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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Oct 08. 2022

MICROSCOPE: 시계태엽 오렌지(1971)

시계태엽 오렌지(1971)의 첫 12분.

스탠리 큐브릭의 1971년작 <시계태엽 오렌지>는 말콤 맥도웰 분 알렉스의 강렬한 클로즈업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검은 배경에 중절모와 속눈썹 장식을 단 알렉스의 앳된 얼굴은 스크린의 중심을 완전히 채우며 모든 시각을 앗아간다. 한쪽 눈에만 달린 속눈썹과, 어색하게 한 쪽만 올린 입꼬리, 길이가 다른 옆머리는 약간의 비대칭 구도를 주어 시각적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이후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아주 천천히, 또 차분히 뒤로 물러나 줌 아웃으로 착각할 정도이지만,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서서히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알렉스의 상체를 비추어가는 순간 알렉스는 아래에서 우유로 보이는 음료를 위로 들어 서서히 마신다. 이때 중절모를 쓰고 속눈썹을 붙인 알렉스가 우유를 마시는 모습은 단순한 시각적 흥미로움을 넘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다. 중절모와 속눈썹은 각각 성인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소재이다. 허나 알렉스는 거기에 전형적인 유아기적 상징인 우유를 마심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의 부조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컴플렉스적인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고, 유아기적 모습에 남아있는 성인의 표현이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어찌되었든, 우유라는 소재의 핵심은 시각의 이면적 부조화에 있다. 참고로, 이러한 소재의 활용은 다양한 영화에서 재해석되었는데,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좋은 예시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우유가 이러한 소재로 소비되는 정형의 기원에 관하여 많이 알지 못한다. 허나 글에서 다루는 본작의 예술적 영향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앞서 언급된 두 예시가 본작의 오마주 혹은 참고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카메라가 더 뒤로 가게 되면 알렉스와 비슷한 복장을 한 다른 세 명의 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눈에 띄는 공통점으로는 그들의 새하얀 피부와 얼굴 화장, 멜빵과 검은 모자가 있고, 독특하게도 넷 모두 낭심 보호대를 차고 있다. 이 공통점들은 모두 알렉스 클로즈업에서 보았던 부조화에 힘을 보탠다. 특히나 넷이 차고 있는 보호대는 얼핏 보면 기저귀와 같은 모습인데, 앞서 언급한 우유의 상징에서 연장되어 나온 아이디어로 보인다. 이 넷은 양옆에서 뻗어나오는 빛을 받아 매우 강렬하게 카메라에 담긴다. 


카메라가 더 후퇴하면서는 내부 공간의 모습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네 명 위에 써져있는 글자들이다. “Moloko Vellocet”과 그 위에 더 많은 단어들은 이후 알렉스의 나레이션에도 등장하지만, 본작 내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전부 우유에 어떤 약물을 첨가한 형태의 단어들이며, 표현들의 기원은 원작의 동명 소설에 있다. (단어의 뜻이나 기원에 대해서는 필자 또한 명확하지 못하다. 허나 본 글에서는 원작을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을 듯하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고, 사실상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오브제는 바로 마네킹이다. 나체의 여성 형상을 흰색 마네킹들은 탁자 모양으로 곳곳에 배치되어있고, 색색의 가발을 착용한 채 기괴함을 내뿜고 있다. 예를 들어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에서도 여성의 나체를 가구로 활용하는 표현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여성의 신체를 도구화하는 인물들의 악랄함을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 나온 여성의 나체와 가구의 연상은 꽤나 1차적이고, 그만큼이나 강렬하다. 마찬가지로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오징어 게임>의 단순한 접근과는 별개로, <시계태엽 오렌지>의 본 장면에서는 쾌락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기괴한 모습의 흰 마네킹들이 등장 인물의 성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기엔 영화를 감상하는 입장에서 와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마네킹들이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지 생각해보자.


