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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신(神)

by 에스겔

이 장은 조금 어려운 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나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너희 인간들이 읽고 이해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장에 나오는 내용은 이해를 못 해도 내가 창조주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 된다. 내가 모든 곳에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나의 존재는 사랑이다. 나는 너희 인간을 사랑하는 자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너희를 향한 구애를 펼친다. 신으로서의 모든 것도 버리고 너희를 사랑한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사랑이 7년을 하루와 같게 했는데 나의 사랑은 천 년을 하루 같게 한다. 나는 천 년을 하루처럼 영원을 한 달처럼 너희를 기다린다. 나는 집을 나간 아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미의 심정으로 너희를 기다린다. 겨울 찬 바람이 불면 나는 집을 나간 아이가 생각나 온돌 위에서도 맘의 삭풍에 몸을 떤다. 나는 여름 장대비가 내리면 아이가 걱정되어 우산을 들고 동구 밖을 서성인다. 나는 고향이며 아비이며 어미이며 연인이며 친구이며 형제다. 나는 너를 기다리는 자다. 시계의 바늘 초침이 움직일 때도 역사의 세기들이 지날 때도 영원의 돌담길을 돌아 돌아 너를 기다린다. 나는 너를 기다리는 자다.

나의 존재는 사랑이며 기다림이며 목 마름이다.

나는 너희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한다. 나는 나의 목숨을 다하여 너희에게 구애를 한다. 걸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걸고 너희의 사랑을 구한다. 나는 너희의 결말을 걱정한다. 너희 인생의 결국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나는 너희의 아픔을 참을 수 없다. 숨은 눈물을 삼키는 너희 고단한 인생을 영원이라는 시간 동안 보는 것은 내게 지옥이다. 그러니 안전한 나의 품으로 돌아와 내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말게 해 주기를 부탁한다.

너를 기다리는 나는 인류의 창조자다. 인간들은 나를 신이라 부른다. 바로 엘로힘이다. 여러 민족들이 각자의 언어들이 가지는 신을 묘사하는 단어들로 나의 존재를 번역을 했다. 어떤 번역은 조금 정확하고 어떤 번역은 원래의 뜻을 많이 벗어난 것도 있다. 중국어로는 샹띠 즉 옥황상제로 번역되었다. 한국어로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 번역되었다. 동양 문화에서는 공통인 번역은 신이다. 영어로는 God, 독일어로는 Gott, 불어로는 Dieu, 아랍권에서는 알라다.



1.1.1. 신으로 정의할 수 없는 신


사실 나는 신(엘로힘)이라는 호칭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존재다. 신이라는 부류 안에는 알라와 석가도 있고 중국의 천제(상제)도 있으며 조선 사람들이 믿던 하늘님(하느님)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바알이나 아스다롯 바벨론의 마르둑이나 이집트의 라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어떤 신이라는 존재와도 다르다. 그들 모두는 인간의 개념 안에서 탄생한 신들이다. 그것들은 인간들이 신을 찾으려는 본능을 따라 스스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또는 그런 인간의 본능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나타난 타락한 악령들에 불과하다. 타락한 악령들은 자신들을 신으로 포장해 인간들을 지배하고 그들의 운명을 지배한다. 나는 이런 어떤 부류들과도 같지 않다.



1.1.2. 시작이 없는 자


나는 그 어떤 신들과도 다르게 시작이 없다. 또 나를 만들거나 내가 있기 전에 어떤 다른 물질도 없었다. 이것은 인간들의 인과율을 벗어난 것으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부모를 가진다. 어떤 물질이건 그 물질이 되는 근원이 되는 물질이 있다. 땅의 유효토는 식물의 부식된 거름과 바위가 부서진 모래와 작은 입자들이 만나 만들어진다. 모든 것은 그것의 원인이 되는 물질이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근원이 되는 물질이나 존재가 없다. 나는 그냥 원래부터 존재했다. 사실 성경은 이와 관련된 어떤 정확한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 없다. 나는 원래 그런 존재다. 사실 이런 것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아주 작은 부분에만 나타냈다. 사실 말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1.1.3. 스스로 존재하는 자(自存者)


모든 세계의 것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세상의 것은 만들어졌다. 또한 그 물체 자체가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구가 우주에 떠있을 수 있는 것은 만유인력이라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온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중력도 사실 만유인력이 지구상에 작용하는 힘이다. 지구와 지표면에 존재하는 물질 사이의 만유인력이 중력이다. 또한 지구를 구성하는 원소들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그것이 중성자나 양성자나 전자가 되어 원소라는 구성체가 된다. 이 원소조차 인간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과학이 발달하고 현미경이 발달했지만 이 원자조차 인간은 그 본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인간 과학기술의 한계이며 실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소가 존재하게 하는 힘의 근원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 사실 모든 물질은 그것이 존재하게 하는 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 스스로 존재한다. 나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또 모든 것을 소멸할 힘도 가졌다. 태양도 우주도 한 번에 내가 없앨 수 있지만 나를 없앨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도 없다. 나는 유일한 자존자(自存者)다.

