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_ 작가의 말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무진기행> 단편집은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이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한다. 추체험이란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신의 체험처럼 느끼고, 과거의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가 바라본 다른 사람의 체험, 그리고 과거의 체험은 무엇일까.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그리고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이다.
일탈이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상이다. 그것도 지리하고 답답하고 무기력한 일상. 그 일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의도적으로 삶을 왜곡시켜 보는 것이다. 일상은 영구적인 것이고, 일탈은 일시적인 것이다. 잠시나마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지만 곧 돌아가야만 할 운명임을 알고 있다.
영원한 해방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 해방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끊임없이 좌초된다. 우리는 삶이 일직선이라 생각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우리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는 원형에 가깝다. 저 선 끝에 무언가 있겠지 상상하며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아무것에도 닿지 못한다.
애를 쓰고, 빗겨 나가고, 애써 외면한다. 잠시나마 취할 수 있는 일탈이 우리에게 남아있을 뿐. 완벽한 해방이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작가의 말처럼 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추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 희중은 소위 말하는 재벌집 딸과 결혼하여 사회적 성공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곧 장인의 제약회사 전무 자리에 오를 예정이다. 그러나 역시 어딘가 망가져있다. 어떠한 일상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희중은 휴식을 취해야 할 때,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무진을 찾는다. 그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 잠시 무진으로 여행을 떠난다.
무진은 작은 항구 도시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안개다. 안개는 시야를 흐릿하게 하여 무언가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면서 자신에 대한 타인의 시선 또한 무뎌지게 한다. 그래서인지 희중은 무진에서는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충동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죽어버린 시체를 보고 흥분을 느끼고, 새벽 사이렌 소리에 타인의 정사를 상상한다. 발가벗겨진 채 살아가는 현실과 달리 안갯속에 몸을 꽁꽁 숨길 수 있는 탓이다.
희중이 무진에 살았을 당시 한국은 한창 전쟁 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작은 독방에 가두어 두었다. 전쟁 통으로 아들이 끌려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희중은 차라리 이럴 거면 총을 들고 전쟁에 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작은 독방 안에서 고통 속에 시간을 보낸다. 도시로의 해방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전쟁이 끝나 바람대로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된 희중, 무진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친구 '조'의 말처럼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그야말로 벼락 출세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만큼 충만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순간에는 그토록 갈망하였던 삶이 역으로 그를 옥죄고 있는 것이다.
희중은 친구 조의 소개로 무진중학교의 음악 교사 인숙을 만난다. 인숙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무진으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인숙에게 무진은 재미없고 따분한 곳이다. 인숙도 오래전 희중과 마찬가지로 무진을 떠나 서울에 가고 싶어 한다. 결혼을 하든 무얼 하든 말이다. 인숙은 희중을 자신을 서울로 끌어올려줄 인물이라 생각하며, 희중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며 애원한다.
인숙을 향한 마음으로 속앓이를 하던 희중은 서울로부터 온 연락을 받는다. 급한 회의가 잡혔다는 소식. 그는 급히 인숙에게 편지를 남기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마주했던 사실을 고백하는 희중. 그는 다 써 내린 편지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인간은 늘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오간다. 저 끝에 무엇인가 있으리라 믿는 일은 곧 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의 무게는 우리로 하여금 삶을 의미 있는 것이라 착각하게 한다. 고로 ‘무거운 희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 끝에 도달한 것 같은데 결국 완전한 해방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인간은 어떨까. 그에게 삶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무의미, 허무, 가벼움, 덧없음. 서울에서의 희중의 삶은 그런 모습일 테다.
그가 무진에 돌아와 마음을 빼앗긴 대상은 무거운 희망을 잔뜩 품고 있던 과거의 자신이다. 그리고 그와 다름없는 인숙이다. 이를 '일탈'이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보단 과거의 억압, 다시 삶을 가라앉게 해 줄 무거운 희망에 대한 투신이다. 그러나 그마저 온전하지 못한다. 무진과 서울 어느 곳에서도 해방될 수 없는 희중의 처지는, 모든 인간에 대한 은유다.
완전한 해방은 없지만 혼란스러운 삶이 있다. 작가는 이에 대한 연민으로,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그것을 조명하는 일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의미 없는 삶이라 자조할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숙명에 조명을 비추어 보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