우선 첫째로 시각적 압도감이다. 일반적으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현한 듯 스크린은 감상자에게 매우 충격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는 기괴함이다. 불쾌한 골짜기를 연상케하는 마네킹들의 모습은 쾌락적이기보다 도리어 지나치게 정적이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실제 사람의 모습이 연상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조명 위에 있는 마네킹들의 포즈와 과도한 머리 장식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기괴한 인상을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듯하다. 세 번째로는 나체의 마네킹에서 오는 성적인 이미지이다. 이후에도 후술하겠지만 특히나 조명 위에 가슴이 부각된 포즈를 하고 있는 마네킹은 노골적이어 보일 정도이다. 네 번째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마네킹들에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들의 태도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인물들과 비교했을 때, 알렉스의 패거리는 얼굴에 걸리는 조명이나 구도를 보았을 때 분명한 권력의 위치에 있어보이며, 어찌 보면 과시적인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알렉스가 마네킹 탁자 위에 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후에도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지만 이 정도로 종합해보자.


필자에게 이 마네킹들은 우선 앞서 말한 <오징어 게임>과 같이 성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선정성이 우유로 대변되는 인물들의 유아기적 면모와 맞물려, 필자에게는 노골적인 음란함보다도 유아기의 성적 욕구, 에로스가 떠오른다. 나체의 마네킹에 둘러싸인 채 우유를 마시며 중절모와 속눈썹을 붙인 자신의 모습을 뽐내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알렉스의 모습에는 역설적으로 지극히 유아적인 욕구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몇 장면 이후 등장하는 범죄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노인 작가 집에 들어가 부인을 강간하는 장면이나, 여성을 겁탈하는 행위를 “In-out-in-out”이라고 표현하는 알렉스의 나레이션 등은 본 장면에서와 결이 같은 극도로 미성숙한 모습이다.


또 하나는, 사실 마네킹의 전형적 표현인데, 복제의 메타포이다. 마네킹에 둘러쌓여있는 인물들은 동시에 복제에 둘러쌓여 있는 것이다. 애초에 알렉스와 패거리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것도 복제의 메타포에 대한 시각적 함의로 볼 수 있으며, 이후 장면들에도 4개의 예수상, 루드비코 치료법에서 알렉스에게 보여준 영상들, 치료 이후 알렉스의 방에 살게 된 남성까지 모두 복제의 메타포를 이어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마네킹들은 무엇의 복제인가. 이후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는 마네킹은 실제 여성, 특히 어머니의 신체를 모방하여 가슴에서 우유가 나오도록 만들어졌다. 이를 생각해보면 마네킹들은 곧 어머니의 복제이다. 자신에게 우유(모유)를 주는 존재이며 남자아이의 유아기적 성적 욕구의 대상. 이후 등장하는 알렉스의 어머니가 쓰고있는 색색의 가발은 이 마네킹들이 쓰고 있는 가발과 대응된다. 이 점에서 본 장면에 담고 있는 에로스에 대한 은유와 복제에 대한 메타포는 결국 하나로 합쳐지며, 마치 알렉스와 그 패거리를 복제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아인 듯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가 더 뒤로 들어간다. 이제 알렉스 일당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슬쩍슬쩍 모습을 비추는데, 전형적인 히피의 모습을 한 사람도 있었고, 군모를 쓰고 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디테일들은 우리의 감상을 확대할 여지를 준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앞에서 생각했던 알렉스에 대한 묘사를 히피, 군인 등의 일반적인 인간에게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본 장면에서의 공간은 알렉스를 유아로 묘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 유아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알렉스의 나레이션이 등장한다. 나레이션에서는 우선 밀크 바에서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를 짧게 언급한다. 인물들이 마시는 음료는 (정황 상) 우유에 마약이 첨가된 음료이고,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이 우유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고, 폭력을 맛보고 싶은 기분”이 된다. 허나 생각해보면 이 우유는 어린 아이가 마시는 모유에 대한 은유인데, 이 우유가 폭력성을 자극함은 어린 아이가 태초로 느끼는 폭력성에 취함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즉 영화 초반 알렉스가 보이는 폭력성은 곧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더 나아가, 복제품의 모유를 먹고 자란 인간의 뒤틀린 유아기적 성장과 거기에서 비롯된 반사회성으로도 받아들여진다. 본작 자체가 폭력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고, 단순한 하나의 담론을 강한 에너지로 확장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기에, 첫 장면에서의 감상이 일관적으로 연결된다.


