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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의 동해척주비, 해일에 효과 있나?

7번 국도 지구과학 답사기

by 전영식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6~1682)은 조선 시대 후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문신 및 성리학자, 역사가, 교육자 겸 정치인에다가,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기도 했다. 천문, 지리, 도가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 그의 전서체는 '허목체'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서풍을 확립했다(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에 영향을 줬다). 과거 시험도 보지 않고 온갖 학문과 글씨를 섭렵하고 아는 것도 많아 조선의 대표적 논객으로 유명한데, 우암(尤庵) 송시열과 맞붙은 예송논쟁으로 1승 1패를 거뒀다. 그와의 재미난 일화가 많다.


허준, 허균을 배출한 양천 허 씨 출신이다. 인조 때 성균관 학생회장이었던 허목은 유학자 박지계를 어용 문인으로 비난하고 성균관 학적에서 제거하는 등 학생운동을 하다 인조의 미움을 사서 과거자격이 박탈당했다. 나중에 인조가 미안해서 과거시험을 보게 해 주었는데 시골로 돌아가 버린 강단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50대에 무시험으로 능참봉부터 시작하여 이조판서와 우의정까지 하고 천수를 누렸다.


미수 허목 초상(許穆 肖像), 비단, 세로 72.1cm, 가로 57cm 지정문화재 보물 1509 호


또 허목은 인조 때의 남인 정승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손녀사위이다. 어느 날 이원익이 퇴청길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놀고 있는 아이들 중 씩씩하고 기개가 있어 보이는 아이가 있어 유심히 살펴보다, 너는 어느 집 아이냐고 이름과 가계를 물으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잡고, 다소곳이 서서 성은 양천인 허 씨이고, 이름은 목이라 대답하고, 아버지는 현감이고 증조부가 좌찬성 자라고 대답을 했다.


오리 대감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띠우고 집으로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을 부인에게 이야기하고, 이 아이가 내 뒤를 이어 이 나라의 훌륭한 정승이 될 아이요 하면서 훗날 손녀사위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들 내외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니 좀 더 부유한 집안으로 혼처를 정했으면 좋겠다고 반대하는 것을 꾸짖고 혼인을 성사시켰다. 결국 오리 이원익의 직감이 적중하여 허목은 우의정까지 이른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에게 집을 하사한 경우가 3번인데 이원익은 인조 8년(1630)년에 현재의 안산시에 '관감당(觀感堂)"을 받았고, 미수 허목은 수종 4년(1678년)에 현재의 연천에 '수고은거(壽考恩居)'(추후 은거당(恩居堂)으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 채는 문제적 정승인 황희(黃喜)가 받은 '영당(影堂)'이다.




삼척시 정라동 허목길 행정복지센터 뒷산이 육향산(25m)이고 이산 정상에 육향정이 있고, 척주동해비와 대한평수토찬비가 세워져 있다. 올라가는 길에는 5명의 영장(營將)과 2명의 관찰사의 불망비가 모아져 있다. 오른쪽에서 3번째 비가 관찰사 민영휘(원래이름은 민영준)의 유혜불망비인데 그가 벌였던 가렴주구와 매국행위를 절대로 잊으면 안 되겠다고 읽히는 비석이다.


동해척주비가 위치한 육향산 입구, ⓒ 전영식
척주동해비가 있는 비각, ⓒ 전영식


척주동해비


척주동해비(앞면과 뒷면), ⓒ 전영식


척주동해비는 허목이 부사로 재임하고 있던 당시(1660~1662) 조류(潮流) 및 홍수로 바닷물이 마을까지 올라와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기를 기원하며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전서(篆書)로 비문을 써서 1662년(현종 3년)에 만리도(萬里島, 현재 죽서루가 있는 성내동 일대)에 세운 것이다. 신비한 뜻이 담긴 글을 손수 짓고 독특한 필체로 비문을 새겼는데, 신기하게도 바다가 잠잠해지고 그 후로 주민들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조수(潮水)를 물리치는 위력이 있는 신비한 비석이라 하여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리며,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의 제1인자로 불리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로 유명한 비이다.


이후 1708년(숙종 34) 풍랑으로 비석이 부러져 바다에 잠겼던 것을 숙종 35년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본떠 다시 새겼으며, 숙종 36년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 동쪽인 육향산 하단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1969년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정상으로 옮겼다. 정확한 시기는 자료마다 약간 다르다. 현재 주변이 다 매립되고 건물이 들어서서 육향산에서는 바다도 안 보인다.


