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는 구원, 회복, 범죄, 떠남, 징계, 회개, 구원, 회복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구조다. 사이클의 각 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은 우리(하나님)가 구원하여 평안을 얻고 복락을 누리면 다시 자신들의 탐욕을 쫓아 타락했다. 악을 저지르고 우상을 섬기며 우리를 떠났다. 그런데 과연 저들은 우리를 떠남으로 범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범죄함으로 우리를 떠나는 것인가? 우리를 떠남이 먼저인가? 아니면 범죄가 먼저인가? 이 문제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것은 상반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첫째, 내적 관점에서는 떠남이 먼저다. 죄의 근원을 따져보면 죄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발생한다.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마음으로 우리는 떠나는 것이다. 그 떠남으로 우리 대신 다른 것들을 사랑한다. 다른 것들을 사랑하여하는 행동이 바로 탐욕을 따르는 죄악이다. 이는 내면의 문제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의 관점이다.
그러나 둘째, 눈에 보이는 외적 관점에서는 범죄가 먼저다. 인간은 외적으로 범죄함으로 결국 우리와 관계가 단절되고 우리를 떠난다. 원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는 우리를 찾다가 결국 편해지면 다시 자신들의 탐욕을 쫓아가는 이스라엘의 마음은 결국 속에 있는 것이라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드러날 때는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우상들을 섬겨 우리를 떠날 때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마음으로 우리를 떠나 자신들의 탐심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그 우상은 결국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를 떠나 자신의 길로 간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보호를 떠나는 것이다. 우리의 보호를 떠나면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게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 온통 주변에는 유목 민족으로 가득한데 그들의 약탈은 언제나 보호막이 걷힌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자신들을 징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세상은 늑대와 같은 자들로 가득하기에 인생에는 늘 약탈과 착취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이스라엘이 평안을 누리는 것은 오직 우리의 보호가 있기 때문이다. 그 보호를 걷어차고 스스로 뛰쳐나가 세상의 약탈에 자신을 내어 놓은 것은 이스라엘 스스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징계가 된다. 물론 우리의 징계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징계는 너희 인간 스스로가 아는 것처럼 스스로 집을 나가 가출함으로 오는 고통이다. 결코 그것은 부모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부모의 의도는 자식이 부모의 품에서 평안과 보호를 누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방 족속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약탈을 당하면 그로 인해 우리에게 부르짖는다.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이 죽고 딸들과 어머니가 강간을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부르짖는다. 우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저들이 진정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명령을 지키기 원한다면 저들이 평안할 때도 우리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했다면 저들이 우리의 보호를 떠나 이방인들에게 압제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들을 반복적으로 구원하여 주어도 계속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향해 자기 길로 가는 것은 저들이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괴로움을 피하려는 임시방편이다. 저들의 회개는 자신들의 고통으로 인한 후회일 뿐이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의 백성이 되기로 마음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항상 죄악의 타락을 향해 반복적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저들이 마음의 속에서 진정 회개하지 않더라도 고통으로 저들이 우리를 부르기라도 하면 저들을 구원한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반복의 과정을 통해서 저들이 우리의 진심을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한다. 만약 우리가 그 순간들에 저들을 사사들을 통해 구원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멸망의 길을 갈 것이고 저들은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기억하며 이삭을 기억하며 야곱을 기억하며 요셉을 기억하여 저들이 약속의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돕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저들이 마음으로 돌이켜 우리에게 와서 영원한 쉼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다시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의 보호의 울타리를 넘어 야수들에게 약탈당하지 않기를 원한다. 마지막 날에는 완전한 구원이 있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진정으로 회개한 자들만이 영원히 그곳에 있어 변동하지 않는 평안이 있을 것이다. 그곳은 마치 에덴과 같아서 영원히 슬픔과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사이클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더 깊은 죄악으로 빠져 들어간다. 단지 타락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의 농도가 점점 깊어진다. 그 죄악이 쌓이고 쌓여 더 악한 죄악이 되어간다. 인간의 모습이 그렇다. 