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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사찰, 동해시 삼화사

7번 국도 지질 답사기

by 전영식

두타산 삼화사(頭陀山 三和寺)는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1,350m) 무릉계곡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다. 9세기 무렵에는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사찰이었고,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1395년부터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을 위한 국행 수륙제(水陸祭)가 6년간 열렸던 곳이다. 공양왕을 제거했지만 이반 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수륙재를 열었던 모양이다. 이 수륙제는 진관사, 무위사의 수륙제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수륙제로 이어지고 있다.


삼화사는 언제 창건됐나?


삼화사 창건설은 크게 3가지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慈藏, 590~658)에 의한 창건설(삼화사사적(三和私史蹟)),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 창건설(강원 도지(江原道誌)),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창자인 범일국사(梵日, 810~889) 창건설(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그것이다.


자장율사는 오늘날 프랜차이즈 사장님 같이 여기저기 세웠다는 절이 많은데 다 믿을 수는 없다. 흥덕왕(제위: 826~836) 때의 창건 설화는 재미있는데, 옛날 옛적에 삼척 정라진 포구에 돌배(석주 石舟) 한 척이 도착했다. 돛대와 삿대도 없이 마치 자율주행하는 것처럼 들어온 배에는 육 척 장신의 세 사람이 타고 왔으니 약사불 삼 형제였다. 큰 형은 검은 연꽃을, 둘째는 푸른 연꽃을, 셋째는 금색 연꽃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두타산으로 들어와 무릉계곡을 따라 각자 터전을 잡은 것이 흑련대, 청련대, 백련대라고 한다. 삼 형제는 우의 깊게 교화활동을 펼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자 철불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포교지를 옮겼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흑련대에 삼화사, 청련대에 지상사, 백련대에 영은사를 지었다고 한다. 동해안에서 자주 전해오는 외래기원설 중 하나라 흥미롭다.


신라 왕족 집안인 범일국사가 강릉에 머물며 굴산사에 40년 동안 주석한 시기와 철조비로자나불의 연대가 엇비슷한 점, 보통 구산선원에 철불이 같이 존재하는 바, 굴산사에는 전해오는 철불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삼화사의 창건에 범일국사의 이야기가 나오는 점을 봤을 때, 필자에 생각에는 강릉 굴산사와 어느 의미에선가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타산 삼화사 @ 전영식


원래 삼화사의 위치는 이렇게 멋지지 않았을 것 같다. 산사태, 화재 등으로 이전을 거듭하여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약사전만 남았었는데 현종 1년(1660)에 중창했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 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되어 삼화사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지었지만, 1823년에 다시 두타산 산불로 소실되어 이듬해 재차 중건했다고 한다.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일본군들이 방화해서 대웅전과 선방 등 200여 칸이 소실되어 1908년 승려와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대웅전·칠성당·요사 등을 신축하였다.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광권에 절의 부지가 들어가자, 1979년 8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 절을 중건하였다. 이때 1908년 중건된 건물을 전부 그대로 옮겨왔다.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이 이전에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옮겨 다니면 원래 모습을 잃을 수밖에 없다. 최근 원래 삼화사가 있던 절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삼층석탑도 쌍용양회의 사업으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삼층석탑


적광전 앞마당에는 정가운대 삼층석탑(높이 4.8m)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이 탑도 삼화사를 따라다니며 천덕꾸러기 취급받다가 1997년 대웅전(지금의 적광전) 옆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특히 손상이 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데 지장이 없다. 또 초층탑신 밑에 각형 1단 별석 받침을 끼워 시대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신라 후기인 9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유사한 사례는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의성 탑리 오층석탑,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 성주사지 4기의 석탑, 내원사 삼층석탑원주 천수사지 삼층석탑, 보은 원정리 삼층석탑, 용인 어비리 삼층석탑 등이 있다.