척주동해비 비문, 출처: 문화재청


<< 척주동해비 비문(碑文) 풀이 >>


이 고을은 옛날 실직씨의 땅으로 예나라의 옛터 남쪽에 있으며, 서울에서 7백 리이고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다. 도호부사 공암 허목 씀


큰 바다 끝없이 넓어/ 온갖 냇물 모여드니/ 그 큼이 무궁하여라
동북쪽 사해(沙海)여서/ 밀물 썰물 없으므로/ 대택(大澤)이라 이름했네
바닷물이 하늘에 닿아/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바다 동쪽에 구름이 끼었네
밝고 밝은 양곡(暘谷)으로/ 태양의 문이라서/ 희백(羲伯)이 공손히/ 해를 맞이하네
석목(析木)의 위차요/ 빈우(牝牛)의 궁(宮)으로/ 해가 본시 돋는 동쪽의 끝이네
교인(鮫人)의 보배와/ 바다에 잠긴 온갖 산물은/ 많기도 많아라
기이한 만물이 변화하여/ 너울거리는 상서로움이/ 덕을 일으켜 보여주네
조개 속에 든 진주는/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리네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天吳)와/ 외발 달린 짐승 기(夔)는/ 태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찬란하고 눈부시니/ 자주 빛 붉은빛이 가득 넘치네
보름날 둥실 뜬 달/ 하늘의 수경이 되니/ 뭇별이 광채를 감추네
부상과 사화(沙華)/ 흑치(黑齒)와 마라(麻羅)/ 상투 튼 보가(?家)족
연만의 굴과 조개/ 조와(爪蛙)의 원숭이/ 불제(佛齊)의 소들
바다 밖 잡종으로/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치어/ 온갖 오랑캐들이 중역으로 왔으나
멀다고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다/ 그 다스림 넓고 크나니/ 그 치적은 영원히 빛나리.


대한평수토찬비


평수토찬비(앞면과 뒷면), ⓒ 전영식


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으며 동해비와 같은 의미로 세운 것이다. 대한평수토찬비의 비문은 삼척부사 허목이 지은 것으로,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모아 목판에 새긴 것이다. 그 내용은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란다. 오랜 기간 읍사(邑司)에 보관되어 오던 것을 1904년(광무 8) 칙사(勅使) 강홍대(康洪大)와 삼척 군수 정운석(鄭雲晳) 등이 고종의 명을 받아 돌에 새겨서 죽관도(현재의 위치인 육향산)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척주동해비와 대한평수토찬비는 전서체의 대가로 알려진 허목의 글씨로 새겨져 중국의 글씨와 뚜렷이 구별되는 창조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자료이다.


두 비석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척주동해비는 현재 전면에 ‘척주동해비각(陟州東海碑閣)’, 후면에 ‘동해비각(東海碑閣)’이라고 쓴 제액(題額)이 걸려있는 비각 안에, 대한평수토찬비는 현재 전면에 ‘우전각(禹篆閣)’이라고 쓴 제액이 걸려 있는 비각 안에 세워져서 보존되어 오고 있다.


동해안 해일


지질학적으로 동해안은 약 2500만 년 전 태평양판이 유라시아판 밑으로 섭입 되면서 만들어진 후배호분지(Back-arc basin)이다. 내해와 같이 육지에 둘러싸여 어느 곳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다른 지역으로 곧 지진해일이 밀려올 수 있다. 당연히 지진해일(쓰나미)에 취약한 지역 중 하나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해일 피해를 겪었다. 특히 일본 서해안을 따라 발달한 동해 동연 변동대(East Sea marginal fault zone)는 활발한 지각 활동을 보이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해저 지진은 대규모의 해수 이동을 유발하여 동해안으로 지진해일을 전파시킨다. 역사기록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1024년(현종 15년) 2월에 "동해(東海)에서 큰 물결이 밀려와 민가를 휩쓸어 갔으며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듯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동해안에서 발생한 최초의 지진해일 기록이다(고려사, 권 4 현종 15년 조). 또 1035년(정종 1년) 3월에는 동해에 물이 넘쳐흘러 해안 마을에 물이 차올라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더 많은 기록이 있는데 총 175건이 존재한다. 시기별로는 1701~1725년 사이에 23건이 일어나 가장 많은 빈도를 보였다(김다해 외, 2021). 1681년(숙종 7년) 5월 11일 지진 해일이 일어나 삼척 동쪽 능파대(凌波臺) 물속 10여 장(丈)되는 돌이 있었는데 가운데가 부러졌고 바닷물이 조수(潮水)가 밀려가는 모양과 같았는데 평소 물이 찼던 곳이 1백여 보(步) 혹은 50~60보 노출됐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1983 임원항 지진해일 내습_한국해양과학기술원.jpg 1983년 5월 26일 임원항 지진해일 내습, 출처: 한국해양과학기술원

19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관측된 지진해일은 네 차례이며, 모두 동해의 일본 근해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에 수반된 것이다. 1983년 5월 26일 일본 아키타(秋田) 현 서쪽 해역에서 규모 7.7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우리나라, 러시아, 일본에 큰 지진해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지진해일의 최대 높이는 일본에서는 15m, 러시아 5m, 우리나라 동해안의 임원에는 3.1m를 기록했다. 이 지진해일은 지진이 발생한 후 77분에 울릉도에, 112분 후에 포항에 도달하였다.


