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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에서 단서를 찾다

비로소 온 광복, 독립운동가 강석대 [3]

by JOHN

할아버지께서는 비교적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 천도교 활동을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천도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천도교 신자였다.


강석대 독립운동가께서도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인터넷이나 서적에 공개되어 있는 자료가 아닌, 우리 집안이 가지고 있는 자료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독립운동 공적 실적사항서'이다. 이는 1977년, 할아버지께서 강석대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공적 사항을 입증하기 위해 작성하신 자료로, 국가보훈처에 제출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강석대 독립운동가께서는 1915년 4월 5일 동학에 입도하여, 1917년 1월 천도교 중앙에서 특별수련(비밀 교육)을 받은 후 중앙과 화천의 비밀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셨다고 한다.


또한 1918년 술주정꾼, 미친 사람으로 변장해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이 주도하는 3.1 독립운동 지령문과 독립선언서를 화천에 반입하셨다.


이후 1919년 3월 23일, 김창의 선생 등 천도교 결사대원 23인과 주민 6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본 헌병과 격투 끝에 전원 체포되었다고 한다.

1977년 할아버지께서 작성하신 독립운동 공적 실적 사항

강석대 독립운동가께서 강원도 화천에서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셨다는 것,


할아버지께서 비교적 최근까지 천도교 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토대로 천도교에 교인 명부 같은 것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여 천도교에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 증빙을 위해 여러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천도교 측에 알리니, 관계자분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자료를 구한다는 이유로 연락한다고 하셨다.


이후 천도교중앙대교당 5층에 위치한 천도교 중앙도서관에 교인 명부가 있으니 직접 방문해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에 위치한 '천도교중앙대교당'에 방문하였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천도교중앙대교당에 방문하니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한 관계자분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분은 '동학천도교 인명사전'에서 강석대 독립운동가의 정보를 찾아두셨다.


하지만 강석대 독립운동가의 가족 관계는 나와 있지 않았고, 언제 동학에 입문했는지, 언제 독립운동을 하셨는지 등의 대략적인 정보만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 소득이 없구나 싶던 찰나, 할아버지께서도 천도교 활동을 하셨던 것이 생각나서 할아버지의 존함을 인명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출처 : 동학천도교 인명사전(이동초, 2019),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할아버지의 존함은 동학천도교 인명사전 28쪽에 나와 있었다.


특히 가장 중요했던 강석대 독립운동가와의 관계 역시 나와 있었는데, 강석대의 '석'자가 지금까지 여러 자료에 나와 있던 石 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판결문 등에서도 石(돌 석)과 錫(주석 석)을 혼용한 것을 보면, 이 당시에는 음이 같은 한자를 혼용하는 관행이 있는 것 같았다.

출처 : 동학천도교 인명사전(이동초, 2019),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8쪽.

드디어 우리 할아버지와 강석대 독립운동가 간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첫 단서를 찾은 듯했다.


천도교는 역사가 깊은 종교기관이라 이 문서에 대한 신빙성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고 생각하여 국가보훈처 담당 연구관에게 보냈다.


하지만 연구관은 해당 인명사전이 2019년에 출간된 것이라 내용을 뒷받침할 자료가 없으면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천도교 측에 인명사전의 기반이 되는 사료가 존재하는지 문의했다.


인명사전에는 할아버지 관련 내용의 출처로 '<성금록> 화천교구'가 적혀있었는데, 이 자료가 천도교에서 찾기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5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찾는 것이 어렵고, 존재하는지 조차 불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성금록>도 찾아봤는데, 화천교구에 관한 자료가 없어 기초 사료를 찾지 못했다.


결국 '동학천도교 인명사전' 외에 다른 자료를 찾아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독립운동가 후손임을 거짓됨 없이 제대로 증명하는 것이 이 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한 이후 약 8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이를 증빙할 자료가 많이 소실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 국민에게 증명책임을 온전히 부과하는 것은 다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훈처나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전문 인력이 있을 텐데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는 됐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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