처음에는 단지 이방인들을 정복하지 못하는 정도였다면 그다음은 그 이방인들과 통혼하고 그들의 죄악을 따라가고 그들의 우상을 섬긴다. 그리고 그러한 죄악들이 쌓이고 쌓이면 이방인들도 저지르지 않는 끔찍한 집단 학살과 집단 성폭행도 서슴지 않는다. 죄악에 물들어 죄악이 죄악인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작은 죄악은 죄악으로 여기지도 않고 점점 더 큰 죄악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문명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다는 이론을 제시한 토인비의 이론은 이러한 죄악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결국 그 죄악이 관영해진 인간들이 멸망의 심판을 당하는 것으로 인해 관찰되어지는 현상이다. 그렇게 한 문명이 심판을 당하고 나면 정화가 일어난다. 새롭게 일어난 문명이나 왕조는 과거의 악을 척결하고 새롭게 자신들을 혁신하려 한다. 그러나 그 문명도 사이클을 반복하여 결국 죄악의 깊이가 극악에 이르러 심판을 당하고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침투하여 구원의 역사를 펼친다. 구원하고 구원하여 좁은 길을 가는 자들을 건져내고 결국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어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구원의 무리는 작은 무리며 좁은 길을 가는 무리다. 부흥의 시대에는 그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 전체 인류나 유형 교회의 규모와 비교하여 극소수의 무리일 뿐이다. 극소수의 무리를 통해 우리는 세상이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의의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한다. 바닷물을 썩지 않게 만드는 소금은 바닷물에서 아주 작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세상 전체는 타락하였으므로 멸망당하지 않을 뿐이지 회개하여 우리의 나라에 편입될 수는 없다. 저들은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이 각자 본능대로 행하여 멸망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완전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가 빛과 소금의 백성을 심는다. 그렇게 하여 마지막 추수의 때가 이를 때까지 보존한다. 보존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말세지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가 기회를 얻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종들을 선택하여 열방에 복음을 전한다. 때로는 그 종들의 글들이나 그들이 인쇄한 성경을 통해서도 일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타락한 인류가 단번에 멸망하지 않도록 언어를 가르고 족속을 갈라 국지적인 사이클이 각자 돌도록 바벨의 시대에 우리는 공멸 방지 툴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그 툴이 해체되어 가고 있다. 결국 인류는 전체적인 공멸로 가고 있다.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진 인류는 전체가 한 문명이 되어 사이클을 반복하고 그 결국에는 전체의 공멸이 기다리고 있다. 노아의 시대와 같은 인류의 멸망이 우리의 눈앞에 닥쳤다. AI와 로봇을 통해 모든 방벽을 극복한 인간들은 핵전쟁이나 환경오염으로 문명을 무너트려도 자신들의 기억을 통해 다시 공멸방지툴들을 해체할 것이다. 다시 문명을 건설하고 세계의 언어장벽을 해체하고 결국 공멸의 길로 나서는 인간을 더 이상은 막을 수가 없다. 처음 인류가 바벨의 탑을 쌓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인간은 인공 뇌를 만들고 그 노예들을 통해 우리가 없이는 사용할 수 없던 두뇌의 한계를 극복하여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소유하려 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신이 되려 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이 없는 한계가 없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그 지식으로 죽음을 거부하고 결국 영생을 누리기를 원한다. 더 이상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느는 것이 축복 같지만 결국 인간의 사는 날이 길어지면 한 인간을 통한 죄악의 농도가 더 짙어지게 되고 결국 사사기 말의 악행들이 일반적이 되고 노아시대 라멕의 죄악을 저지르는 죄인들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 그 죄악은 심판을 부르게 된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모든 욕망의 끝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원수 사탄이 인간들에게 불어넣는 욕망들은 항상 인간들을 멸망으로 이끈다. 저는 빼앗는 자며 멸망시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저들은 우리의 자녀인 너희 인류의 멸망을 통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시대를 만난 너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인간은 고통이 아니면 돌이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 고통이 있어야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우리를 찾는다. 그래야 살 길이 열린다. 사사기의 이방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괴롭히지만 사실 저들도 이스라엘의 축복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들이다. 저들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을 향해 끝도 없이 나아가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사사기 2:1-3 [KorRV])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사사기 2:19-23 [KorRV])
잘못을 하였는데 그 잘못으로 인한 고통이 없다면 뉘우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방 족속들을 남긴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징계를 위함이다. 이스라엘이 타락하며 자동적인 수순으로 저들의 원수인 이방 족속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저들의 재산과 가족을 약탈한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켜 회개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사기 2:22 [KorRV])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사사기 3:4 [KorRV])