당시 주민제보에 따르면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임원항에서는 ‘꽝’하는 폭음과 함께 수심 5m의 항구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한꺼번에 물이 빠져나갔다가, 그 후 약 10분 후 ‘쏴’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이 지진해일은 역사상 가장 큰 지진해일로 기록되며 5명(사망 1명, 실종 2명, 부상 2명)의 인명피해와 선박피해 81척(전파 47척, 반파 34척), 건물 및 시설피해 등 총 4억여 원의 재산피해를 발생시켰다.


딱 10년 뒤인 1993년 7월 12일에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오쿠시리(奥尻)섬 북서해역에서 규모 7.8의 지진이 발생하여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0.5~3m의 지진해일을 유발했다. 지진해일이 도달 전에 미리 기상청이 지진해일특보를 발령하여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약 3억 9천만 원의 재산피해가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 이후 지진해일 발생 기록, 출처: 기상청

2024년 1월 1일 오후 4시 10분경 일본 이시카와현 북쪽 해역에서 발생한 강도 7.6 강진으로 우리나라 해안에 31년 만에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했다. 묵호항에 오후 8시 35분경 최고 85㎝ 높이의 지진해일이 밀려왔다. 묵호항 주변은 향하는 물길의 수심이 깊어져 이때 지진해일 에너지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진 발생 지역과 규모에 따라 발생하는 쓰나미를 예측하고 부수되는 지진해일이 동해안 어느 지점에 얼마 후에 영향을 미칠지 시뮬레이션하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연안에서 지진 발생 시 적절한 지진해일경보를 적기에 발령할 수 있다. 일본 혼슈 서해안에서 발생하는 지진해일은 대략 1~2시간 내외에 동해안에 도달하기 때문에 해일경보에 따라 신속하게 대피를 하여야 한다. 울릉도는 더 빨리 온다. 지진해일주의보는 '규모 6.0 이상 해저지진이 발생해 우리나라 해안가에 높이 0.5m(50㎝) 이상 1.0m 미만 지진해일 내습이 예상되는 경우'에 발령되고, 1.0m 이상으로 예상되는 경우는 지진해일경보를 발령한다.


스나미 모의 실험.jpg 동해안 지진해일 수치모의 결과, 출처: 손동효 외, 2018

일본 서쪽해역 12개 지점에서 규모 8.0 지진 발생을 가정하고 지진해일 수치모의를 수행한 결과를 동해안에 약 90분~130분 후에 지진이 도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우측에 붉은 별은 지진 발생지점이고 , 동해안을 따라 표시된 푸른 점이 관측지점이다. 삽도 중의 붉은 점은 지진해일에 의한 관측지점별 평균 파고(m)이고, 파란 수평막대는 표준편차이다. 임원과 울진사이에서 3m를 초과하여 높게 나오는데, 이는 대화퇴 부근에서 지진해일이 회절 및 굴절되어 전파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손동호 외, 2018)


동해안의 지진해일 대피로 안내판, ⓒ 전영식


미수 허목의 척주동해비가 정말로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동해안은 일본이나 동해의 지진에 따른 쓰나미가 언제든 올 수 있는 지역이다. 해안가 곳곳에는 해일 시의 대피 장소에 대해 알리는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다.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척주동해비는 주술적인 효과가 있어 지금도 비문 탁본을 집이나 상점에 비치하고 태평한 삶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문화원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도교에도 능한 팔박미인 미수 선생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읽히는 지질학 관련 유적이다.


참고문헌


1. 2024 동해안 지진해일 분석보고서, 기상청, 2024

2. 김다헤, 홍성찬, 최광희, 조선시대(1392~1910) 해일 발생의 시공간적 분포 특성, 한국지형학회 제28권 제3호, 2021, p. 37~49, http://dx.doi.org/10.16968/JKGA.28.3.37

3. 박종인의 땅의 역사, 사람들은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 탄식하였다, 조선일보, 2024.5.1

4. 변상신, 김경옥,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1741년 쓰나미 영향 연구, 한국해안 · 해양공학회, 2021, Feb., 33(1), p.30~37, https://doi.org/10.9765/KSCOE.2021.33.1.30

4. 손동효, 박순천, 이준환, 문광석, 김현승, 이덕기, 지진해일 시나리오 DB에 기반한 동해안 지진해일 위험 지역 분류, 한국방재학회, Vol. 18, No. 3 (Apr. 2018), pp.303~310, https://doi.org/10.9798/KOSHAM.2018.18.3.303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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