지금까지가 영화 시작 후 약 90초 동안 이어진 첫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은 널브러진 빵조각과 술병에의 클로즈업으로 시작된다. 둔탁한 노랫소리가 들리며, 이는 카메라가 줌아웃하면서 그 술을 마신 노인이 경사에 기대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때의 화면 구성에서 돋보이는 것은 노인의 뒤에 걸린 깊은 그림자와 함께 경사면 지형이 만들어내는 대각선이다. 줌아웃을 하면서 노인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공간 전체가 화면에 들어오게 되면, 빛을 등지고 있는 카메라는 노인의 옆모습을 매우 밝게 줌인하고 있다가 그 뒤편으로 진 그림자를 줌아웃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그림자는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대각선 상에 있는데, 공간의 전체 구도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대각선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수직적인 선을 배제하고 대각선으로 구성한 화면은 빛의 사용과 함께 시각의 그로테스크하고 불편함을 제공한다. 줌아웃이 거의 다 되어가면 노인이 있는 길 위로 네 명의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가 드러나고 난 뒤에는 이 모든 화면 구성과 조명 배치가 이 그림자의 연출을 위한 것이었음이 직관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방식의 이미지 조성이다. 특히나 노인의 그림자가 강조된 줌인 상태에서 노인의 몸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네 개의 그림자가 드러나도록 하는 전환은 스크린을 지배하는 대상의 전환, 더 나아가 일종의 권력의 전이로도 보인다.


네 명의 그림자가 노인 쪽으로 다가오면서 알렉스의 나레이션이 다시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의 나레이션은 매우 독특한 장치인데, 영화 내의 현 상황을 설명하고 인물의 현재 심리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기능과 함께, 시각적 정보와 융합되어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역할과 감상자에게 질문을 던져 거리를 확보하는 낯설게 하기-적인 효과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장면에서 보면 알렉스 자신이 길거리에서 취한 채 노래를 부르는 걸인을 싫어한다는 정보로 현재 상황과 심리를 설명하는데, 후술하는 묘사를 보면 이후 알렉스의 패거리가 노인을 폭행할 것이라는 암시도 함께 전달한다. 이를 통해 감상자는 기본적으로 결과를 미리 직감한 채로 참혹한 과정을 보게 되며, 이는 폭력이 가지는 시청각적 쾌감을 기지적인 불쾌함으로 바꾸어놓아 감상자에게 감상과 관찰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한다. 


나레이션과 함께 카메라는 빛을 바라보는 방향의 위치로 변경된다. 역광의 효과를 모든 인물들은 검게 보이고,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이전의 장면보다도 더욱 강조된다. 그 뒤이어 인물들과 더욱 가까운 거리의 화면으로 점프컷 된다. 이때의 화면 구성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직선을 최대한 배제한 연출을 담고 있으며, 이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대각선 구도에서 오른쪽에 서있는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진 왼쪽 대각선 구도로 변환되며 시각적인 급변을 노린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동일하게, 화면 구도 또한 권력의 전이와 상하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각선의 구도는 이 시퀀스 내내 이어지는데, 노인이 대사를 하는 쇼트에서도, 그 이후 나오는 알렉스의 얼굴 측면 클로즈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대각선의 구도가 지배적이다. 이는 쇼트 간의 일관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불안정함을 연출해내는 효과를 지닌다. 


노인과 알렉스 패거리의 대사도 상징적이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노인의 모습과 알렉스 패거리의 모습이 병치될 때까지만 해도 그저 단순한 폭력성의 제시에 불과해보였으나, 노인이 세상에 대해 한탄하고 그 위로 알렉스 패거리의 웃음소리가 겹쳐들리는 플롯이 더해지면서 이 시퀀스는 전형적으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담아내는 설정으로 감상자들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접근은 노인의 대사에서 “달에 간 사람과 지구를 돌고있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심화된다. 달에 착륙한 아폴로 13호가 1970년에 발사되었음을 생각하면 본작이 제작될 당시 문화/사회적 충격을 가져온 사건을 언급한 셈인데, 이는 실제로 당시의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상황을 녹여낸 것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알렉스 패거리가 노인을 폭행하는 시퀀스는 이제 기성세대를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신세대의 행보를 이야기한다. 이후 카메라가 거리를 둔 채로 알렉스 패거리의 폭행 장면을 보여주면서 다음 시퀀스로 넘어간다.



