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낙엽의 향기
민병식
일요일 오전이다. 오랜만에 실컷 늦잠을 자고 바람을 쏘일 양으로 밖으로 나간다. 아파트 놀이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고 거기에 장단을 맞추듯 나무들이 흔들 흔들 잎을 떨구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안 다더니 무수히 떨어지는 잎들의 춤 사위 앞에서 가을 깊숙이 들어왔음을 알겠다. 기온은 비슷해도 봄 햇살, 봄바람과는 달리 역시 가을은 무언가 정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가을은 고독의 계절,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계절이라고 불리는 것이겠다.
나무 들은 올 해의 마지막 축제를 준비 중이다. 바로 단풍과 낙엽의 잔치다. 겨울을 보내기 위한 준비 과정인 것이다. 아파트 앞 정자에 앉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자니 떨어지면서도 마지막까지 새의 날개 짓처럼 우아함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러고 보니 다음 해 봄 날의 새 생명을 밀어 올리기 위해 떨어져 거름이 되어야 하는 운명임을 알고 열심히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까지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준다. 사각사각, 소리를 남기고 떠나는 낙엽에게서 세상을 위한 밀 알이 되는 모습을 배우는 시간이다.
낙엽이 주는 가을의 흩날림 속에서 마음과 대화를 나누어 본다. 살아가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아니 될 일이고 남이 손해 보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
들이지는 않았는지,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라고 생각되면 억울해 하며 분해하지 않았는지 돌이켜 본다. 겨울을 향하는 길목, 나무에 기대어 쌀쌀한 날씨보다 내 마음이 더 차갑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따뜻한 마음으로 바꾸어 채워야 한다. 낙엽은 단풍 든 모습의 아름다운 시절에도, 비쩍 말라 떨어지지 직전의 비루한 시절에도 자신의 모든 삶을 남을 위해 살아갈 준비를 하는데 나는 어떠한가.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번데기가 되어 겨울을 견디는 곤충 들에게 썪어서라도 잠자리가 되어주는 낙엽의 경건한 희생은 낙엽처럼 늘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썩지 않는 방부제 같은 탐욕을 버리고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준다.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 인양 하고 살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은 천 년 만년 가지 않음을 낙엽은 마냥 움켜쥐고 발버둥 치며 놓치지 않으려는 추한 모습의 우리들에게 비우고 나누고 베풀며 사는 휴머니즘의 정신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때가 되어 썩어짐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낙엽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은 두 손에 움켜줜 것을 꽉 쥐고서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놓아야할 때 놓치 못하는 염치 없는 모습을 얼마나 많이 목도하는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손을 뻗어 잡으려 하는 순간 낙엽이 내게 속삭인다. 추위가 오면 더 없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 들을 위해 무엇을 내 줄 것이며 무엇을 나누고 살 것 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낙엽은 선한 영향력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지금껏 낙엽이 떨어지면서 왜 방향을 알 수 없는 비행을 하는지 종착지는 어디인지도 잘 몰랐다.낙엽은 예쁘게 물들어 떨어지든지, 벌레가 파먹어 구멍난 모습으로 떨어지든지 겉모습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의해 떨어지는 곳이 종착지이고 그곳이 어디든 불만이 없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삶을 마감할 뿐이다. 아파트 앞 보도블럭에 떨어져 마대자루에서 운명을 마감하든 화단에 떨어져 거름이 되든 자신의 역할에 묵묵하고 겸허하게 순응하는 것이다. 늘 떨어지면 쓸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으로 필요 없어 보였던 낙엽에게서 겸손한 삶의 방향과 다음해 새 순으로 환생할 희망의 생명력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홉을 가지고 있음에도 열을 채우기 위한 버둥거림보다 하나를 가져도 조금을 떼내어 나눌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낙엽의 마음이고 이기의 세상을 사랑으로 채워가려는 조건없는 이타의 정신이 바로 낙엽이 내뿜는 향기다. 날로 각박해지고 사나워지는 세상이다.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잘사는 것이 무엇이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낙엽에게서 겸손함과 순응과 사랑과 희생의 마음을 배워야한다. 낙엽이 떨어지면서 보여주는 광경에 지금이 가을이며 곧 겨울이 올것이라는 계절의 흐름을 인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겨울을 버티기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낙엽의 마음으로 겨울을 이겨내는 숲을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내지 못하는 낙엽의 향기를 가슴에 담아 우리 사는 세상을 가득 채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쌀쌀한 바람에 날려 낙엽 한 녀석이 내게 달려와 발 밑에 멈추고 말을 건넨다. 나는 오늘 낙엽과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