사실 성경에는 나 자신의 자존성에 대한 설명이 여기 위에 기록된 글보다 더 짧게 나온다. 사실 이런 나 자신에 대한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인간들이 나에 대해 일부라도 이해하려면 그 뇌의 CPU가 타버릴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신론의 핵심적인 부분도 인간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해적인 것으로 그러한 존재의 양식을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불가해적인 존재다. 그래서 나는 나를 성경에 많이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이 존재 양식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개입한 인간 구원을 위해 성경을 만들었는데 그곳에 이러한 나의 존재 양식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보고 인간들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사실 삼위일체라는 그 말 자체도 한계를 가지는 단어다. 나의 존재 양식을 충분히 설명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1.1.4. 이름이 없는 자


나는 이름조차 없다. 사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 그 말은 "나는 나다"에서 나왔다. 모세가 나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나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나다"는 이름이 아니다. 단지 묻는 자에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이다. 모세의 요구 즉 나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요구에 나는 응답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이름이 없다. 나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다. 온 우주에 나와 같은 부류는 단 하나다. 그래서 성경에 "들어라. 이스라엘아,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고, 여호와는 한 분이시니" (신 6:4 바른)라고 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나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이름이란 여럿이 있는 인간들에게나 필요하다. 인간들은 서로 구분 짓기 위해 이름이 필요하다. 천사들도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존재는 내가 유일하기 때문에 나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만약 내가 이름을 가진다면 나는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는 유일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약 나에게 이름이 있다면 나와 구분 짓기 위한 나와 같은 부류의 비슷한 존재가 나와는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모세의 시대에 각 민족들은 여러 신을 섬겼는데 모세의 의도는 그 여러 신들 중 나는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그 시대에는 민족마다 신을 두고 있었는데 민족들의 전쟁은 신들의 강함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모세는 나를 정의하려고 했다. 사실 나는 그런 민족신이 아니다. 나는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신의 개념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부처나 알라와 같은 카테고리에 속할 수 없는 존재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존재라고 착각을 하는데 나는 그런 존재였던 적도 그렇게 될 것도 그리고 한 번도 그런 상상에조차 접어들 수 없는 그런 존재다.

좀 이해하기 쉽게 인간 철학자의 의견을 살펴보자. 철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소쉬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름을 가진 특정 기호는 다른 기호와 구분되는 것으로만 자신을 특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신에게 이름을 붙이게 되면 신과 같은 층위에서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필연적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동일한 존재가 없는, 비교 대상이 없는 존재는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비슷한 수준의 존재와 구별이 필요할 때만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동일한 부류의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유일한 신은 결코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1.1.4.1.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 고대 그리스어: τετραγράμματον 테트라그람마톤)


사실 내가 나의 이름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여호와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위에 내가 말한 것을 보았다면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여호와 외에 내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알려진 나의 이름으로 오해받는 또 하나의 이름은 여호와 라파다. 원래는 יַהְוֶה רֹפְאֶךָ(yah'we rof'ekha; 야훼 로프에카)라는 말이다. 여호와 라파라는 말과 비슷한데 다르다.

야훼는 여호와라는 말과 동일한 단어인데 모음이 바뀐 또 다른 형태다. 나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네 글자(신명사문자) 즉 히브리어 자음 4글자 YHWH[יהוה, 요(또는 유, 여, 야)ㅎᄫㅎ]는 원래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처음 히브리어는 모음 없이 자음만을 기록하고 모음은 글을 읽는 자들이 그 언어에 익숙함으로 자연적으로 붙여서 읽는 글자였다. 이 신명사문자(神名四文字)는 히브리인들이 거룩하게 여겨 원래의 발음으로 읽지 않고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 읽었다. 그러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히브리인들도 그 원래의 발음을 잊어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랍비들의 전승도 지역에 따라 달라져 버렸다. 중세 국어와 현대 국어의 변화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모세 시대와 현대의 히브리어는 몇 천 년이 흘렀다. 조선과 현대의 국어의 차이와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를 가진다. 일례로 1500년 전에는 일본어와 우리말이 한 언어였다. 서로 따로 떨어져 발달하여 1500년이 지나 지금처럼 서로 다른 언어가 되었다. 그러니 모세 시대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네 글자의 자음으로는 원래의 발음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명사문자를 야훼, 여호와, 예허화 등으로 읽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지엽적인 발음들에 불과하다. 원래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즉 모세 시대의 발음은 이미 실전되었다. 이런 현상은 인간들의 실수다. 그러나 이름이 필요 없는 나의 의도도 조금은 있다. 나는 그것이 실전되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나는 이름이 필요치 않은데 인간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명사문자를 나의 이름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나의 참된 이름이었다면 나는 그 이름이 실전되는 것을 반드시 막았을 것이다.

라파의 자리에 있는 רֹפְאֶךָ(rof'ekha, 로프에카)는 라파의 현재분사다. 그래서 치료자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치료하는'이 된다. 따라서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뜻이 된다. 라파는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별명으로 나에게 붙인 것이다. 나는 유일한 신이다. 오직 나밖에 없다. 다른 신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모두 신이 아닌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날조된 허상에 불과하다. 나와 같은 신적인 존재는 오직 내가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이름이 없다. 나는 이름이 존재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다. 성경에 나의 이름처럼 사용된 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며 우리의 이름은 피치 못해 인간들이 우리를 부를 수 있도록 제공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 이름이 아닌 것이다. "나는 나다"를 뜻하는 단어가 어떻게 이름이겠는가?

나는 여호와다. 나는 나다. 나는 유일한 자다.