카메라는 이전 시퀀스에서 빛 배치를 통한 시각적 대비를 이어받듯 화면의 중심을 꽉 채우는 유화에서 서서히 줌아웃하며 아래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여기에 여성의 비명소리와 함께 로시니의 <도둑 까치> 서곡이 흘러나온다. 이와 같은 시청각 정보에서의 부조화는 영화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는데, 이후 이야기될 “Singing in the Rain”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일차적으로는 감상의 그로테스크를 극도로 살리는 역할을 하며, 거기에 영화에서의 부조화 테마를 끌고 나가는 기능 또한 한다. 예를 들어 본작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본성과 제도의 부조화라는 면에서도 그렇고, 영화의 인트로에서도 부조화가 중요하게 시각적으로 작용했으며, 배우들의 연기 방식이나 연출 디자인 등도 모두 부조화를 살리기 위한 방향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계태엽 오렌지>의 부조화적인 음악 사용은 매우 주요한 방법론이다.


줌아웃이 되면서 군복을 입은 패거리가 여성을 겁탈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특이한 점은 범죄가 일어나는 공간이 마치 고전 연극 무대를 연상케하는 점인데, 이는 여러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선 후에 알렉스가 치료받은 모습을 고위 인사들에게 시연하는 장면과의 대구를 이룬다. 하지만 본 시퀀스와는 가해-피해의 관계가 완전히 전복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알렉스의 시연 장면을 다룰 때 이야기하겠지만, 간략히 언급하자면 관계의 전복에도 보존되는 폭력성의 영속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또한 연극은 예술에 대한 대유로 자주 사용되는데, 예술이나 매체가 폭력성을 감상자에게 전달한다는 표현 또한 이후 알렉스의 장면에서 반복된다. 카메라가 참혹한 광경을 담아내는 것 또한 줌인을 활용하여 마치 연극을 감상하는 시각을 모방한 듯한 연출로 일관한 데에서도 일맥상통하다. 


이후 카메라는 반대 방향의 어두운 벽을 비춘다. 이때의 쇼트 전환은 마치 이전에 노인을 폭행하는 알렉스 패거리들의 시퀀스에서 카메라의 방향이 변환되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에는 본 시퀀스에서도 일어날 폭력과 이전 노인과의 시퀀스에서의 폭력은 같은 갈등 구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약간의 다른 점은, 전 시퀀스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가치적 갈등이라고 하면, 이번 시퀀스에서는 구조적인 갈등을 다룬다. 여성을 겁탈하던 무리는 군복을 입고 있다. 이 군복은 군인, 전쟁 등의 시스템을 대변하는데, 그 무리가 군복을 입고 있었고 알렉스 패거리가 이 군복 무리와 싸우게 된다는 것은 군인이라는 시스템, 또 전쟁이라는 폭력적 역사와 갈등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정의가 아닌, 여성을 겁탈하던 패거리와 노인을 폭행하는 패거리의 싸움으로 묘사함으로써, 윤리적으로 유의미한 해석을 피한 채로 시대의 전복만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꽤나 생동감 있는 액션 장면 이후, 알렉스 패거리의 도주 시퀀스로 넘어간다.



