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를 '감상'하지 않고 '소비'하는 사람들
이상하다. 뛰어넘기를 하지 않고는 영화나 드라마가 잘 안 봐진다. 대사가 없는 회상 부분이나 관심 없거나 궁금하지 않은 내용이 나올 거 같은 순간 나는 사정없이 리모컨을 누른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더 에이트 쇼>를 보았는데 총 8부작이었다. 1부작에 대략 50분이니 다 보려면 400분이라는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관심 없는 부분은 뛰어넘기를 하면서 시청했다.
남편은 유튜브에서 영화를 요약해서 결말까지 알려주는 콘텐츠를 즐겨 시청한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이렇게 영화를 시청하면 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니라며 함께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보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선택을 하지 못했다. 방대한 콘텐츠 속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선택하기가 어려웠으며, 러닝타임 90분 이상인 영화들이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시청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2019년 8월 미국 넷플릭스사가 스마트폰 및 태블릿용 애플리케이션에 재생 속도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 시청자는 0.5배, 0.75배, 1배(표준), 1.25배, 1.5배 중 재생 속도를 선택할 수 있다. 또 한 10초 앞으로, 10초 뒤로 버튼도 있어 리모컨 한 번이면 순간적으로 장면이 바뀐다. 나 역시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볼 때면 내가 원하는 속도로 시청한다. 지루한 부분은 넘어가고 보고 싶은 장면만 보는 것이다. 드라마는 보통 6부작 이상인데 다 보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이 드라마 외에도 봐야 할 드라마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 작품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영화를 시청하기 위해서는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하고 대여료를 지급했고, 수많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대여료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일정 이용료를 지불하면 마음만 먹으면 몇 백 편의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정해진 시간 내에 수많은 콘텐츠를 봐야지만 이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보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것이 더 어울릴 거 같다.
그럼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까?
최근에는 상황이나 인물의 감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대사로 설명하는 작품들이 늘고 있다.
즉,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친절하게 자막도 많이 넣어주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자막이 가득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면 시청자는 설명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이나다 도요시 작가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은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현상 속에서 우리의 욕망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미디어와 콘텐츠의 트렌드와 미래를 읽어낸다. 즉, Z세대가 주도한 빨리 감기 시청은 앞으로 더 확대될 수밖에 없고, 제작과 생산도 소비자의 진화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은 현상처럼 보이는 빨리 감기 시청은 아주 거대한 변화를 앞당기는 불씨인 셈이다.
이 책의 저자는 결국 빨리 감기는 시대적 필연이라 불러야 했다고 말하며 가급적 적은 자원으로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자본주의경제에서 거의 절대적 정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 역시 많은 작품을 보고 싶은 욕심과 재미없는 작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인트로부터 갑자기 후렴구가 흘러나오는 노래가 많아졌다. 또한 요즘 나오는 노래는 대부분 2분대로 짧다. 참고로 <밤양갱>의 러닝타임은 2분 20초이다.
음악도 간단명료한 곡들이 인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빨리 골라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집만 해도 자유 시간에는 남편과 나, 아이들은 각자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본다. 내가 어릴 적 가족 모두가 티브이 앞에 둘러앉아서 한 개의 채널을 다 같이 보는 것과 대조된다.
그러한 면에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든,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든 지루할 틈을 주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이 책에서 ‘재미없는 작품을 만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실패로 여기는 가치관을 두 가지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진로교육이다. 배움에도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5년 후, 10년 후 로드맵을 그려보라고 가르치고, 그에 따라 학생일 때부터 치밀한 플랜을 짜둔다. 느긋하게 먼 길을 돌아갈 여유가 없다. 그리고 가성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적은 노력으로 최대 보상을 얻고자 한다. 이것만 해두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등, 최소 노력으로 최대 노력을 얻을 수 있는 편한 방법 등 효율을 추구한다.
스마트폰 게임에서도 스토리 부분을 건너뛰는 유저가 늘어났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게임을 하고, 아이템을 모으고, 경험치를 쌓고, 캐릭터를 육성하고 싶은 플레이어는 스토리를 느긋하게 시청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게임아이템을 구입해 즉각적인 기쁨을 빨리 얻는다.
내 아이도 로블록스 아이템을 사달라고 졸랐었는데 이런 마음이었나? 아이들이 숏폼, 틱톡 등 짧은 영상에 익숙해 긴 영상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게 게임과도 연결이 되는구나 싶었다.
결국 빨리 감기는 시대의 필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