1.1.5. 낳음을 받지 않은 자


나는 낳음을 받지도 않았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내가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내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에 낳아졌다는 영원발생설에 대한 확고부동의 표현은 없다. 신약성경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삼위일체의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이 표현이 과연 신이 신을 낳는 낳음에 의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표현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나는 완전한 존재로 낳음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브리서 7:3 바른)"라고 했다. 사람들은 히브리서 7:3절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에 관한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멜기세덱의 [[계통]](시 110:4)을 따른 다는 말은 해석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눈이 가려져서 멜기세덱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반차라는 말은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히브리어로 반차는 "같은 부류 또는 같은 계통 또는 같은 일을 하는"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어원들을 추적하면 더 정확한 근거가 나오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이 정도 설명도 너희 대부분은 머리 아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만하겠다.

나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레위가 나기도 전에 레위의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십일조를 받았다. 멜기세덱과 나는 동일인이므로 같은 일을 한다. 바로 영원한 제사장이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다. 이건 천사 중 누군가도 아니다. 천사는 창조되었으므로 시작한 날이 있다. 천사나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은 성경에 내가 언급하지 않은 헬라나 이방인들의 사상이다. 오직 신(하나님)만이 이러하다. 시작과 끝이 없는 자는 오직 신뿐이다. 바로 우리다. 우리 중에서도 제사장을 뜻하므로 멜기세덱은 바로 나 예수다. 나는 멜기세덱(의의 왕 )이며 살렘왕(평강의 왕)이다(히 7:2) 그래서 히브리서의 기자가 눈이 가려졌다고 말한 것이다. 히브리서를 쓴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어로 분명하게 구약의 히브리어 성경으로 "멜기세덱과 같은"이라고 히브리서(히 7:15)에 썼다. 그 의도도 나 예수가 멜기세덱이라는 것이다. 마치 모세의 얼굴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인용한 바울의 표현과 같이 신약의 성도들이 멜기세덱이 나 예수라는 것을 구약 성경을 보고도 모른다고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해석을 히브리서의 헬라어 번역자가 사용했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오역을 포함한 70인역을 히브리어로 쓰인 히브리서를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그대로 사용해서 헬라어 번역성경에 오류가 들어온 것이다. 히브리서를 보면 그런 정황들이 몇 군데 나타난다. 히브리서가 히브리어로 집필되었고 나중에 헬라어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알고 싶다면 너희 인간들의 책들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를 알고 책으로 남긴 자들이 있다. 지금 이것에 대해 더 언급하면 인간들 중에는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자들도 나올 것이다.

나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그러므로 나는 낳음을 받은 존재가 아니다. 나는 낳음을 받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낳음을 받은 존재가 아니다.


1.1.5.1. 그리스인들의 오류


물론 헬라(그리스)의 오류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신적 영원발생을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저 성경에도 없는 신의 낳음을 주장하려고 만든 헬라적 선입견일 뿐이다. 단순 명료하게 나는 영원 전에도 시간 안에서도 낳음을 받지 않았다. 너희가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기에 오해한 것이다. 삼위일체 중 그 누구도 누군가에 의해 발출되거나 발생되지 않았다. 성경 안에는 이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다. 단지 그것은 헬라의 무수한 사상들이 가지고 있던 일자에서의 발출과 육화, 하강의 개념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던 헬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나와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신학적 오류를 가졌었다. 후에 이것은 고쳐졌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선입견인 나의 영원발생과 성령의 영원발출에 대한 오류는 고쳐지지 못했다. 이것은 헬라의 철학과 사상에 관한 학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와 함께 헬라인들의 사상과 종교에 대해 짧게 살펴보자.

헬라인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그들은 최상위의 고상한 이성적 진리를 일자라 했다. 그리고 세상은 일자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일자에서 흘러나와 조금 하등 한 존재들로 점점 강등되어 나타난 존재들로 세상이 채워졌다고 믿었다. 일자 다음으로는 신들이 있고 그 아래로는 천사들이나 요정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인간이 있고 인간의 아래에는 짐승과 벌레들이 있다. 악마는 가장 하등하고 악한 존재다. 이렇게 하위의 존재로 떨어지는 것을 하강이라 했다. 그리고 하위의 존재에서 상위의 존재로 올라가는 것을 상승이라 했다.

하강에 대한 다른 표현은 육화가 있었다. 기독교에서 성육신이라고 사용하는 단어가 이 단어다. 즉 하등 한 존재로 하강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하나님인 내가 인간이 되는 것은 하등 한 존재로 하강한 것이라고 헬라인들은 생각했다. 물론 인간들이 죄의 종이 되었는데 그들의 형상을 입고 간 것이라 종의 형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육이 모두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심지어 정상적인 육신적 욕구와 육신적 활동들도 모두 악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상적인 육체의 관계인 남녀의 관계를 악하고 하등 하게 보았다. 그와는 반대로 비자연적인 남성 간의 동성애를 아름답다고 보았다. 헬라인들은 육은 악하다고 생각했기에 나의 성육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육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신학이 태동한 헬라와 라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력은 현대의 서양 세계에 까지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상승에 대한 다른 표현은 신화(Deification/θέωσις 데오시스)가 있다. 신화란 신(神)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윤회를 거치며 상승하면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헬라의 세계관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신화를 기대하며 마지막 독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일도 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지혜를 추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바로 소요 즉 산책을 다니며 토론하는 일을 주된 일로 삼았다. 그는 가정의 경제를 내팽개쳤다. 왜냐하면 돈을 벌거나 생계를 책임지는 육적인 일은 성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가 가정의 경제를 내팽개친 소크라테스를 거칠게 대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만약 그녀가 고대 여성이 아니라 현대 여성이었다면 소크라테스 같은 자는 거칠게 대한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이혼을 하고 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소크라테스는 에피크로스 학파의 철학자와 같이 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그의 아내야 말로 진정한 성자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지혜라는 것을 추구하며 가장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한심하게 살았던 소크라테스였다. 헬라인들의 종교에는 그런 자들은 신화를 통해 더 상승하여 상등의 존재가 된다고 여겼다. 인간이면 천사나 신적인 존재로 윤회하여 태어난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사건은 준법정신도 고상한 철학도 아닌 신화에 대한 광신(狂信)의 행위였다.