인물이 차량을 타고 도주하거나 질주하는 연출은 본 장면과 유사한 형태로 많이 소비되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본인에게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인물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이 아닌 차량 앞을 비추는 앵글이었다. 서있는 사람이 급박하게 알렉스 패거리의 차를 피하기도 하고, 앞에서 마주보던 차가 급하게 핸들을 꺾는 등 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하나의 카메라 앵글과 조명으로 미니멀하게 표현하였음에도, 매우 생동감이 넘치도록 연출해냈다. 제작 방식의 과감함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다음 시퀀스는 “집(HOME)”이라는 팻말이 쓰여진 길목에서 시작된다. 저 멀리에서 알렉스 패거리의 차량이 길을 따라 오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어두운 환경에서 차량의 전면조명으로 미세하게 밝아진다. 인물들이 도착한 이후에는 집의 외관을 스틸 카메라로 담는 쇼트로 넘어가는데, 매우 정적이고 균형이 잡힌 건물의 외관 구도에 알렉스 패거리들이 화면 왼쪽에서 한 명씩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그 집에 살고 있는 노인 작가가 타자기를 치는 모습으로 연결되고, 초인종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던 노인 작가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카메라는 그에 따라 돌리 위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오른쪽에 있는 노인 작가의 부인을 비추면 부인은 화면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선으로 움직인다. 여기에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우선 카메라의 입체감이다. 노인 작가의 매우 평면적인 화면 구성에서 수평 이동을 통한 프레임 깨기 이후, 카메라 이동 축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축으로 인물을 이동시켜 공간의 심도를 부각하는 형식의 연출이 사용되었다. 또한, 집 안 공간의 색감과 디자인이 전위적일 정도로 강조되어있다. 약간 미래적이기까지 한 내부 공간은 알렉스 패거리가 본 팻말처럼 “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집에 알렉스 패거리가 침입하는 과정에서는 구도나 사운드적으로 매우 차분하다. 이 분위기는 인물들이 거실에 도착한 뒤의 분위기와 완전히 대비된다. 특히 알렉스의 패거리들이 부인과 함께 혼란스럽게 집에 침입한 때부터는 핸드 헬드 카메라로 인물들을 비추게 되며, 폭력의 장면들을 약간은 익살스럽고 역동적으로 담아낸다. 특이한 점은 알렉스 패거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노인을 발로 찬 후, 쓰러진 노인 위로 뛰어드는 순간이 낮은 스틸 카메라로 찍혀있는데, 이때의 색감이 약간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기술적 한계 혹은 편집 당시의 선택일 수도 있겠으나, 필자에게는 약간 어색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후 핸드 헬드 카메라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낸다. 예를 들어 부인을 어깨에 짊어메고 도는 모습을 카메라는 반대로 돌며 화면에 옮겨 움직임을 극대화한다. 거기에 과감한 클로즈업과 렌즈의 왜곡을 사용하여 시각적 압도감과 혼돈을 스크린에 생생히 옮겨놓았다. 이와 연결되는 유명한 ‘Singing in the Rain” 장면은 스틸 카메라로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정제되지 않은 폭력의 혼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뒤에 이어지는 강간 장면에서는 적나라한 연출, 스틸 카메라와 클로즈업의 교차 편집, 인물의 행동들이 전부 융화되어 그로테스크함이 극대화된다. 아방가르드한 디자인과 그로테스크 표현이 오묘하게 겹쳐 강한 에너지를 내뿜는 장면이다.


하나만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자면, 시퀀스 가장 처음 등장했던 노인 작가의 정면 구도 그대로 알렉스가 등장하여 뒤의 책장을 엎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일단 구도를 변주했다는 점에서 집중할 만 하고다. 게다가 노인 작가는 타자기를 치는 행위를 한 반면 알렉스는 책상을 넘어뜨리고, 카메라는 이때 돌리 위에서 정면으로 살짝 움직여주는 연출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을 넘어선다. 여태까지 이어진 두 폭력 장면에서 알렉스는 기성 세대와 군대라는 시스템을 상대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번 집과 노인 작가는 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집”이라는 공간 속의 부부와 지성의 집합을 생각해보면, 알렉스는 이 시퀀스에서 이상적인 가족 제도와 지성을 대면하고 있다. 노인 작가에게는 폭행을 행사하고 부인을 강간하는 행위는 곧 앞에서 이야기했던 에로스의 연장선상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동시에 발현하는 모습이기도 하며, 또한 새로운 세대에 의한 지성의 몰락으로도 보인다. 



결국 <시계태엽 오렌지>의 첫 12분을 차지하는 시퀀스들은 알렉스 패거리가 어떤 존재성을 함의하며, 어떤 갈등 속에서 폭력을 발산하는 지를 선보이는 장치이다. 거기에 이후 논의될 상징과 은유를 집약시켜 감상자에게 하나씩 소개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보았던 화면 구성이나 구도, 소재나 디자인 등의 반복이 있을 때마다 감상자들은 첫 12분에서의 감상을 확장하여 영화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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