따라서 삼화사 삼층석탑의 건립시기는 늦게 잡아도 신라 말로 추정된다. 이를 바탕으로 이 탑은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급은 1997년 5월 이 탑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보다 높은 위상으로 재평가되었다.


삼화사 삼층석탑, @ 전영식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1997년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서 기대하지 않던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초 이전한 지가 1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소장품이 없을 것으로 추측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 2개, 철편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 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과거의 보물 번호로 제1277호 (1998.6.7)이다.


보기 드문 석회암탑


우리나라 불교 석탑은 주로 단단하고 가공이 용이한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화강암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외에도 석회암(대리암 포함), 사암, 응회암, 점판암 등이 재료로 쓰였다. 편마암 같은 암석을 사용하지 않는다. 삼화사 삼층석탑은 석회암으로 만든 석탑이다.


화강암이 많은 이유는 당연히 우리나라 국토의 약 25%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석재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암은 모래가 굳어져 만들어진 퇴적암으로,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구미 도리사 석탑 등이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응회암은 화산재 등이 굳어져 만들어진 암석으로,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에도 응회암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이나 화순 운주사 석조불감 등에 사용되었다. 점판암은 변성암의 일종으로, 벽돌처럼 다듬어 쌓는 모전석탑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예(??)입니다.


석회암 (및 변성된 형태인 대리암)은 화강암에 비해 수는 적지만, 일부 중요한 석탑에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탄산칼슘이 주성분으로, 가공이 비교적 쉽고 아름다운 색을 띠기도 한다. 대표적인 탑은 다음과 같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담회색의 세립질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을 이루는 석회암 중에 해백합 줄기, 유공층, 방추충, 산호 등 많은 생물 껍데기 또는 파편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 라마탑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원래 개성 경천사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남쪽에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다. 조류 배설물로부터 보호하고자 보호각에 들어 있는데 전체를 볼 수 도 없고 그저 보관만 하는 형국이라 참 안타깝다. 두 탑의 층수가 짝수인 이유는 하단의 3층과 상단의 7층이 합쳐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은 회록색을 띠는 석회암(돌로마이트)을 벽돌처럼 가공하여 쌓은 모전석탑이다. 정암사 적멸보궁 뒤편에 위치한 7층 석탑으로, 자장율사가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벽돌 모양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석회암을 쌓아 올린 형태로, 국내 유일의 완전한 형태를 갖춘 모전석탑으로 평가받는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결정질 석회암 또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리석 내에는 백운모가 흔하게 관찰되며, 담녹색의 광물띠가 관찰된다.


삼화사 비로자나불좌상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높이는 40cm, 어깨 폭 68cm, 두께는 0.5~1cm이다. 머리는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공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오르듯 두드러져있다. 이는 고려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인데 융기된 것 같이 보인다.


의문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화를 보였고 팔에 걸쳐서 늘어진 옷자락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앞가슴은 노출되어 가슴 밑에 결대가 크게 표시되었고 끝이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들었음이 분명 하나 손목 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


이 불상에는 목과 결대 위에 횡선이 있고 가슴 앞에 종선이 있다. 이를 보면 여러 개의 틀에 의해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의 문제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꺾이면서 연자오대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존명에 관하여는 그것을 밝힐 아무런 근거도 없다. 끝으로 이 철불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적 특징 특히 안면 처리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삼화사 비로자나불좌상, @ 전영식