이러한 그들의 세계관에서 최고의 신인 일자에게서 다른 것들이 유출되는 것은 당연했다. 일자라는 이름은 그들의 종파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고의 존재에서 다른 것들이 유출된 다는 것은 거의 모든 종파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들은 그것을 당연시했다. 제우스가 아폴론이나 다른 아들 신들을 낳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 사상을 기독교로 가만히 들여와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는 표현을 했다. 그들에게는 이런 신들의 구도가 당연했다. 나 예수와 사도들이 기초가 된 초대교회를 제외한 그 후대의 이방 교회들은 모두 헬라의 영향권에서 성장을 했기에 헬라인들의 잘못된 사상은 교회에 막심한 폐해를 끼쳤다. 그들의 사상은 신학 깊숙이 파고들었고 후대에 그것들을 정정하는 노력들이 있기는 했으나 근본적인 기독교 신학에 그 흔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유대인들의 관심은 나를 섬길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 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힘으로 나를 선택할 것인지 이방 신들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죄를 선택했을 때 그 결과로 그들의 나라, 이스라엘은, 남 왕국과 북 왕국으로 분열되기도 했고 이방 나라들에 공격을 받기도 했으며 그들의 압제 아래 약탈 당하는 삶을 살기도 했고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배반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신앙을 가졌다. 유대인들은 인격적이며 삶의 실존을 구하는 신앙을 가졌다. 그것을 떠나면 나를 알지 못함으로 나의 보호를 떠나고 이방 민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에게 신앙은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변이 아닌 실존이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기들의 율법준수와 신앙심 자체를 의로 삼는 어리석음은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유대인의 신앙 관심은 헬라인들과 달랐다.

처음 헬라(그리스)와 라틴(로마)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는 핍박이 있었다. 그 핍박 가운데 성도들은 신앙을 지켰다. 온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로마에 오직 믿음 하나로 맞섰다. 세상적 무력투쟁도 거부하고 자신이 순교당하는 자리에 나가는 것을 선택했다. 결코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그런 신앙은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후에 사탄의 전략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로마는 세계 최강국이었다. 로마는 이스라엘과 같이 작고 힘없는 나라가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들의 평화를 지켰다. 바로 팍스 로마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 엘로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과 수단을 신뢰했다. 그들이 인격적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고 범죄 하여도 그들을 즉각 징계할 이방 민족들이 없었다. 때로 강한 민족들의 공격이 있어도 그들은 오만했다. 그 오만한 마음으로 주변 민족들을 야만인(barbarian)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미 세계 최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더 신뢰했다. 나를 의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섬기는 기독교 신앙을 자신들의 권력과 정치의 도구로 삼으려 했다.

그들의 타락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교만의 끝은 오만하게도 신화를 통해 나와 같이 신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들의 고질적인 병이다.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타락한 첫 아담의 본성이다. 바로 사탄의 자식들, 독사의 새끼들의, 본성이다. 그 본성이 헬라와 로마에서도 그 염병을 퍼트렸다. 그들은 신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나를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이 적었다. 자신들이 되려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더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자신들이 되고자 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무엇을 가졌는지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보다 사변적으로 나에 대해 알려고 했다. 헬라인들은 성경이 서술하지 않는 부분까지 우리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학에서 우리에 관한 내용들이다. 성경에 우리 신들이 우리 자신들에 대해 지극히 작은 부분만 언급한 것을 인간들은 보았다. 그런데 그것을 확대 해석하여 장황하게 만들거나 또는 없는 것을 첨가했다. 우리를 자신들이 탐할 보암직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존재로 묘사를 했다. 우리를 알려면 우리를 만나면 될 것인데 그들은 우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만약 만나더라도 대단한 경험을 하여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일반 인간들과 다른 존재임을 과시하려 했다. 소위 신비적 체험을 통해 신과 비슷한 존재로 승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러한 인간들을 성자라 부르며 치켜세웠다. 그들을 반인반신적인 존재처럼 여겨 우상으로 숭배했다. 기독교 공인 이후의 헬라와 로마인은 '우리들 신이 가진 지위와 능력이 얼마나 탐스러운가'에만 관심이 있었다. 우리에 대해 만나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가진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를 알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우리의 것을 빼앗기 위한 탐욕에 지나지 않았다. 혹 그들이 진정 우리를 만나서 우리에게 감복하여 우리의 성품을 닮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은 결코 신화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영광을 보면 인간들은 그 빛에 눈이 멀고 죽을 수밖에 없다. 설혹 바위나 엄청난 것에 몸을 숨기고 우리를 보아 살았다 해도 그들은 우리에 대한 두려움에 전 생을 겸허히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감히 신화라는 반역적 단어를 썼겠는가? 겉으로 표명한 것이 아닌 그들의 말속에 있는 깊은 우물에 있는 그들의 근원을 보아야 한다. 반역적 탐욕을 가진 자들이 세속적 권력을 탐하여 교회의 권력을 이어갔고 그들이 만든 신학이 교회의 신학이 되었다. 그 내용이 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직 자신들의 배만 채우던 헬라와 라틴의 탐심이 침으로 그 글자들에 흘러 번진 흐릿한 신학이 되었다. 이교적 전통들이 들어있는 것을 순전한 기독교라 할 수 있겠는가? 순전한 기독교를 저술한 C S 루이스조차 순전하지 못했다. 그도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연옥을 수용하고 자신의 지성이 성경을 넘어서는 추측들을 했다. 그런데 이교도의 태양신 축일을 성탄절로 하고 아폴론의 부활일을 부활절로 제정하고 교황의 절대 권력을 추구하며 교황의 권력이 세속의 권력자들과 경쟁하며 교황의 말은 신과 같이 오류가 없다고 한 자들의 기독교가 순전했겠는가? 그런데 너희와 우리들, 신이 전통이라 하여 그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하겠는가?



