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편집자의 취향 확립 프로젝트
전체 조명은 꺼진, 독서실의 책상 한 칸 남짓한 공간에서 나는 무채색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얀 종이 바탕 위에 까만 글씨가 빼곡한 문제를 들여다보며, 고작 더해봤자 빨간색이던 그 종이를 붙잡고서, 이 세상엔 선명한 빨간색 정답만 있고 내가 가는 길은 흐리멍텅한 오답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하던 공부에 온점을 찍고 되돌아본 내 삶엔 담백한 꽃보다 화사한 꽃을 좋아하는 내가 있었고, 비슷한 필기류를 들고도 사소한 차이에 마음을 뺏기는 내가 있었다. 뜨끈한 순대국 국물에 차가운 소주 한 잔을 털어내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Mp3 가득 에픽하이의 노래를 담아 듣던 고등학생이 역사가 좋다며 매달려 여기까지 왔다.
내가 삶의 곳곳에 칠해놓은 색깔들을 들여다 본다.
새콤한 맛보단 고소한 맛이 좋다.
치렁한 긴 머리보단 짧은 머리가 편하다.
로맨스 영화에 흠뻑 빠질 줄도 알고 취향 가득 담긴 소설책을 읽다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눈물 한 방울 떨굴 줄도 안다.
고양이보단 강아지를 애정한다. 아, 반박은 받지 않는다. 여러 마리의 내 털동생들에 대한 의리니까.
움츠러들기만 해서 더 추운 겨울보단 제법 즐길 줄 아는 여름이 낫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나홀로 집에 보다 해리포터가 더 좋다. 나의 친애하는 해리와 론과 헤르미온느와 따끈한 핫초코 한 잔이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고.
어느 날엔 머스크향에 폭닥하게 쌓였다가, 또 어느 날엔 상큼한 오렌지향에 아찔하게 정신을 깨우는, 어쩌면 변덕스러운 나도, 또 나다.
잿빛인 줄 알았던 내 온 생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빼곡했다.
한때의 잿빛 틈에서도 기어코 비집고 피워낸 알록달록함이 눈물겹기도, 짜릿하기도 하다.
내겐 지나온 날보다 앞으로 지나갈 날이 더 길 것이다. 두루뭉술하던 내 대답도 시간에 취향이 덧대어질수록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어디에 가져다 놓든 흐릿해만 보이던 내 테두리가 점점 진해져 나라는 존재도 분명해질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무색무취의 취향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취향을 생각해볼 시간이 없던, 혹은 알아갈 시간이 없던 나, 혹은 우리들.
이것 저것으로, 이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라는 사람을 설명해나갈 미래를 그려본다.
동네 꽃집에서 ‘알록달록하게요‘를 외치며 사온 한 송이 꽃다발을 들고서 나와 우리들이 앞으로 그려나갈 취향 담뿍한 미래에 응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