이 펼쳐내는 호수의 크기가 깊이 기억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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