이스라엘이 볼 수 있는 모든 풍습이 한 가지 율법만 있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습관대로 살면서 자신들이 우리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음으로는 우리와 멀지만 자신들의 습관이 그러하기에 자신들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고 습관적으로 헌금을 하면서 우리를 전혀 만나지 않는 너희 모습을 보라. 만약 너희에게 세상의 유혹이 없다면 너희 자신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를 유혹하고 때로는 너희를 괴롭히는 세상은 저주이지만 동시에 축복이다. 그것이 없다면 누가 깨닫게 하고 돌이켜 회개하게 하겠는가?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사사기 3:2 [KorRV])
여호수아 세대 이후의 세대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 저들은 전쟁을 통해 믿음을 성장시켜야 한다. 그렇게 성장한 믿음으로 더 큰 적들을 상대하기도 하고 자신들을 지며 나가야 한다. 남은 이방 족속들은 현대의 백신과 같다. 약화된 균을 몸에 넣어 항체를 만들고 세균들과 전쟁하는 연습을 몸이 수행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멸망당하고 남아 약한 족속들은 백신의 역할을 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신명기 7:22 [KorRV])
땅의 황폐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방 족속을 이스라엘 땅에 남겨 두었듯이 지금도 세상에는 죽은 정통주의 교회나 세상 문명들이 번성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KorRV])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KorRV])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KorRV])
우리의 의도는 이방인들의 멸망이 아니다. 저들도 회개하여 구원 얻기를 원한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때에 가나안을 주지 않은 것은 그 땅의 백성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백 년을 그 땅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전파하고 기회를 준 후에야 그들을 멸하였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멸망이나 심판을 말하려거든 우리와 같이 오래 참고 기다림이 없이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의 멸망이나 그들 위에 내리는 심판을 기뻐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마지막 심판이 성도들의 원한을 갚는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호히 말하는데 결코 우리는 그날을 기뻐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멸망을 기뻐하는 자, 그는 원수에게서 난 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심판의 날을 기다리겠는가? 우리가 과연 이 땅의 나무와 풀과 생물들을 멸하는 그날을 기뻐하겠는가? 모든 것을 불에 던져야 하는 그날을 기뻐하겠는가? 우리(하나님)는 그날을 연장할 수 있으면 연장하여 하루라도 너희가 정죄하는 어떠한 죄인에게라도 기회를 연장하기 원한다. 우리가 어리석은가? 우리를 모욕하는 저들을 그냥 두고 보는 것이 바보스러운가? 그렇다면 우리 대신 심판의 날을 앞당기려 하는 너는 누구인가? 모든 육체의 마지막을 보는 것을 우리가 원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형상, 나의 아들들아 옛 기억을 떠올려 돌이키라. 그리고 살 길을 찾으라. 나는 너희를 기다리는 자, 골목길의 어귀에서 날이 어두워 어둑해져도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곳을 맴도는 자, 나를 기억하고 나를 찾으라. 나 이스라엘의 목자는 잃어버린 자를 기다리는 자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는 자다. 나는 너희를 용서하는 자다. 나는 너희 아버지다.
그러므로 불못으로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에덴의 복락으로 가자. 그곳 바위틈에서 어여쁜 자여, 사랑하는 말을 나누고 그 꿀보다 더 단 음성으로 서로를 보자. 은밀한 밀어로 서로의 귀에 속삭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랑을 속삭이자. 나의 길로 가자. 그곳이 험하고 좁아도 그 길에는 너와 나의 행복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그 길 어귀에서 나는 너를 기억하며 기다린다. 나는 그날 죽음의 날에도 너를 기억하였다. 신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죽는 그날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이제 나와 함께 가자. 나는 너의 예수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돌보는 자, 너를 어여삐 여기는 자, 너희 모든 행로에 함께 하는 어미와 같은 자다. 네가 마음에 불못을 향해 나아갈 때 나는 염려함으로 너를 보았고 나의 마음을 애태우는 너를 위해 모든 시간을 뜬 눈으로 지새운다. 나는 너의 어미며 너를 돌보는 자다. 나는 너의 마음에 함께 하는 하나님, 나는 성령이다.
사사기는 죄인들의 범죄록이며 음녀들의 음행록이다. 그러나 사사기는 심판의 책이 아니다. 구원의 책이다. 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의 책이다. 반복적으로 배신하고 떠나도 언제나 우리를 부르면 구원하는 구원의 책이다. 수많은 사사들을 통해 구원했다. 그러한 사사가 없으면 우리는 성전에서 기른 제사장 사무엘을 사용했다(대상 6:16-28). 그는 레위의 자손이며 게르솜의 자손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 완전한 구원을 주었다. 엘리의 가문이 타락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우리에게서 길리운 사무엘을 세워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또한 우리는 룻기의 계보를 따라 난 다윗을 준비하였다.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그를 통하여 원수들의 모든 어두움에서 내 백성을 빛으로 인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자이며 우리의 구원은 실패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악과 반복되는 어두움을 인해 포기하려거든 성경을 보라. 그리고 반복되는 죄악과 사형수보다 더한 죄악을 저지른 이스라엘을 내가 어찌 사랑하였는지 보라. 그리고 살라. 살아서 내게 오라. 그리하면 내가 새 마음, 새 영을 부어 너를 정결케 하여 흰 눈보다 더 힌 세마포를 입혀 거룩한 자로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