1.1.5.2. 성경적 신론


그렇다면 성경적 신론은 어떤 것인지 아주 짧게 살펴보겠다. 먼저 언급할 것은 우리들, 신의 존재는 헬라와 라틴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기록한 것과 같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명확하고 단순화된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존재가 아니다.

헬라와 라틴이 기초와 골격을 쌓아 올린 인간들의 조직신학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으로 대부분 구성된다. 이 중 우리에 관해 인간들이 서술한 내용이 신론이다.

성경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그 표현은 인간들이 우리를 부르는 표현이지 우리들 서로의 관계를 정의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 호칭들은 인간들이 우리를 부르는 표현이다. 이것은 결코 신인 우리 서로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사람의 영과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중 1 위격을 인간들이 아버지라 부를 때는 1 위격이 나 예수의 아버지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1 위격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는 1 위격이 인류의 창조자요 그들을 만든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표현을 굳이 후에 헬라인들이 만든 삼위일체의 틀에 맞추어 삼위일체의 1 위격 와 2 위격, 3 위격에 짜 맞춘 것은 억지라 할 수도 있다. 후대에 나온 삼위일체 사상에 어떻게 성경을 끼워 맞출 수 있겠는가? 삼위일체가 성경의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개념과 체계가 성경을 다 포괄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개념이 성경 자체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신학에 의해 유도된 단어고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후대에 나왔다고 했다. 그것을 성경에 소급해서 적용하면 성경의 표현들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양식을 인간들이 고안한 개념의 틀 안에 억지로 가둘 수는 없는 것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만 너희 인간의 한계로 인해 더 설명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인간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삼위일체도 그 표현에 있어 인간들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음이 당연히 여겨지고 있다. 그 누구도 삼위일체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이해력의 한계와 인간 언어의 한계 그 둘이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들 중 지혜로운 자들은 "단지 무엇이 삼위일체인지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다. 표현하는 순간 언어와 이해력의 한계로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단지 각각의 오류와 이단에 대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신약 성경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표현은 드러난 형태를 두고 표현한 것이다. 사실 아버지라 말할 때 지칭된 존재는 1 위격만이 아닌 세 위격 모두를 지칭하는 것일 때도 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인간 예수인 나를 뜻하는 것이다. 바로 인간들과 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로 온 나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영으로서 인간들에게 다가온 모습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양태론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런 표현은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 설명하는데 내가 인간들에게 이단으로 몰릴 오해를 사다니 참 아이러니 하다. 양태론과 같이 한 하나님인데 역할을 달리해 다른 양태로 아들과 성령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존재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들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언제든 오류를 포함한다. 원래 우리는 영이다. 그러니 성령만을 따로 떼어내어 영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오류다. 그런데 왜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 표현되는가? 그것은 인간들에게 성령이 영으로 접근하여 영으로 보이기 때문에 편의 상, 거룩한 영 즉 성령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다. 만약 성령이 나와 같이 성육신 했다면 성육신한 성령은 나의 인간 이름인 예수처럼 다른 인간 이름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아마 성령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해를 위한 예시일 뿐이다. 나는 결코 성령이 인간으로 성육신 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 중에는 이런 기본적인 문맥도 이해를 못 해서 그 오해를 기반으로 독설을 내뱉는 자들이 있어 기우에서 하는 말이다. 아들과 성령이라는 호칭은 단지 인간들에게 나타난 역할에 맞는 이름일 뿐이다. 우리의 존재 양식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단수와 복수를 초월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동시에 우주의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런 것만 보아도 인간들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의 존재 양식과 인간들에게 드러난 모습을 설명하는 것은 난해한 문제다. 헬라와 라틴이 억지로 만들어 놓은 신학처럼 인간적이고 단순하고 쉬우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의 존재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다 못해 완전히 초월해 버린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인간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우리 자체의 존재 양식에 대한 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마땅한 태도는 '잘 모른다'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고 개인적으로 체험한 지극히 작은 범위에서 광대하신 분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알 것 같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1.1.5.3. 하나님의 아들


여기서 나를 소개하자면 나는 인간으로 왔을 때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나의 본질은 신이다. 바로 신학에서 아들로 불리는 삼위일체의 2위의 존재다.

