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민들레
민병식
이제 봄이 완연하다. 봄을 상징하는 철쭉, 개나리, 개망초 등이 화사하게 꽃을 피우며 지천으로 거리를 수놓는 패션쇼를 벌이고 있다. 나는 도심의 공터나 길가 , 하천변에서 보는 민들레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노란 색의 민들레는 거의 우리나라 토종이 아닌 유럽이 원산지인 귀화식물로 서양 민들레이다.
노랑민들레는 도시 쪽에 주로 많고 토종민들레는 교외나 시골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토종은 노랑색도 있고 흰색도 있는데 개체수가 계속해서 줄어 들고 있다. 도시의 개발이 가속화 됨에 따라 토종 민들레가 외곽으로 물러나고 그 이후 서양 민들레가 공터나 인위적인 자연환경에서 토종민들래와의 경쟁없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토종과 재래로 분리할 수 없다. 비록 외래종이지만 온실이 아닌 도심의 길거리에서, 심지어는 보도 블럭의 틈 사이에서 솟아 오른 민들레에게서는 강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있다. 회색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에서 민들레같은 꽃마저 없었더라면 도심의 풍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삭막해지지 않았을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다문화 가족이 점차 늘어나 우리 사회의 한 축이 되고 있는데, 기존에 붐이 일었던 농촌 다문화 가정 외에도 요즘은 국적에 관계없이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국제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당연한 추세로 글로벌시대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문화가정이 차별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대한민국의 국민임에도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다고 무시당하거나 차별을 받거나 하는 경우와, 또 다문화 가정의 자녀가 또래의 청소년 들에게 학교폭력의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는 엄연한 인권침해이며 잘못된 일이다. 만일 한국인이 외국인과 결혼하여 그 나라에 가서 살 때 인종차별을 받는다면 우리 국민의 마음이 어떨까.
평화와 희망의 꽃말을 가진 데이지 꽃이나 도시 미관을 위해 공공기관, 공원 등의 화분에 많이 심어놓은 페튜니아가 외래종이라고 해서 사람 들이 멀리하고 감상을 꺼리지 않는다. 어떤 꽃이든 존재가치가 있고,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는것이다. 반려견 천 오백만 명 시대를 지난 요즘은 반려견을 기르는 집이 한 집 건너마다 있을 정도로 많은데 가족같이 여기고 생활하는 반려견 중에서 우리나라 토종개인 진돗개나 풍산개가 얼마나될까. 작은 체구를 선호하는 특성상 모두 외래종임에도 애지중지 하면서 키우지 않는가.
비록 외래종이긴 하지만 우리의 땅에 정착하여 시멘트로 가득찬 메마른 도시에 불쑥 피어난 한 송이의 민들레가 사막과도 같은 도시에서 한 방울의 생수같은 기쁨을 선사한다. 다문화 가정의 배우자나 아이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배우자이고 자녀이고 그 자체로 꽃처럼 기쁨을 선물하는 존재일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 그 자체로 존중받을 권리와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꽃이 없는 곳에서는 벌이 살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존중한다면 꽃의 마음은 우리에게 몇십 배, 몇백 배로 꿀처럼 달달한 세상을 돌려줄 것이다.
날씨가 점점 온화해진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오후의 회사 앞 뜰에 불쑥 민들레 한송이가 나타나 방긋 웃고 있다. 아! 정겹고 기특하다. 몰아치는 바람과 비를 이겨낸 질긴 생명력, 살펴보니 무심한 사람 들의 부침을 온몸으로 받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수만은 역경을 딛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씌앗을 띄우고 꽃을 피워낸 민들레야말로 사랑을 듬뿍 받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꽃은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향기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길가에 꽃 한송이도 이렇듯 기쁨을 주는데 하물며 꽃보다 예쁘다는 인간이 꽃의 마음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따뜻한 봄 날씨 처럼 우리의 마음도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함을 꽃으로부터 배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