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에세이
[에세이] 터
한결
잡풀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집 터를 가득 메웠다. 마치 쇠사슬의 고리들이 끊어진 후 오랜시간 방치되어 녹이 슨듯 황량한 기운이 뒤덮어 어느누구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질곡의 세월들을 따라 나의 어린 시절도 울퉁불퉁한 땅 속 어디인가 깊이 묻혀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씀을 하지 않았고 조용히 휴지 한장을 달라고 하셨다. 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회상에 잠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에 익은 평상과 밤나무, 대추나무, 주변을 향기로 가득채웠던 나팔꽃, 봉숭아, 초록잔디가 눈 앞에 펼쳐지고 학ㅇ교에서 돌아온 꼬마가 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동무들을 만나기 위해 뛰어나가던 광경이 나타나더니 순식 간에 환영처럼 사라진다.
차에서 잠시 내려 하늘을 본다. 어제는 그리도 처량하게 내리던 비가 하늘에 파란색을 칠해놓은 듯 높은 가을이 세상을 감싸고 마치 푸른 목장에서 양떼가 뛰어놀듯 힌 구름이 하늘을 딛고 쌩쌩 내달린다. 멀리 기차역이 보인다.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역이다. 옛날에 수백번 수천 번을 지났을 내 발자국이 남아있을 곳, 역 앞에는 시티 투어라는 푯말이 우뚝 서있고 기찻길 건너 앞산에 오를 때마다 늘 지나치던 급수탑이 담쟁이 덩쿨 옷을 입고를 그대로이다. 전철역과 기차역은 마치 근대와 현대의 경계를 나누듯 대조를 이루고 현대식 전철역처럼 도시인이 된 나는 예전의 조그맣고 정감있는 시골역을 보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다. 앞 산 정상에서 동생에게 '야호'를 외치던 나의 목소리가 생생이 들리는 듯하다. 가슴 속에 남아있는 고향집,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곳, 철조망에 둘러싸인 그곳의 땅도 밟아볼 수 없어 수몰되어버린 땅에더 이 상 가볼수 없는 것처럼 잃어버림에 대한 상실감이 다시금 슬금슬금 피어오른다. 아파트의 높은 시멘트 벽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답답함에 갇혀 사는 내게 아름답고 순수했던 유년시절의 추억과 부모님의 사랑과 포근하고 따뜻했던 고향의 산과 들은 늘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 집터는 회상과 상실로 뒤범벅되어 영 마음이 어질어질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고향의 땅을 잃어버린게 아니었다. 그렇게 알뜰히 보살피고 사랑했던 집과 논, 산, 고향의 땅들은 남의 것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요양병원비와 아버지의 치료비를 위해 쓰임받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아버지께 말씀드리며 빈 집터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빈 곳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라며 위로를 드린다. 고향은 그럿 곳이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품 속 같은 곳, 아버에게도 내게도 고향은 어머니였다.
비온 후 개인하늘처럼 흙탕물 같은 침울한 분위기를 덮을 희망이 필요했다. 고향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줄 끈을 찾기로했다. 그나마 역에서 차로 몇 분 거리면 내가 노후에 살려고 준비해 둔 땅뙈기가 조금이 있다. 그곳을 가보기로 했다. 그곳엔 이미 누군가 살고 있는 집 들이 몇 채있었고 누군가 텃밭에 들깨를 심어놓았는데 깨 냄새의 고소함이 사방으로 진동하는 것이 그 옛날 멍석 위에 고추를 말리던 어린 시절의 향기를 맏을 수 있었다. 푸근함이우리를 싼다. 난 이곳에 체류형 쉼터를 가져다 놓을 생각이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책도 읽고 천렵도 하며 옛 선비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유유자적함을 꿈꾸고 있는데 내가 가꾸다가 세상을 떠나면 아들이 날 대신할 것이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땅을 고르고 다지면 동쪽으로 창을 내고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꽤 큰 천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이다. 그렇게 고향과 나의 끈은 이어진다.
산다는 것은 언젠가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는 빈 집같은 것일게다. 우리가 사는 세상 모든 것에는 경계가 있다. 땅에 하늘에 바다에 사람이 사는 곳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나 온통 금이 쳐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사이를 오가는 다리 위에 서있다. 인간이 아무리 세상의 모두를 지배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기에 어쩌면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신의 섭리나 자연의 영속성 앞에서 티끌만큼이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저 '훅' 하고 불면 사라져 버릴 듯 먼지 한 줌의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 지금 내 앞에 깊은 산 속에서 발원한 내가 펼쳐져 있다. 이 곳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감사하는 마음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채우지 못한 허욕의 공간을 대신 채운 상념이 욕심의 불면을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삶에 만족함이 필요하다. 잠이 안 오면 그 다음날은 잠이 올 거야라고 생각하는 긍정도 필요하고 잠 못 드는 밤을 받아들이는 여유도 필요하다. 삶이 허기질 때는 무엇으로 채울까. 흘러가는 질곡의 시간틀에 맞춘 도형처럼 각을 세우고 뽀죡한 끝으로 세상을 살다가 찌르고 찔리고 털럭거리며 구르는 모난 돌멩이처럼
빡빡하게 살아내야하는 삶의 틀안에 화창한 봄날 꾸벅 꾸벅 졸다가 문득 눈을 뜨면 겨울이 깜빡거리고 찰나의 순간, 어쩌면 삶은 태어날 때부터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과정인 것을영혼보다 육신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삶인데도 돌아올 차표가 없는 편도 여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행복이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고 슬픔도 마음대로 버려지지 않는 양면의 삶이지만 예전의 집터보다 이젠 내가 살게될 새로운 집터에 남은 계절을 봄의 온화함과 여름이 주는 청명함, 가을이 주는 원숙함과 겨울에 느끼는 따스함으로 채워가겠노라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