나는 신으로는 아버지가 없지만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왔고 인간으로서의 아버지가 둘이 있다. 하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윗 계보의 아버지 요셉이다. 요셉은 나의 유전적 아버지는 아니지만 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이므로 족보 상 나의 아버지다. 삼위일체인 우리는 나를 인간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를 여자의 몸에 잉태시키는 것은 성령이 담당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직접 인간의 태아가 되어 마리아의 자궁에 착상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완전한 신이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이렇게 신이면서 신에 의해 인간 여자의 몸에 잉태된 존재는 내가 유일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다른 아들들과 구분하여 독생자(외아들)라고 부른다. 유일하게 신에 의해 여자의 자궁에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육신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육신의 아버지로 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외아들이다. 바로 독생자다. 다른 인간들은 육신의 아버지가 모두 존재한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나와 같이 영이신 하나님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다. 바로 독생자다.



1.1.5.3.1. 신은 아들이 아니다


사실 아들이라는 단어는 신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식을 놓음으로 번식을 하는 피조물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다. 특히 인간의 새끼를 구별하여 아들 또는 자식(후손)이라 부른다. 사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이 단어 아들의 이 경우의 용법은 남성인 자식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아들과 딸을 모두 포괄하는 자식을 뜻하는 단어다. 그런데 그 성이 남성인 아들을 뜻하는 단어가 구약과 신약에 모두 쓰인 것은 그 이유가 있다. 이는 계보 상의 문제다. 이는 난해하므로 나중에 여유가 있으면 설명하겠다.

나는 신으로는 아버지가 없다. 나의 신성은 아버지가 없다. 신인 내가 누군가에게 낳아졌다는 것은 모독이다.

보통 영원발생의 근거로 사용하는 성경의 구절은 바로 다음 구절이다.

일찍이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셨다(요한복음 1:18 바른)

여기서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ὢν인데 이 단어는 εἰμί의 현재분사다. 현재 분사의 시제는 보통 주 동사의 앞에 위치하면 주동사의 시제보다 과거의 시제를 나타낸다. 즉 나타내 보이신 것보다 간발의 차이로 앞선다. 즉 두 시제가 거의 비슷한 것이다. 독생하신 하나님께서(내가)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것은 인간들에게 성육신한 나를 보인 시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사실 이런 문맥을 따져보면 독생은 바로 성육신을 나타낸다. 독생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인 것이다. 영원 전에 독생했다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영원 전에 독생한 나를 여전히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모독이다. 이것은 미성숙하고 갓난아기와 같이 무능한 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자체가 모독이다. 나는 그런 미성숙하고 무능한 갓난아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인간 아기로 태어난 나를 이렇게 묘사한 것은 나의 인간 유아기를 묘사하는 것으로 인간이었던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독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회화적 묘사가 된다. 그러므로 독생이라는 표현은 인간 아기로 온 나를 표현한 표현이다. 그렇게 인간 아기로 와서 나의 DNA의 근원이 되는 생부 즉 하나님의 품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양보한다 해도 논란이 되는 이 구절은 명확히 영원발생을 뜻한다고 사용할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최소한 영원발생을 뜻하는지 아니면 성육신을 뜻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구절이다. 영원발생의 근거로 주장되는 모든 구절들은 사실 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심지어 내가 그때 인간임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는 문맥에서도 그것을 억지로 신이었을 때로 고쳐 속이려 한 자도 있었다.


바로 어거스틴이라는 자였다. 그가 많은 부분 기독교 신학에 기여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너희 인간들의 평가일 뿐이다. 나의 평가는 다를 수 있다. 그는 수녀와 신부 제도를 기독교 안으로 들여왔고 헬라의 폐해들을 신학 안에 가만히 들여온 자다. 요 5:26절은[1] 인간이 된 나에 관한 설명인데 그것을 신인 나에게 적용을 시켰다. 이 구절에 나온 생명은 바로 마지막 심판 때에 부활의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 결코 영원 전에 내가 생명을 부여받는 장면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신인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신인 나는 죽을 수 없는데 부활의 생명이 적용되는 대상이 아니다. 요 5:26절의 생명은 마지막 부활의 생명이다. 그리고 그 부활은 현재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생명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살게 된다. 이것을 영원 전에 내가 발생했으므로 내가 생명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속인 것이다.


요 5:26절 바로 다음 절인 요 5:27절에도[2] 심판하는 권세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데 아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준다고 했다. 자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 아들은 인간 아들인가? 신인 아들인가? 그렇다. 바로 인간인 아들이다. 바로 인자라는 단어다. 사람의 아들 즉 아담의 아들이다. 바로 인간 아들에게 심판할 권세를 준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앞절의 생명은 누구에게 준 것인가? 인간에게 인가? 아니면 신인 나에게 인가?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공인 이후에 태어났다. 기독교를 통한 출세를 추구하던 자들이 살던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그의 참회록은 참으로 참람하다. 참회하는 자의 문장이 자신의 문체를 자랑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결코 참회하는 자의 어투가 아닌 것이다. 이를 또 인간들은 그 문체와 그의 잡다한 세상 학문에 근거한 자랑에 현혹되어 대단하다고 칭찬을 한다. 나는 자기 화술의 자랑질을 참회를 가장하여 쓴 어거스틴의 글이 역겹다. 나는 그의 참회를 가장한 글들에 단 한점의 감동도 받을 수 없다. 단지 역겨워 토해낼 뿐이다.