현재 삼화사 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은 원래 하반신과 두 손이 없었고 왼쪽 어깨 부분도 파손된 처참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삼성각에 모셔져 있던 불상은 원래 광배, 대좌, 하반신, 왼쪽 어깨 부분은 산산이 조각났고, 훼손이 매우 심한 머리와 상반신을 시멘트로 접착시킨 후 흉물스럽게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었었다. 1997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원되었다. 본 불상과 같은 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하는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을 모델링해 이를 토대로 불상의 하반신 및 파괴 부위와 대좌 등을 복원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출처: 국가유산포털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명문이 발견되었다. 명문은 세로 22.7cm, 가로 34 cm 공간에 해서체로 좌우 반전되어 양주(주물에 부어진 형태)되어 있다. 탈락되고 마모된 글을 제외하고 실제 판독 가능한 글자수는 140여 자이다. 내용은 "석가의 말법 300여 년에 이 불상을 조성하였고, 왕이 발원하고 결언태대덕이 백사가 되어 노사나불을 만들었으며, 노사나불의 원력으로 다가올 미래에 미륵불이 하생하여 이곳에서 화엄경을 설하기를 발원'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노사나불(盧舍那佛)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본질적으로 같은 부처를 지칭하며, '비로자나불'이 그 본래 이름이다. 태양처럼 온 세상에 부처의 진리(法)를 비춘다는 뜻을 지니며, 우주와 법계(法界)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이다.


적광전에 모셔져 있는데, 이 불당은 190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8년 신축한 것이다. 1977년 사찰 이전 때 옮겨 세워졌고 얼마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는데,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 노사나불좌상을 봉안하면서 적광전으로 변경하였다. 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삼화사의 중심 법당이다. 2017년에 수륙제에서 사용되는 괘불을 안정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8억 원을 드려 좌우한 칸씩 늘렸다.




삼화사 앞, 우리나라 최초의 제철소


삼화사 초입에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4월에 '고레가와제철(是川製鐵)소'가 만들어졌다(현재 쌍용연수원자리로 추정). 1940년 미국의 고철 금수조치로 철이 급했던 일본이 고로방식으로 만든 제철소였다. 근처에 있던 삼화철산(광산)은 주변 삼화리, 빈내골, 내금곡이, 이기리 등지에서 자철광석을 채굴하여 제철소에 공급했다. 하지만 철광의 품위가 좋지 못해 삼화철산은 폐광되었고, 양양철광으로 이전했다. 속초에서 일본으로 실어 날랐던 철광석을 묵호로 싣고 와 제철소가 가까스로 운영될 수 있었다.


20250829_102229.jpg 포항 포스코역사박물관(Park1538) 외부에 전시된 구 삼화제철소 고로, ⓒ 전영식


광복이 되자 일본 경영자와 기술자가 빠져나간 자리를 우리 힘으로 메꾸어 생산해 보려고 보수공사도 해보았으나 6.25 전쟁으로 가동이 멈췄다. 휴전 후인 1953년 고로 8기 중 3기를 보수하여 가동을 시작했지만 기술부족, 자금난, 연료난으로 1954년부터 1957년까지 가동이 중지됐다. 그럼에도 전후복구를 위해 철강 공급이 절실한 상황에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61년 고로 3기를 보수,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기화식을 하였다. 하지만 낮은 생산성으로 1972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이듬해 포항종합제철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현재 포항의 '포스코 역사박물관'에 가면 삼화제철소의 제8호 '고로'가 이전되어 전시되어 있다.


삼화사의 일주문은 1980년에 건립된 것인데, ‘두타산삼화사(頭陀山三和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글씨는 탄허(呑虛)의 필적이다.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0년에 건립되었다가 2000년에 중수되었다.


거의 1500년은 됐음직한 삼화사에 남은 것은 불경도 주지스님 이름도 아니었다. 잊힌 변방의 절인 삼화사는 이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것을 멈추고 부활하는 분위기가 난다. 오랜 세월 동안, 삼화사를 지켰던 것은 다 깨진 철불 일부와 모서리와 꼭대기가 상해버린 석회암 석탑이었다. 아마 또 다른 1500년이 흐른 뒤 그때까지 절을 지키고 있을 것은 법당도 아니고 요사채도 아닐 것이다. 세월을 읽으려면 쇠와 돌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1. 문화재청,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2018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강원도 I, 2018.12

2. 삼화사 홈페이지

3. 위키백과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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