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無用)한 것들의 존재에 대하여
힐링 에세이
[에세이] 무용(無用)한 것들의 존재에 대하여
민병식
가을 속으로 깊이 들어와있는 있는 즈음, 쌀쌀한 아침 기온을 밀어내는 한 줄기볕이 한껏 감사한 날이다. 오늘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모자람없는 완벽한 평온의 날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날엔 산책이 제격이다. 아침부터 헬스클럽으로 운동을 다녀왔더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역시 약속이 없는 주말은 긴장이 풀려 그런지 널부러지는 느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의 날이기도 하지만 왠지 하릴없이 이 생각 저 생각에 갈 곳없는 따분함과 지겨움이 반복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없이 한참을 누워있자니 근질근질 몸의 재촉으로 동네로 나섰다. 몇년동안 눈 안에 담아온 익숙한 풍경들, 다닥다닥붙은 아파트 벽 사이로 쓰레기를 줍는 경비 아저씨와 인사를 하고 평소 잘 사지도 않는 면봉의 위치까지도 어디에 있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사서 늘 앉는 정자의 나무의자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며 휴일의 안락함인지 아주 어려서부터의 스스로 깨달았던 습성으로 한곳에 오래 머물러있지 못하는 산만함인지 모를 감정들을 달랜다.
문득 초등학교시절 성적표에 담임 선생님이 써놓았던 글들이 생각난다. 성적과는 별도로 산만하다라는 단어는 1학년때부터 6학년 때까지 빠지질 않았으니 아마 요즘같았으면 ADHD판정을 받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그저 산만함
인줄만 알고 있었을 부모님을 포함해 나조차도 판정받아본적 없는 아무도 모르는 나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시간이다.
자리에 앉아 풍경을 감상한다.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삼삼 오오 몰려다니는 동네 아이들, 걷기 운동을 하며 열심히 건강에 집중하려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비둘기 떼들의 먹이활동을 멍 때리듯 쳐다보기도 한다. 그것도 지겨우면 동네 한바퀴를 돌기 위해 나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북이가 등껍질을 이고 행군하는 모습처럼 그릿느릿 발걸음에 몸을 싣는다. 낙엽이 한껏 떨어져 있는거리, 마음같아선 오리떼가 한가로이 노닐고 나뭇잎 팔랑팔랑 휘날리는 천변을 걷고 싶지만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은 도심 중에서도 도로와 아파트, 상가로 가득한 곳이고 커다란 공원도 멀리 떨어져 있다.결국 걷기나 산책을 하려면 차다니는 소리가 빵빵거리는 인도나 차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주택가 골목을 다닐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크지만 그나마 걸을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한다.
요즘같은 가을날의 산책은 여러가지로 바쁜 현대인들에겐 여유를 느끼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여가 활동으로 몸과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됨은 틀림없을 것이다. 무엇이 행복일까. 힘들고 지친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쉼을 갖으며 아주 작은 일상의 것들에서 느긋함을 찾는 것, 빠름에 끌려다니지 않고 천천히 거닐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것, 나무 냄새 그윽한 벤치에서 책을 읽으며 책 속의 인물들과 대화하는 것,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소한 행복은 많다. 낙엽의 소근 거림과 직박구리의 부산한 날개짓 , 어쩌다 만나는 무용한 모든 것들과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고 배달 오토바이의 으르렁거림과 지나는 차들의 경적소리, 비닐 코팅을 하여 책갈피로 쓸수 있는 예쁜 색의 단풍과는 달리 말라 비틀어져 바닥에 깔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있는 부채만한 낙엽송이까지 그 어떤 무용한 것들에게도 가을의 풍성한 마음을 불어넣는다. 그렇다. 무용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무탈하다는 거다. 아무 의미없이 눈에 들어오는 대로 주변의 사물 들을 감상하고 눈길을 주는 것, 어찌보면 할 일이 없어 시간 때우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으나 세상의 모든 무용한 것들과 어울리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무용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무용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삶의 세포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유용한 것들을 사랑하는 세상이다. 좋은 집, 고액의 연봉, 높은 지위 등 그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또, 세상이 평가하는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또 타인을 얼마나 수없이 망가뜨려왔는가. 어쩌면 우리는 하염없이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흩날림과 그들이 사라져 갈때 쯤 나타나는 유리창의 입김, 창틀에 끼인 먼지를 떨어낼 때쯤 보이는 나무들의 꿈틀임 등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하찮게 생각되는 무용한 것들 덕택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고 있는지, 아니 알면서도 모른체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가을의 하루가 덤덤히 흐르고 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지겨우면서도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오늘 이 시간의 궤적들이 훗날 아무 일도 없어서 가장 행복했던 날로 기억될 지도 모를 일임을 상상하며 무용한 것들은 그저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하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음을 깨달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