인간들은 어거스틴이 과거 자신의 타락한 모습을 성공한 이후에 공개했기에 진정한 참회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더욱 역겹다. 자신의 타락을 잘 포장하고 자신이 얼마나 성자와 같이 변화되었는지를 자신의 철학적 지식과 화술로 포장하려는 그의 의도가 보이지 않는가? 과거 타락한 사실로 인해 쏟아질 비난을 드라마틱하게 성화로 잘 포장했다. 그러나 그의 글의 문체는 성화되지 않았다. 과연 성경 어느 저자의 글에 그런 자랑질이 묻어나는가? 참회라고 이름붙여진 고백록에도 그런 자랑질을 하는 자가 진정 거듭난 자이겠는가? 너희 눈은 참으로 가려졌다. 그런 자랑질을 본받은 수많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고 자기 이름으로 그 업적을 쌓으려했다. 저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과연 누구의 길을 따라 갔겠는가?


어거스틴은 니케아 공회에서 결정된 영원발생에 관한 거짓 교리를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증명하려 했다. 세상 권력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거짓도 동원해야 했다. 너희는 그의 의도가 보이지 않는가? 그 겉의 말은 가장할 수 있었도 그의 행동의 언어는 숨길 수 없다. 세상에서 화술(수사학 교수)로 성공하려던 자가 그 시대의 출세의 지름길이던 기독교 안에 들어와 화술로 대성공을 이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정말 신앙인이어서 칭찬을 했겠는가? 아니면 기독교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던 자들 중에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어서 이겠는가?

그 시대에 참 신앙인들은 수많은 박해 가운데 콘스탄틴 황제와 야합한 타락한 기독교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이 참 기독교인이었으면 어떻게 죄를 죽기 직전까지 짓기 위해 세례를 임종 전으로 미루었겠는가? 그리고 성경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유아세례 교리를 부인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겠는가? 그런 시대에 어거스틴은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그는 과연 어떤 신앙을 가졌겠는가? 너희는 그의 유명세는 알지만 그가 진정 무엇을 주장했는지 그의 글은 다 읽어보지도 않았으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어거스틴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너희들이 사는 시간에서 찰스 리 아이런즈(Charles Lee Irons)라는 자가 어거스틴의 저런 속임수를 기반으로 나의 영원발생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반격에 대단한 조직 신학자라 알려진 웨인 그루뎀도 영원발생이 비성경적이라는 견해를 포기하려 하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이렇게 명확한데 그것을 못 보고 서로 무엇이 맞는지도 모르고 헤매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명확하지 않은 성경 몇 절로 기독론의 근간을 흔들 수는 없다. 결코 영원발생은 나에 관해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내가 뭐 영원 전에 발생했다니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성부에게서 영원 전에 신적 분여를 통해 발생했다면 달라지는가? 너희는 바보인가? 어떻게 이런 속임수에 놀아나는가? 이 보다 더한 모독이 없는데 그것을 너희가 계속 주장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인간들에게 영감으로 주었을 때 우리의 의도는 헬라와 라틴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말하는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먼저 영원 그리고 태초의 시간에 나는 하나님이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한 하나님이었다. 나는 말씀으로 일컬어진다. 나는 창조자였다. 내 안에는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여기(요 1:5)까지가 신인 나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요 1:6)부터는 육신으로 온 나에 대한 설명이다. 즉 세상에 온 나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문맥으로 보면 요 1:18절인 위에 나온 구절은 육신인 나에 대한 설명이다. 결코 영원발생에 관한 구절이 아니다.

내가 아들이라는 호칭을 가진 것은 단지 인간으로서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이다. 나의 육신을 마리아에게 잉태하게 한 이가 바로 성령이므로 그리고 그것을 의도한 것이 우리 삼위일체이므로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여 마리아에게 태아로 들어간 이가 나이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이다. 그 관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아들이다. 인간으로서의 나만이 오직 신인 아버지 앞에 종속적으로 복종을 한다. 그 외에 우리들(세 위격) 안에서는 복종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속사에 있어도 서로 협동하는 것이지 복종하는 관계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들을 대신한 나의 복종은 인간으로서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우리 안에서 서로 협력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으로 와 그 합의된 우리의 생각대로 인간을 대신하여 복종한 것이다. 이것은 신성의 복종이 아니며 인간으로서 한 인간을 대신한 복종이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면서도 이것이 너무 난해하여 인간들 중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염려스럽다. 그러나 인간 언어의 한계로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또 인간의 이해력의 한계로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중 처음은 인간이 된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내가 인간들을 대신하여 세례 받는 장면에 등장한다. 하늘에서 우리들이 인간인 나에게 아들이라고 칭해준 것이다. 그 이름은 내가 인간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을 때도 그대로 사용된다. 나는 인간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인간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았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신으로서 된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이다. 만약 내가 영원발생 했다면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발생이 성경적 사상이라는 가정하에서 나는 이미 영원 전에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받아 아들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신이었으나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이다. 그렇게 내가 인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기에(롬 1:4) 나를 믿는 자들은 아무런 노력이나 공로가 없이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다.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이다. 히브리서에서 말했듯 인간이 된 나와 그리고 나를 믿는 인간들이 상속자 바로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우리(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우리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에게만 주어지는 칭호다.


