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고향에서 부모님은 콩나물 공장을 하면서, 돼지를 키웠는데, 게다가 아버지는 공직에 몸담고 계셔서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콩나물이 잘자라는지 병충해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콩나물을 자식보듯 보시고 출근을 하셨고, 어머니는 돼지들이 밤새 별일이 없는지 돌아보고, 돼지의 아침을 준비하기위해서 커다난 가마솥에 쌀뜬 물, 음식물, 사료 등을 넣고 끓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아침나절이 되어서야 마무리를 하고 바로 아버지는 회사로, 어머니는 돼지들이 먹을 음식물을 얻기 위해 바로 읍내 식당, 중국집 등을 순회하셨으니 그때의 고생은 어른이 된 내게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런 부모님의 억척스런 생활력 덕분에 친구들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농사일을 돕거나 소여물을 준비할 때에 나는 세계문학전집의 이솝이야기를 읽거나 이순신 장군 위인전 같은 책을 읽으며 여가시간을 보냈으니 1970년대 가난한 농촌마을 치고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경이었던것으로 기억한다. 마을에 서울에서 온 젊은 아저씨들이 어린이 백과사전을 팔러다녔는데 구입 조건이 봄과 가을에 두 번, 구매한 가정의 초등학생 자녀를 대상으로 서울 역사 유적지에 데려가 견학을 시켜주는 조건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어느 누구보다 높았던 부모님께서는 선뜻 비싼 백과사전 전집을 구입하셨다. 그후로 한 달 정도가 흐른 후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주말에 서울에서 선생님이 오셔서 아이들을 데리고 조선시대 왕궁인 경복궁을 가니 김밥을 싸주시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견학 당일, 어머니께서 정성스레 싸주신 김밥 도시락과 지금은 무한리필 고기집에가면 원하는대로 마음껏 기게에서 따라먹을 수있는, 흔하디 흔한 청량음료이나 그 당시는 소풍 때만 먹을 수 있었던 콜라와 환타 각 한병을 가방에 담고, 각 마을에서 책을 구입한 집 아이들 십여 명이 서울에서 온 선생님을 따라 출발하였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기차를 타고 출발, 청량리 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다른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근정전 앞에서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던 모습, 아이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점심을 먹을 때 음료수가 있었지만 먹지 않았다. 집에 두고온 여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에 혼자만 먹는 미안함과 오빠로써 동생을 챙겨주어야한다는 마음으로 김밥만 먹고 음료수는 아껴 두었다가 집에 가져가서 사이좋게 한 병씩 나누어 마실 요량이었고, 음료수를 먹고 싶어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라 중간 중간 마시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다.
견학이 끝나고 다시 청량리 역으로 가 역에서 배웅하는 선생님께 손을 흔들고, 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자다가 드디어 집이 있는 기차역, 동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던 중 빨리가서 여동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마구 뛰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여동생 혼자 있었고, 음료수를 나누어 마시려고 가방을 연 순간, 아뿔싸! 병 하나가 깨져서 모두 새어버린 것이었다. 먹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동생과 먹으려고 했던 것인데 너무 아깝고 억울한 마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머지 한 병은 무사하다는 것, 동생에게 따라 주니 홀짝 홀짝 맛있게 먹는다. 깨진 한 병이 아쉽긴 했지만 너무 행복하고 뿌듯한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귀엽고 예뻤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벌써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다. 현대 사회의 먹거리는 다양하다 못해 무엇을 고를지 고민할만큼 넘쳐나지만 당시의 콜라와 환타는 시골에서 자랐던 우리들에는 소풍때나 가져갈 수있는 무척 귀한 음료수 였다. 지금도 탄산 음료수를 마실때면 그 때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특별한 음료수, 청량음료는 건강에 해롭다고 기피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마신다. 마실 때마다 여동생과 그 때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고향의 어린시절로 돌아가 그 때 그 시절을 함께 마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