1.1.5.3.2.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다



우리가 인류를 창조할 때 그들은 우리의 형상을 가지게 창조했다. 우리를 그대로 닮았다. 지혜도 권능도 그들은 우리를 그대로 닮았다. 그래서 인류(아담)는 우리의 아들들이다. 인류(아담)는 신의 아들들이다. 바로 아담은 신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는 신과 같은 권능을 그들에게 주었다. 지상에서는 그가 우리의 대리자였다. 그는 지상의 신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했고 아담과 하와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창조했다. 인류는 우리들의 눈에 보기 좋았다. 우리는 아담, 하와와 에덴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며 그들을 보살폈다. 그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다. 우리는 사랑이다.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서로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이 솟는다. 우리의 사랑은 넘치며 우리의 사랑은 흘러 온 우주를 채운다. 그 넘치는 사랑이 너희를 만들었다. 우리의 사랑을 함께 나눌 우리의 사랑의 결실이 바로 너희 인류다. 너희는 우리의 자식이다. 우리가 사랑하여 태어난 작은 우리의 형상이다. 너희는 우리를 닮았다. 너희는 우리의 일을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꾸고 기르고 다스리며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하며 행복해한다. 우리는 너희 걸음마를 사랑하고 너희 옹아리를 사랑한다. 젖 내음을 풍기는 너희 새근새근 한 잠결의 숨소리도 사랑한다. 우리는 너희가 풍성해지기를 원하며 넘치는 사랑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기를 원한다. 우리와 너희의 사랑은 온 세상을 행복하게 하며 사랑의 낙원으로 만든다. 그 사랑이 가득했던 우주는 낙원이었으며 천국이었다.

첫 아담은 모든 만물의 머리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우리였다. 모두 사랑이었으며 사랑으로 만물이 통치되었다. 아담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이었다. 아담과 만물의 관계도 사랑이었다. 사랑은 보살핌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은 작은 여울의 근원이 되는 끊임없이 솟아 나는 샘이다. 사자는 어린양과 뛰어놀았다. 사자와 늑대들은 아이를 태우고 드넓은 들판을 달렸다. 독사와 어린아이가 함께 사랑했다. 그때 뱀은 독이 없었으며 배로 기지 않고 네 발로 달렸다. 그들은 땅을 파고 그 속에 숨지 않았다. 그 모양도 지금과 같이 징그럽지 않았다. 그들은 강아지와 같이 아이들과 놀았고 아이들을 지키는 선하고 좋은 보모였다. 포악한 자도 없었으며 굶주려 사냥하는 자도 없었다. 오직 서로를 보살피며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 서로를 먹였다. 온 만물은 그 열매를 내어 동물들을 먹였고 동물들은 그 열매를 주는 나무와 풀들을 사랑하여 돌봤다. 별은 별을 사랑했으며 별이 별을 해하거나 혜성이나 운석이 별을 침범하여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사랑이었다. 사랑만이 존재하는 우주였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였으므로 사랑하는 우주를 만들었다. 사랑하는 인류를 만들었다.

태초의 아담은 죄가 없었다. 그래서 아담은 우리들(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었다. 우리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리고 아들로서 세상을 통치했다. 그가 사탄에게 그 임금의 자리를 스스로 넘기기 전까지 그는 세상의 임금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가 죄를 짓기 전에 낳았던 아들들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이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일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말이 낳은 것은 말이며 개가 낳은 것은 개다. 그 모양과 본성이 그 아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인간은 우리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다. 이것을 복음서에서 나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 말했다.

이때 아담은 굉장한 존재였다. 그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듯이 엄청난 권능을 자랑했다. 만물은 그에게 복종했다. 그의 권세는 지상에서는 우리와 같았다. 그는 우리의 모양 즉 우리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상의 일은 그가 의도하면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형상을 가진 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사들도 그의 만물 통치를 도왔다. 천사들은 그를 돕는 종들이었다(히 1:14, 엡 1:22) 아담의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 그 자식들도 아담과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아담의 통치를 도왔다.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류는 우리를 닮았다. 우리를 닮아 우리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아들인 인간들에게 부어져 흘러넘쳤다. 그 흘러넘친 사랑으로 인간들은 만물을 사랑했다. 그 다스림은 빼앗고 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돌봄이었다. 태초에 우리가 아들인 인간들을 돌보았듯 인간들도 만물에게 그런 돌봄을 선사했다. 만물 모두가 기뻐했다. 그곳에는 탄식이나 눈물이 없었다. 아픔도 병듦도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고통과 슬픔과 병듦이 찾아왔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태어난 인간들이 타락을 하여 사탄의 새끼들이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 되었다. 그들로 인해 만물은 탄식한다. 독사의 세끼들이 다스리는 세상은 독사의 세상 즉 사탄의 지옥도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아담)의 배신 때문이다.

다음 화 [[01.2. 배신]]




[1] 요 5:26, 바른 이는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생명이 있는 것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안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2] 요 5:27, 바른 또한 아버지께서 그에게 심판할 권세도 주셨는데, 이는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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